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다시 이슈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과거사를 둘러싼 한일 관계 개선이 외교가 주변에서 알려진 과제라면 알려지지 않은 일본 관련 난제도 있다. 정확히는 국내 경제계를 중심으로 일본 내 사정을 알리고 싶지 않다는게 더 솔직한 속내일 것이다.
일본에서 정부 주도로 벌이는 '임금인상 캠페인'이 바로 그것이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월 정기국회 시정방침 연설에서 "물가 상승을 넘는 임금 인상이 필요하다"며 재계에 적극적인 임금 인상을 요청했다. 일본은 지난 1월 소비자물가가 41년여 만에 최고치인 4.3% 상승하는 등 역대급 인플레를 겪고 있는데 정작 임금은 십수년째 제자리걸음이어서 볼멘 소리가 터져나온 것이다. 기업들의 반응이 신통치 않은지 기시다 총리는 지난달 22일에도 중의원에서 "구조적인 임금 상승을 촉진해 소비를 진작하고 내수를 확대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시다 총리를 비롯한 일본 정부는 임금 상승률이 물가 상승률에 미치지 못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 속 물가 상승)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선거를 앞둔(실제로 4월에 지방선거, 중의원 보궐선거가 열린다) 포퓰리즘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정부뿐만 아니라 중앙은행인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BOJ) 차기 총재 후보자도 "금융완화를 계속해 기업들이 임금인상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밝힐 정도다. 물가상승률이 4%대인 일본이 이 정도인데 5~6%대(지난해 7월 소비자물가상승률 6.3%)인 한국의 사정은 어떨까.
통상적으로 기업들의 임금인상은 고물가를 더욱더 자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물가 관리의 최종 책임을 져야 할 정부에서는 꺼리기 마련이다. 추경호 경제부총리가 과도한 임금 인상이 고물가 상황을 악화시킬 수 있다며 경영계에 자제를 요청(지난해 6 ~ 7월)해 노동계 등에서 반발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뜯어보면 일본이 경제원리에 어긋난 정책을 펴고 있다고도 보이지만 사정은 좀 다르다. 한국이라면 대표적인 고연봉 직종인 은행업의 경우 일본 대형은행인 미즈호은행이 내년 신입사원 급여로 5만 5000엔(52만6350원) 인상한 26만엔(248만8200원)을 책정했다.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도 올해부터 5만엔을 올려 25만 5000엔으로 정했다. 올해 인상도 인상이지만 지난해까지는 은행 신입사원이 한달에 200만원 안팎의 급여를 받았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총리의 압박 때문인지 단숨에 20 ~ 25% 가량을 올린 것도 이례적이지만 이런 급여가 10여년 동안 지속돼 왔던 것도 눈여볼 일이다. 은행권의 대졸신입 초임 연봉이 대략 5000만~6000만원대 분포인 한국과 비교하면 절반 정도인 셈이다. 장기간 '임금도, 물가도 오르지 않는' 일본의 상황을 고려해도 그렇다. 은행 외에도 자동차기업 혼다, 도요타, IT업체 닌텐도 등도 인상율은 낮지만 임금을 올리겠다고 나섰다. 심지어 소매업체 패스트리테일링(유니클로 운영사)은 최대 40%의 파격적인 월급 인상을 예고했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전형적인 형태인 '물가상승→소득정체→소비위축→경기위축' 의 고리에서 소득정체를 끊어내겠다는 것이 일본의 구상이지만 최종적인 효과는 지켜봐야 한다. 다만 기업들(주로 대기업)이 이같은 정책에 호응해줄 수 있을 정도로 현금이 넉넉하다는 것은 정부의 부담이 덜하게 하는 부분이다.
국내 경제계에는 일본의 뒤를 이은 유산이 많다. 노사갈등의 대명사처럼 쓰이는 춘투(봄을 전후한 노사간의 임금교섭 대립)라는 용어도 일본이 원조고 지금은 다소 빛이 바랬지만 사용자단체의 대표격인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도 일본의 게이단롄(경제단체연합회)를 본떠 만들었다. 고용과 급여 관련 제도 등도 일본식인게 많았지만 어느 순간(대략 IMF 외환위기 전후) 글로벌 스탠다드라면 미국식 제도가 도입되면서 다소 상황이 달라졌다.
호봉제, 종신고용 등 일본식 급여제도를 대거 받아들였던 한국이 이제 임금과 관련해 명확히 일본과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다. 하지만 국민들이 쓸수 있는 돈(가처분소득)을 늘려줘야 한다는 데에서는 정책당국의 목표가 다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민심과 멀어질 수 밖에 없고 선거를 통해 의회 다수당을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급여인상과 달리 한국은 정부 차원에서 전기요금, 가스요금, 생필품(소주, 맥주 등) 가격 상승 억제로 다른 길을 택했다. 정치적 타협(과거사 문제 봉합 등)으로 양국 정부의 기대대로라면 한층 양국이 가까워질(?) 연말쯤 되면 경제 성적표도 나올 것이다. 출범 과정과 지지율 추이를 볼때 탄탄하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는 양국 정상과 정부의 선택은 어느쪽이 옳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