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 중 한 대목이다. 자화상은 스스로 그린 자기의 초상화일 뿐이지만 자기는 그림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시인에게도 화가에게도 자화상은 특별한 의미다. 자기에 대한 애증이 담겨있고 성찰도 담겨 있다.
최근 진행되는 미술 전람회에도 자화상이 많이 전시돼 있다. 다음달 4일과 10월4일까지 이어지는 프리다 칼로, 모딜리아니 전시회도 그렇고 오는 27일이면 끝나는 앤디 워홀 전시회에도 자화상이 있다.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에는 화가의 눈에 비친 자신이 있고 관객은 자화상을 통해 두명의 프리다 칼로를 본다.
프리다 칼로는 18살에 대형 교통사고를 당한 후 침대 위에 달린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4년 후 당시 유명 벽화가였던 21살 연상의 디에고 리베라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디에고는 프리다의 동생과 바람을 피는 등 외도를 일삼았다. 프리다는 리베라와 이혼, 재결합, 3번의 유산 등 육체적 고통과 애증의 세월을 보내며 수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이번 전시에서도 만날 수 있는'내 마음 속의 디에고(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 Diego on My Mind(Self-Portrait as Tehuana)'를 보면 프리다에게 디에고의 존재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프리다에게 디에고는 정신적 지주이자 우상이었다. 프리다는 "내 인생에 두 번의 대형 사고가 있었다. 하나는 전차 사고이며, 다른 하나는 디에고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디에고의 외도에 절망한 프리다는 남편에게서 독립을 시도하기도 했다. 디에고와 이혼 후 그린'짧은 머리의 자화상(Self-Portrait With Cropped Hair)'에서는 프리다가 느낀 심적 고통이 전해진다. 작품 속 프리다 뒤의 벽에는 '보세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면, 그건 당신의 머리카락 때문이죠. 지금 당신은 대머리가 되었어요.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라는 문구가 쓰여있다.
영국 가디언의 미술평론가 조나단 존스는 이 작품을 '미술사를 빛낸 자화상 10선' 중 하나로 꼽으며 "꿈 속의 한 장면같은 이 그림에서 프리다 칼로의 잘린 머리카락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둥둥 떠다닌다"며 "사랑의 순교자인 프리다 칼로의 모습에서 막달라 마리아나 금욕적인 순교자 같은 가톨릭 분위기가 느껴진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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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브란트부터 피카소까지…'미술사를 빛낸 자화상 10선'
조나단 존스는 프리다 칼로의 '짧은 머리의 자화상'을 비롯해 자화상을 새로운 예술의 수준으로 올려놓은 작품 10선을 선정했다. 렘브란트, 파블로 피카소, 루시안 프로이트 등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포함됐다.

세계미술사에서 가장 많은 자화상을 남긴 렘브란트의 작품 중에는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과 '두 개의 원과 자화상' 2점이 이름을 올렸다.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자화상(Self-Portrait With Saskia)'은 30대가 된 렘브란트가 아내 사스키아와 함께 있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다. 이 동판화에서 렘브란트는 스케치를 하다 멈춘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조나단 존스는 "이 동판화는 렘브란트에게 예술이란 형식적 활동이 아닌 삶의 일부였음을 보여준다"며 "두 부부의 평온한 표정에서 서로가 느끼는 만족감이 전달된다"고 해석했다.
'두 개의 원과 자화상(Self-Portrait With Two Circles)'은 렘브란트가 57세에 그린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그림을 그리는 도중에 멈춘 듯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가 걸친 예복은 그가 부유한 귀족임을 말해준다. 벽에는 커다란 원 2개가 있는데 조나단 존스는 "이 수수께끼 같은 원 2개는 렘브란트만의 세계를 상징한다"고 해석했다. 존스는 "이 그림 앞에 서 있으면 진짜 사람이 나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조사하는 느낌이 든다"며 "렘브란트는 의식과 기억, 시간의 어두운 통로 같은 눈으로 당신을 바라본다"고 평했다.

스페인 거장 파블로 피카소의 자화상에서 그의 눈은 항상 보는 사람을 빨아들일 것처럼 커다랗다. 한 평생 거의 여성만을 그렸던 피카소는 죽기 직전인 1972년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는'죽음에 맞선 자화상(Self-Portrait Facing Death)'에서 시간이 흘러 망가진 자신의 모습을 단순하고 천진하게 그려내고 있다. 존스는 "그의 커다란 눈에서 죽음을 앞둔 거장의 내면이 느껴진다"고 평했다.
21세기 극사실주의 화가로 유명한 루시안 프로이드는 "죽는 날까지 자화상을 그릴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자화상을 많이 그렸다. 프로이드의 극사실주의 화법은 그리는 대상에 대한 차가운 시선에서 시작된다. 자화상을 그릴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화상을 통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것에 대한 극심한 불편을 날카롭게 표현하고 있다.'두 아이와 함께 비친 모습(Reflection With Two Children)'에서 프로이드는 거대한 아버지의 모습을 하고 있다. 거울에 비친 아이들의 모습은 난쟁이처럼 작다. 존스는 "자의식에 대한 괴리와 불안을 표현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16세기 초반 19세 청년이던 이탈리아 화가 파르미자니노는 볼록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반으로 자른 나무공 위에 옮겼다. 마치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인상을 주는 걸작'볼록 거울 속의 자화상(Self-Portrait in a Convex Mirror)'입소문을 타고 교황의 귀에 들어갔고, 파르미자니노는 교황 클레멘트 7세에게 이 작품을 선물했다.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여성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는 서양 역사상 최초의 페미니스트 화가라고 불렸다. 성경과 신화의 주인공을 주제로 강력한 여성상을 그렸던 그는 자화상'회화의 알레고리로서 자화상(Self-Portrait as the Allegory of Painting)'에서도 자신의 모습을 강하고 억센 느낌으로 표현한다.
영국 화가 데이비드 호크니의'찰리와 함께 한 자화상(Self-Portrait With Charlie)'도 이름을 올렸다. 존스는 "호크니는 자화상에서 결코 멋져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며 "그는 자화상을 자신의 행동과 자신이 거울을 통해 본 것을 솔직하게 그린다"고 평했다.

자기초상화 외에 2점의 사진 작품도 선정됐다. 미국의 유명 사진 작가 신디 셔먼은 히치콕 영화를 기초로'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시리즈를 제작한다. 신디 셔먼은 이 시리즈에서 금발의 여배우로 분장한 채 자신의 다양한 모습을 시적으로 담아냈다.
영국작가 트레이시 에민은'아이브 갓 잇 올(I've Got It All)'에서 반나체로 앉아 허벅지 사이로 지폐를 끌어앉고 있다. 그의 앞에는 동전들이 흩뿌려져 있다. 존스는 "에민은 이 작품을 통해 돈과 자신의 관계를 풍자하고 있다"고 해석하며 "에민의 예술은 그의 삶 자체이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고 평했다.
윤동주의 시 ‘자화상’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