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세계자연기금(WWF)의 기후변화 대응 평가에서 한국 지자체 중 유일하게 글로벌 본선에 진출하고, 글로벌 기후에너지시장협약(GCoM) 최고등급을 2년 연속 받은 전라남도 여수시.
온실가스 배출이 많은 석유화학 국가산단을 품은 산업도시가 국내 기후변화 대응 선도 도시로 주목받는 배경에는 지역 구성원들이 10년 넘게 이어온 '기후변화대응 민관산학 협의체'가 있다.
지난 17일 전남대학교 여수캠퍼스에 위치한 여수시 탄소중립센터에서 협의체 이행평가 실무를 총괄해 온 문영수 전남대학교 학술연구교수와 여수시 기후생태과의 한성진 COP33 유치팀장을 만나 협의체의 운영 방식과 10년 넘게 지속될 수 있었던 배경을 들었다.
여수시 기후변화대응 민관산학 협의체의 모체는 2013년 민·관·산·학이 함께 수립한 '온실가스 자율저감 지역행동계획'이다. 탄소 감축 사업이 계획대로 이행되는지 점검하고, 그 결과를 다음 정책에 반영하기 위해 꾸려진 조직이다. 2023년 '기후변화대응 민관산학 협의체'로 개편됐다.
초기에는 시행착오도 있었다. 다양한 구성원이 모이는 협의체가 익숙하지 않았던 탓에 시민 측 참석자가 시 당국을 평가하는 듯한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한다. 2015년께부터 협의체 활동에 참여해 4년여 전부터 협의체 실무를 총괄하고 있는 문영수 교수는 "평가라고 하니 초기에는 일종의 '관'에 대한 청문회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경직된 분위기를 완화하기 위한 해법은 시 당국의 개입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관 측 위원은 총괄위원회와 운영위원회 중심으로 참여하고, 자료 협조·사실 확인·제도적 지원에 집중했다. 평가와 제안은 시민·전문가·산업계 위원들이 중심이 돼 진행했다. 이후 협의체는 객관적 자료를 토대로 정책을 점검하고 개선안을 찾는 공간으로 점차 바뀌어 갔다.
한성진 팀장은 자율성을 '장수 거버넌스'의 핵심으로 꼽았다. 그는 "시 정책에 대한 개선 의견이 충분히 나올 수 있도록 자율성을 보장한 것이 중요했다"고 말했다.
이 협의체의 힘은 중앙정부의 지시에 의존하는 하향식 방식이 아니라, 지방정부·기업, 시민사회·전문가가 함께 움직이는 상향식 조직이라는 데서 나온다. 한두 차례 회의로 끝나는 자문기구가 아니라, 소속 위원들의 자발성이 조직의 동력이 돼 촘촘하게 운영 된다.
2년 임기의 시민위원은 공모로 뽑는다. 이렇게 모인 시민 위원들과 여수 산단의 대기업, 여수시 당국자들, 학계 등 총 42명 위원이 에너지·산업, 공공·건축, 교통, 저탄소생활 등 4개 분과로 나뉘어 움직인다.
매년 4~5월 총괄 세미나로 한 해 활동을 시작하고, 이후 분과별 회의를 거쳐 여수시가 추진하는 온실가스 감축 세부 사업을 평가한다. 8~9월 중간 발표회에서는 사업별 진행 상황과 미흡한 부분을 점검하고, 12월 통합 보고회에서는 평가 결과를 정리해 다음 해 정책과 예산에 반영할 과제를 도출한다.
협의체가 들여다보는 사업은 연간 60여 개에 달한다. 사업별 활동자료를 수집하고, 온실가스 감축량을 산정하며, 정량·정성 평가를 함께 진행한다. 기후위기 적응대책 이행 상황도 점검한다. 여수시의 기후 활동 자료는 GCoM, 탄소정보공개프로젝트(CDP) 등 국제 플랫폼에도 등록·보고된다.
이 평가가 보고서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은 참여자들의 효능감을 높인다. 협의체가 우수 사업은 확산하고, 미흡한 사업은 개선 과제로 남긴다. 협의체가 제안한 사업 일부는 2025년 여수시 탄소중립 녹색성장 기본계획 세부사업에도 반영됐다. 신규 사업 제안은 시민 위원 쪽에서 많이 나온다고 한다.
