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상 칼럼] 왜 고려아연은 '안보의 외주화' 대상이 되었나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
2026.03.31 07:40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2026년 정기 주총 시즌은 그 어느 때보다 '주주 환원'과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압박이 거셌던 시기로 요약할 수 있다. 3차에 걸친 상법 개정과 밸류업 프로그램이 본격 가동되면서 투자자들의 눈높이가 높아진 결과다. 삼성전자는 이번 주총에서 이사 보수한도 승인과 관련해 국민연금 및 소액주주들과 긴장감을 형성했다. 특히 반도체 실적 회복세에 따른 경영진의 책임 경영과 주주 환원 정책의 연결고리를 강화하라는 요구가 빗발쳤으며, 향후 M&A 전략에 대한 구체적인 답변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현대자동차는 분기 배당 확대와 자사주 소각 카드를 꺼내 들며 주주들을 달랬다. 하지만 여전히 순환출자 구조 해소와 같은 근본적인 지배구조 개편에 대한 시장의 압박은 여전한 숙제로 남았다.

이번 주총 시즌에 시장에서 가장 관심을 끌었던 고려아연 정기주주총회는 한국 자본시장에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었다. 경영권 다툼이 치열한 상황에서 주주들은 무엇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어떻게 판단했는지, 특히 결정적인 캐스팅보트를 쥔 국민연금과 글로벌 연기금 등 공적 기관투자자의 의사결정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고려아연 주총의 핵심 안건은 사측이 제시한 '이사 5인 선임안'이었다. 기존 이사진의 임기 만료에 따라 새로운 이사 5명을 선임하여 이사회를 구성하고, 현 경영 체제의 안정성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경영권을 노리는 MBK·영풍 측이 추천한 후보들과 맞붙는 구조였기 때문에, 이 안건의 통과 여부는 불투명했다.

결과는 시장의 예상보다 훨씬 압도적인 차이로 안건이 통과되었다. 사측의 이사 5인 선임안은 63%의 찬성을 얻어 MBK·영풍 측을 약 11%포인트 차이로 앞질렀다. 주주들이 현 경영진을 지지하겠다는 뜻이다. 결국 이사회는 현 경영진 측 9석 대 MBK·영풍 측 5석 구도로 재편되며 경영권 방어에 성공했다.

이러한 결과는 지난해 말 기준 약 15% 안팎으로 추정되는 소액주주 지분율과 양측 지분율 격차를 고려하면, 소액주주 대다수가 현 경영진 측으로 집결한 셈이다. 눈에 띄는 대목은 미국의 CalSTRS, FRS, 캐나다의 BCI 등 글로벌 연기금들이 모두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사측 안건에 대해 글래스루이스, ISS 등 글로벌 자문사들은 물론 서스틴베스트, 한국ESG연구소, 한국ESG평가원, 한국의결권자문 등 국내 자문사들도 일제히 현 경영진 지지 의견을 냈었다.

