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에게 불륜인 것은 내게도 불륜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국민연금의 공공투자를 당론으로 삼고 국민연금법 개정안을 낸 데 이어 지난 19일엔 한국노총과 국민연금 기금을 공공부문에 투자하기로 정책협약을 맺었다.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 한국노총 몫의 위원이 1명 있으므로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그러나 더민주가 ‘국민연금 공공투자 특위’까지 만들어 공공임대주택사업, 보육시설 확충 등에 국민연금을 쓰자는 방안은 정치적 목적을 위한 편법이다.
공공임대주택을 짓든 국공립 어린이집을 늘리든 간에 이는 정부가 세금을 더 걷거나 빚을 내거나 해서 재정으로 충당해야 하는 일이다.
정부의 재정이 들어가야 되는 ‘국책은행 자본확충’에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한다며 ‘편법’(김종인) ‘비정상적인 처사(이언주)’ 등의 표현을 써 가며 비판했던 더민주였다.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정부부처가 한은을 활용하는 게 우회로였다면 더민주가 국민연금을 쓰는 것 역시 정공법이 아니다.
더민주의 방안은 국민연금이 직접 공공임대 사업에 투자하는 방식이 아니라, 정부나 공공기관이 국민안심채권이란 이름의 특수채권 100조원(국민연금 기금운용액 535조원의 19%)어치를 발행하고 이를 국민연금이 10년에 걸쳐 사 주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는 국민연금이 소진될 때에 국내자산의 현금화가 쉽지 않고 자산가격이 급락할 수 있어 해외투자, 대체투자 등의 비중을 높이려던 방향과 배치된다.
더민주는 원금에다 약정이자도 보장된다고 주장하는데, 일반국공채보다 높은 이자를 정부가 국민연금에 줘야 한다면 정부 재정은 그만큼 마이너스가 된다.
게다가 공공 임대주택은 보증금과 임대료를 낮게 매길 수 밖에 없다. LH의 주된 적자요인도 ‘지을수록 손실(1가구당 9600만원)이 나는’ 임대주택이었고 SH도 임대주택의 손실이 컸다.
독자들의 PICK
지금 6,720명 읽는 중
이런 상황에서 정부가 국민안심채권의 수익률을 보장해 주면 정부가, 그렇지 못하면 국민연금이 손실을 떠안게 된다.
더민주의 말대로 수익률이 높다면, 2001년부터 정부가 적자를 보전중인 공무원연금, 국민연금보다 18년 앞선 2042년에 고갈되는 사학연금이 국민안심채권을 더 인수해야 하지 않을까?
공무원연금과 사학연금 등은 문제가 생기면 정부가 메워 줘야 하는데, 정부가 직접 지원을 하든 국민안심채권으로 많은 이자를 주든 어차피 마찬가지일테니 말이다.
또 고수익 국공채라면 민간에서 충분히 소화될 터이니 굳이 가입자들의 걱정과 반발을 무릅쓰고 국민연금을 가져다 쓸 이유도 없다.
공공임대주택이나 국공립 어린이집을 지어야 하는데 ‘재원이 없어 100조원의 증세를 해야 한다’고 정직하게 말하면 지지를 못 받으니 ‘국민연금 공공투자’로 포장해 혹세무민하려는 것이다.
우상호 더민주 원내대표는 국민연금 공공투자 정책이 “당파적으로 보이면 절대 관철될 수 없다”고 했지만 어떤 사회적 합의도 없는 이런 시도가 당파적으로 안 비칠 수 있을까?
더민주가 한국노총 뿐만 아니라 민노총 등과도 정책협약을 추진할 것이라고 하는데 지도부는 국민연금 가입자인 다수 조합원들의 이익에 반하는 건 아닌지 깊이 따져 봐야 한다.
역시 국민연금으로 청년희망주택을 짓겠다는 ‘국민의당’ 김성식 정책위의장은 국책은행 자본확충과 관련해 “부담을 국민에게 안기는 한은의 발권력이 동원된 것은 나쁜 선례“라고 했다.
두 당을 비롯해 정치권이나 정부가 한번 국민연금을 빼서 쓰기 시작하면, 앞으로 국민연금은 모든 정파, 당파들의 쌈짓돈이 될 가능성이 커지므로 그런 전례를 만들어선 안 된다.
우 대표가 국민연금 공공투자를 ‘묘수’라고 말했지만 사실은 정부가 100조원의 세금을 더 걷거나 일반국공채를 발행해 그 돈을 써야 할 일을 살짝 꼬아 놓은 꼼수에 불과하다.
그렇게 늘어난 정부나 공공부채에 대한 납세부담(혹은 국민연금 적자나 고갈에 따른 짐)은 결국엔 공공임대주택에 태어나 국공립 어린이집을 다니게 될 아이들이 나중에 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