문 교수는 "협의체 평가 결과가 여수시 행정에 법적 구속력을 갖거나 예산을 직접 바꾸는 구조는 아니"라면서도 "지속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는 인식을 제공하고 정책 환류의 근거를 만든다"고 설명했다.
초기에는 여수산단 입주 대기업들로부터 데이터를 얻는 것 역시 쉽지 않았다. LG화학, GS칼텍스, 한화솔루션, 롯데케미칼 등 산단 내 주요 대기업들의 에너지 사용 및 온실가스 감축 활동 관련 자료는 탄소 감축 효과를 파악하는 데 핵심 자료다.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폐열 회수, 부산물 자원화 등 기업 공정과 연결된 환경 정보가 생산공정과 비용 구조를 드러낼 수 있는 민감 정보이기도 했다.
자료 확보가 중요하지만, 무리한 공개 요구는 기업 참여를 위축시킬 수 있다. 반면 시민사회는 지역의 온실가스 감축 성과를 투명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협의체는 평가에 필요한 범위를 명확히 하고 공식 자료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접점을 찾았다. 여수산단 기업을 대상으로 사업별 활동자료를 조사로 수집하되, 기업들이 환경부 등 정부에 공식 제출한 자료도 함께 확인했다. 개별 기업의 감축사업이나 감축 결과를 기업명과 연결해 공개하지 않는 방식으로 보안 우려도 낮췄다.
이 방식은 산업계 참여의 문턱을 낮췄다. 처음에는 부담을 느끼던 기업들도 점차 자료 제출과 논의에 익숙해졌다. 문 교수는 "검증 가능한 범위에서 공정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기업의 보안 우려를 존중하면서도 시민과 전문가가 납득할 수 있는 공식자료와 표준화된 산정 기준을 활용하는 방식이 협의체의 현실적인 운영 방식"이라고 말했다.
여수시와 산단 기업들이 오래전부터 환경 현안을 함께 논의하며 쌓아온 신뢰 역시 이런 구조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여수에는 산단 환경 문제를 행정과 기업, 지역사회가 함께 논의하는 협력 구조가 자리 잡기 시작했다. 지역 환경문제를 공동의 관리 과제로 다뤄온 경험이 기후 이슈에서도 협력의 기반으로 이어진 셈이다.
협의체의 성과는 탄소 감축량만이 아니다. 시민 참여자들이 지역 기후정책의 '전달자' 역할을 하며 도시 전체의 눈높이를 높이고, 이는 다시 협의체의 역량을 강화하는 선순환을 만든다.
협의체에 참여한 시민 대표들은 분과 활동을 통해 온실가스 배출 구조, 시책 사업, 감축 효과 산정 방식, 국제 기후 보고 체계까지 접한다. 이들이 얻은 정보와 문제의식은 다시 지역사회로 퍼져 나간다. 시민이 행정이 만든 캠페인에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시의회와 행정에 더 적극적인 대응을 요구하는 '시민발 정책 환류'가 생겨나는 것이다.
이는 지자체가 하향식으로 진행하는 홍보·교육보다 더 큰 파급력을 낼 수 있다. 한성진 팀장은 "협의체에서 이뤄진 이야기가 회의실 안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위원들이 밖으로 나가 다시 활동으로 펼친다"고 말했다. 실제로 폐선 철도공원과 자전거길 조성 사업이 지연됐을 때 협의체의 시민위원들이 시의회 등에 조속한 업 추진을 요구한 사례도 있었다.
앞으로의 과제는 중앙정부 정책과 현장간 협력 통로를 넓히는 것이다. 문 교수는 "산업부문과 에너지 부문이 넷제로를 위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지만 산업부문 감축을 지역 단위에서 추진하는 데는 구조적 제약이 있다"며 "중앙정부 정책이 지역의 탄소중립 전략과 더 잘 연계되도록 하는 게 과제"라고 했다. 또 "시민이 체감가능한 생활밀착형 감축 사업 구체화 역시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