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 침체로 '단명펀드' 잇따라..펀드 심사강화 베끼기 관행 개선해야
글로벌 금융위기로 펀드시장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출시 1년여 만에 사라지는 이른바 '단명(短命)펀드'들이 잇따르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이 야심차게 내놓은 신규펀드가 시장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소규모펀드로 전락하자 조기청산(해지)을 결정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신규펀드가 출시 1년여 만에 청산되는 것은 흔치않은 일이다. 소규모펀드라도 최소 2~3년은 넘어야 청산이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시장상황과 운용성과 등에 따라선 얼마든지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용사들이 일치감치 신규펀드의 청산을 결정하는 것은 그만큼 펀드시장 침체가 심각하다는 방증인 셈이다. 자본시장법상 1년 이상 설정액이 50억원을 밑도는 소규모펀드는 운용사가 임의로 청산할 수 있다.
◇출시 1년만에 사라지는 펀드들=20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세이에셋자산운용은 지난 16일 'SEI MoM글로벌주식펀드'의 청산을 결정했다. 이 펀드는 세이에셋자산운용이 지난해 10월 19일 국내에 처음으로 출시한 '멀티매니저 펀드'다.
'멀티매니저 펀드'란 투자자산과 투자지역별로 최고의 펀드매니저를 골라 자산을 위탁 운용하는 펀드로 세이에셋자산운용의 최대주주였던 미국 SEI자산운용의 주력 상품이다.
당시 세이에셋자산운용은 기자간담회까지 개최하는 등 야심차게 펀드를 선보였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1년 1개월여 만에 청산을 결정했다. 지난 16일 기준 이 펀드의 설정액은 4억원에 불과하다.
세이에셋자산운용은 오는 12월 27일 펀드를 결산하고 투자자들에게 상환금을 지급한 후 펀드를 청산할 계획이다. 세이에셋자산운용 고위관계자는 "펀드시장 침체로 투자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한계가 있었다"며 "운용 효율성면에서 펀드를 유지하는 것보다 청산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앞서 이달 초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은 '골드만삭스미국주식펀드'와 '골드만삭스글로벌하이일드펀드', '골드만삭스브릭스주식펀드' 등 3개 해외펀드를 한꺼번에 청산키로 했다.
이 펀드들은 지난해 2~3월 출시된 신규펀드이지만 지난 1년여 동안 각각 3억~10억원 가량의 자금을 모집하는데 그쳐 소규모펀드로 전락했다. 업계에서는 골드만삭스자산운용이 최근 한국 철수를 결정한 것도 이처럼 신규펀드들이 부진했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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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운용사 한 상품개발팀장은 "신규펀드가 잇따라 실패하고 운용 및 경영부담이 커지자 한국 철수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며 "국내 기반이 취약한 외국계 운용사들은 대부분 사정이 비슷하다"고 말했다.
지난 5월 선보인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미래에셋인덱스로코리아인버스1.0주식펀드A'는 출시된 지 불과 2달 만에 청산됐다. 펀드 판매가 극히 부진하자 본격적인 운용에 들어가지 전에 펀드를 정리한 것이다.
이밖에 삼성자산운용의 '삼성프리미엄아시아베스트주식펀드', 미래에셋자산운용의 '미래에셋글로벌이머징마켓Top-down주식펀드', 한국투신운용의 '한국투자삼성그룹분배형주식펀드', 현대자산운용의 '현대다이하드커버드콜인덱스펀드' 등도 출시 1년여 만에 청산됐다.
◇펀드 남발에 신규펀드 5개중 4개 자투리='단명펀드'가 잇따르는 것은 펀드시장 침체가 근본 원인이지만 시장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경쟁적으로 신규펀드를 내놓는 운용업계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실제 올 들어 지난 15일까지 출시된 신규펀드는 총 417개(공모 및 운용펀드, 15일 기준)에 달한다. 영업일 기준으로 하면 매일 2개 이상 신규펀드가 출시된 셈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는 신규펀드 수(567개)가 감소했지만 펀드 환매 등 시장상황이 더 악화된 것을 감안할 경우 적지 않은 숫자다.
올 들어 신규펀드 상당수가 소규모펀드로 전락할 위기에 처한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펀드평가사 제로인에 따르면 올 들어 지난 10월 말까지 출시된 신규펀드(공모 기준, 클래스 포함, MMF, ETF, 단위형 제외)는 총 476개로 이중 50억원 이상 팔린 펀드는 98개에 불과하다. 나머지 378개는 판매액이 50억원 미만으로 이중에는 1억원이 채 안 팔린 신규펀드도 137개에 달한다.
신규펀드 5개 중 4개는 사실상 소규모펀드인 셈으로 이대로 설정 1년이 지나면 언제든 청산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 업계관계자는 "시장상황이 안 좋은데도 상품 베끼기 관행은 좀처럼 개선되지 않고 있다"며 "조금 잘 팔리는 펀드면 너도나도 비슷한 상품을 출시해 사실상 대형화가 힘들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최근처럼 펀드시장이 침체된 상황에서는 업계 자발적으로 펀드 베끼기를 자제하는 것은 물론 금융당국도 펀드 인허가 심사를 강화해 신규펀드 수를 조절할 필요가 있다고 충고한다.
한 펀드연구원은 "국내 펀드 수는 세계최고 수준이지만 펀드매니저당 운용펀드 수 등 효율성측면에서는 여전히 낙후돼 있다"며 "소규모펀드를 정리해 펀드 수를 줄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유사상품들이 난립하지 않도록 심사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