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박해수가 '허수아비'를 통해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타협하지 않는 형사의 들끓는 투지를 안방극장에 고스란히 전이시켰다. 극에서 진실을 맹렬하게 좇는 형사 강태주 역을 맡은 그는, 거대한 권력에 짓밟히고 벼랑 끝에 내몰리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단단한 내공으로 안방극장을 압도했다.
1980년대 실제 연쇄살인사건을 모티브 한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는 최종화 시청률 8.1%를 기록하며 호평 속에 종영했다. 매회 묵직한 화두를 던진 이 작품의 중심에는 불완전함 속에서도 기어코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강태주, 그리고 이를 빚어낸 박해수의 집요한 연기가 있었다. 뜨거운 호평 속에 작품을 마친 박해수는 쏟아지는 대중의 사랑에 얼떨떨하면서도 깊은 감사를 표했다.
"이렇게 많은 사랑을 받는 걸 피부로 느낀 게 정말 오랜만이에요. 잘 된다는 개념 자체도 몰랐고 그냥 많이 봐주셨으면 좋겠다고만 생각했는데, 같이 열불 터져 주시고 범인도 물어봐 주셔서 감사했죠. 가까운 지인들도 진범이 누구냐고 엄청 물어봤는데 아내한테만 슬쩍 말해줬어요. 친누나는 맘카페 강력한 회원이라 절대 말 안 했고요(웃음)."
'허수아비'는 실제 사건을 겪은 이들의 아픔을 다루는 장르물이기에 박해수는 강태주라는 인물에 다가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버텨낸 인물의 상실감과 고통을 온전히 감당할 수 있을지 두려움이 컸지만, 그만큼 도전 의식도 강렬하게 타올랐다.
"실화 배경을 겪은 인물이 감당해야 할 상황과 트라우마, 그리고 30년 후의 모습까지 제가 공감하고 표현할 수 있을지 진지하게 고민했어요. 누군가를 힘들게 하고 견딘 시간을 연기해야 한다는 게 배우로서 두렵고 긴장됐지만, 다행히 (이)희준이 형과 곽선영, 서지혜 배우가 있어서 마음이 놓였죠. 첫 리딩 때 희준 형이 '우리 이번에 척하지 말자, 캐릭터가 아니라 인간으로 표현하자'고 하더라고요. 강태주는 제 연기 인생에서도 큰 변환점이자 잊지 못할 도전입니다."
극 중 강태주는 불완전하고 실수도 하지만 내면에 진실을 추구하는 옹달샘을 품고 부단히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박해수는 그런 강태주의 삶을 들여다보며 인간 박해수로서 묘한 부끄러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느꼈다고 털어놨다.
"강태주는 불완전한 인간이지만 마음 안에 진실을 향한 옹달샘이 존재해요. 당시 능력으로는 불가항력적인 상황들이 있었지만, 그 안에서 계속 나아가려 했던 친구죠. 1980년대의 과오를 지나 노년의 강태주가 됐을 때 자신의 잘못된 판단을 되돌아보고 원자리를 찾으려는 모습이 깊이 있었어요. 겪어보지 못한 노년의 나이를 표현하면서 '저렇게 멋있게 늙을 수 있을까' 싶었고, 제 나이에 그런 이상향적인 어른을 만났다는 게 부끄러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덧붙여 처음 해본 노역 분장도 재미있었어요."
이번 작품에서 가장 큰 시너지를 낸 배우는 단연 차시영 역의 이희준이다. 극단 시절부터 인연을 맺어온 두 사람은 '허수아비'에서 서로의 바닥까지 끌어내는 팽팽한 연기 대결을 펼쳤다. 박해수는 이희준을 향해 "평생 같이할 수 있는 파트너"라며 깊은 신뢰를 드러냈다.