이처럼 광범위한 지지가 형성된 배경에는 무엇보다 실적에 대한 신뢰가 있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고려아연은 44년 연속 흑자, 매출 16조5800억 원·영업이익 1조 1795억 원의 사상 최대 실적을 기록함과 동시에 자사주 204만 주 전량 소각과 주당 2만 원 배당 등 강력한 주주환원 정책을 펼쳤다. 또한 임의적립금 9177억 원을 미처분이익잉여금으로 전환해 향후 배당 재원을 확보한 것도 현 경영진에 대한 신뢰를 높이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실적만 좋았던 것은 아니다. 고려아연은 미국 정부가 주목하는 핵심광물 공급망 전략의 핵심 파트너이기도 하다. 미국은 중국을 배제한 공급망 구축을 국가 안보 차원에서 추진 중이며, 고려아연의 프로젝트는 그 이정표와 같다. MBK 측 펀드에 중국 자본(CIC)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은, 안보를 중시하는 미국 입장에서는 민감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북미를 포함한 글로벌 연기금들은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와 기업의 장기적 가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현 경영진을 지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의 국민연금은 '의결권 미행사(기권)'라는 다소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형식은 기권이지만 '기업가치 훼손 및 주주권익 침해 이력'이라는 사유를 명시한 이상 시장은 이를 사실상 반대로 해석했다. 노조와 학계에서는 국가 기간산업의 기술 주권 보호보다 내부 규정에 치중한 '방관적 태도'라는 지적이 제기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미국의 핵심광물 공급망 전략과 연계된 국가기간산업의 경영권 구도에서 MBK·영풍 측에 유리한 방향으로 힘을 보탠 셈이 됐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은 '왜 글로벌 연기금이 국민연금 대신 한국의 핵심광물 기업을 지켜야 했는가'라는 어색한 질문을 던지게 했다. 이에 대해 선진국 연기금들이 큰 그림을 볼 때, 국민연금은 분쟁 과정에서의 절차적 논란 등 단기적인 이슈에 매몰되어 본질적인 기업 가치를 놓쳤다는 비판이 나온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결정 구조를 근본적으로 재설계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기업을 수년간 분석·모니터링해온 기금운용본부가 아닌 외부 인사 중심의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가 핵심 안건의 최종 판단을 내리는 체제다. 수책위는 국민연금이 보유한 주식의 의결권 행사 방향을 결정하는 핵심 기구다. 이러한 구조는 2015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 논란 이후 정치적 개입을 차단하고자 만들어졌다. 그러나 오히려 이로 인해 투자 논리와 의결권 행사 사이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수책위는 기업과 지속적으로 소통하며 정보를 쌓아온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장기적인 기업 가치나 산업 안보 측면보다는 정치적 상황이나 여론에 의해 의사결정이 왜곡될 위험이 크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캐나다 CPPIB, 미국 CalPERS 등 선진 연기금들은 기업을 분석·편입·모니터링하는 일련의 투자 과정 안에서 내부 스튜어드십팀이 직접 의결권을 행사하며 그 결과에 책임을 진다. 의결권은 포트폴리오 운용과 하나의 논리, 하나의 책임 체계 안에 묶여 있다. 국민연금도 의결권 결정권한을 기금운용본부로 되돌리고, 그 대신 더 높은 수준의 사전·사후 공시와 이해상충 관리를 통해 투명성과 공정성을 시장의 감시 아래 놓는 방향으로 구조를 바꿔야 한다.

비록 이번 주총에서 현 경영진이 주주들의 지지를 받았지만,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은 현재 진행형이다. 양측의 지분율 차이가 크지 않아 장내 매수 등을 통한 지분 확보 싸움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 오는 9월 개정 상법 시행에 따라 분리선임 감사위원을 추가 선임해야 하는 또 하나의 관문이 남아 있다. 분리선임 감사위원 선임에는 대주주 의결권을 최대 3%로 제한하는 '3% 룰'이 적용되는 만큼, 국민연금이 어떤 스탠스를 취하느냐가 다시 한번 경영권 향방의 커다란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올해 주총은 코스피 6000을 돌파하는 상황에서 밸류업 프로그램과 맞물려 국민연금의 역할이 더욱 주목받았다. 국민연금은 자사주 소각이나 배당 확대 등 주주 환원에 소극적인 기업 이사들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내는 등 과거보다 주주 수익률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의결권 행사 위탁 과정에서의 투명성 문제나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실질적인 압박 수단이 부족하다는 평가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결국 고려아연 주총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명확하다. 자본의 논리가 국가 기간산업의 안보 및 지정학적 리스크와 충돌할 때, 공적 기금인 국민연금은 단순한 산술적 중립을 넘어 '본질적 기업 가치'에 집중해야 한다. 8년 전 도입된 스튜어드십 코드가 유명무실해지지 않으려면, 외부 인사에 의존하는 수책위 중심 구조를 탈피하고, 투자 현장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금운용본부로 의결권을 되돌려주어야 한다. 해외 연기금이 우리의 핵심 기업을 대신 지켜주는 '안보의 외주화'를 방치하는 것은 국민의 노후 자금을 책임진 기관의 명백한 직무유기이기 때문이다.

자본에는 국적이 없어도 연기금의 책임에는 국경이 있다는 사실을, 국민연금은 이제라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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