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묵직한 중앙 장악, 이세돌의 날카로운 전투, 조훈현의 두터운 세력싸움. 한 세대를 풍미한 바둑기사들은 저마다 뚜렷한 색깔 '기풍'이 있었다.
요즘 바둑판에서는 '기풍'이 사라졌다는 말이 나온다. 실제로 프로기사들의 대국은 묘하게 비슷하다. 포석 패턴도, 행마의 리듬도, 실수하는 지점까지 닮아간다.
알파고 이후의 풍경이다. AI가 제시한 '최선'을 따르다 보니 개성이 희석된 것이다. 대국장에는 실시간 승률그래프가 뜬다. 관전자도 해설자도 바둑기사도 그 숫자를 본다. AI가 가리킨 길에서 벗어나면 창의가 아닌 실수가 된다.
바둑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글을 쓸 때도, 전략을 짤 때도, 창작할 때도 AI에 묻는다. AI는 항상 확신에 찬 답을 내놓는다. 리스크가 적은, '평균적 최선'이다.
경쟁자도 AI를 쓴다. 같은 데이터를 학습한 모델은 같은 패턴을 추천한다. 차별화는 사라지고 누가 먼저 AI 답안을 실행에 옮기느냐의 속도 경쟁만 남는다. 바둑에서 기풍이 사라진 것처럼 비즈니스에서는 전략의 다양성이, 콘텐츠에서는 독창성이 희미해진다.
AI를 거부할 수는 없다. 게임의 룰이 달라졌다. AI 없이 경쟁하는 것은 계산기 없이 수학시험을 보겠다는 것과 같다. 비효율적이고 불필요한 핸디캡이다.
AI를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비판적 대화가 이를 가능하게 한다.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으며 AI 시대 스스로의 '기풍'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때로는 AI가 제시한 '정답'을 거부할 용기도 필요하다.
AI는 도구다. 강력하고 비교적 정확하다. 쓰는 것은 사람이다. 의도와 판단, 무엇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좋은 칼과 재료가 있어도 모두가 같은 수준의 요리를 만드는 것은 아니다.
앞으로의 차이를 만드는 것은 AI가 주는 정답을 자기만의 언어로 재해석하고 맥락에 적용하며 필요하다면 과감히 비켜갈 줄 아는 능력일 것이다. 모두가 정답을 아는 시대. 진짜 승부는 정답 너머에서 벌어진다.
바둑판의 기풍은 사라진 게 아니라 변화했다. AI 적중률이 높아 '신공지능'으로 불리는 신진서 9단이 '최강자'로 군림한다. AI 시대의 개성은 AI를 거부하는 데서가 아니라 AI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방식'에서 탄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