"형 앞에서는 제가 잘하건 못하건 인식하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어요. 배우들끼리 내가 틀렸을 때 상대가 어떻게 생각할까 두려움이 생길 수 있는데, (이)희준이 형과는 그런 게 전혀 없죠. 촬영 전 과거 상황에 대해 즉흥 연기도 해보고, 대본도 치열하게 같이 봤어요. 가장 미워하는 사이가 되려면 가장 기댔던 사이여야 하잖아요. 태주 역시 시영을 정말 미워했다면 회피했겠지만, 관계 회복에 대한 희망이 있었기에 끝까지 붙들고 있었던 것 같아요."
동료 배우들을 향한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박해수는 서지원 역의 곽선영이 보여준 깊은 배려심에 감동했고, 이복동생으로 호흡을 맞춘 서지혜의 열정에 박수를 보냈다.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극의 판도를 뒤집은 이용우 역의 정문성에 대해서는 "타이밍을 뺏어버리며 우상화 없이 범인을 묘사한 훌륭한 등장"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곽)선영 배우가 제 역할을 위해 울어주고 대변해 주는 연기를 보면서 너무 마음이 아팠어요. 욕심부려서 자기 신으로 가져갈 수도 있는데 온전히 작품에 녹아들어 상대를 위해주는 모습에 큰 감명을 받았죠. 서지혜 배우는 송건희 배우와 함께 현장을 밝게 만들어줬어요. 뙤약볕에서 땀을 뻘뻘 흘리는 걸 신경쓰지 않고 훌륭하게 연기해 줘서 정말 고마웠습니다."
극 중 OST '잊혀진 것'을 직접 가창하며 화제를 모으기도 한 박해수는 끈끈했던 현장 분위기를 회상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주연 배우의 OST 참여가 극의 몰입을 해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작품의 정서와 맞닿은 곡인 만큼 책임감을 갖고 연습했다며 앞으로도 기회가 온다면 OST를 기꺼이 부르겠다고 했다.
"감독님이 OST를 제안하셨을 때 '주인공이 부르면 극 몰입에 방해가 되지 않을까요?' 여쭤봤는데, 스토리상 다른 인물들이 부르기엔 상황이 묘해서 어쩔 수 없겠더라고요(웃음). 음원이 나오니까 친구들이 당장 술 사라고 난리가 났어요. 사실 (정)문성이 형이나 (이)희준이 형도 노래를 잘해요. 그런데 그분들이 하기에는 이야기상 이상하잖아요.(웃음) 정말 많이 연습했어요. 다른 작품에서도 OST 제안을 받으면 할 것 같아요."
특히 박해수는 '허수아비'가 자신의 연기 인생에 찾아온 구원 같은 작품이었음을 털어놓으며 눈빛을 반짝였다. 끝없는 고민 속에서 슬럼프를 겪던 시기, 강태주라는 단단한 인물을 만나 배우로서 다시 일어설 힘을 얻었다고 했다.
"사실 이 작품 이전에 연기적으로 굉장히 고민이 많고 무서웠던 시기가 있었어요. 자칫하면 위험하겠다 싶을 정도로 바닥을 쳤는데, 그때 이 작품을 만났고 태주라는 인물을 연기하며 큰 위로를 받았어요.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내버려 두되 치열하게 애쓰는 의지로 연기했어요. 상상도 못 한 큰 사랑을 보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대중에게 배우들은 빨리 잊혀도 '허수아비'라는 작품만큼은 아주 오래 기억에 남았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배우로 나이 들고 싶은지 묻자 박해수는 "재밌게 나이 들고 싶다"고 했다. 진지함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자신을 무장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강태주가 끝내 잃지 않았던 바른 마음처럼 박해수 역시 편안하고 건강한 사람으로 남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재밌게 나이 들고 싶어요. 진지한 건 좋지만 그걸로 무장하고 싶지는 않아요. 주변 사람들이 쉽게 말 걸고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좋겠어요. 강태주라는 사람의 면모도 갖고 싶고요. 배우 박해수로서는 편안하게 접근할 수 있는 사람, 정신이 바르고 건강한 사람이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