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은 알츠하이머 환자가 된 늙은 연쇄 살인범 김병수의 길고 짧은 '메모'로 구성돼 있다. 70세인 그는 45세에 문화센터 사무직원을 살해한 뒤에 교통사고를 당하고서야 비로소 30년 동안 지속했던 살인을 멈춘다. 기억할 수 없게 된 김병수는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나는 이 소설이 "김병수의 휴대전화의 메모장, 혹은 블로그와 페이스북의 글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처럼 보인다. 어떤가. 재기발랄한 작가가 새로운 소설 형식의 실험을 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라고 쓴 적이 있다.
책의 세계는 p-콘텐츠(paper, 종이책)와 e-콘텐츠(전자책)로 분화되고 있다. 인간은 갈수록 e-콘텐츠의 중독자(헤비유저)가 되고 있다. 인간은 e-콘텐츠를 주로 스마트 기기로 읽는다. 따라서 '검색'이라는 '읽기'와 엄지손가락으로 누르는 '쓰기'가 텍스트의 질적 변화를 불러오듯이, 스마트폰이나 스마트패드 등의 재생장치가 가진 다양한 기능이야말로 독자와 콘텐츠 제공자의 새로운 관계성을 만드는 결정적인 열쇠가 되고 있다.
e-콘텐츠는 세 가지 주요 특성이 있다. 인간이 액정화면을 통해 정보를 제대로 소화해내려면 시간적 제약이 따르며(시간성), 글보다 이미지가 앞서는 화주문종(畵主文從)의 글이어야 주목을 끌 수 있고(장소성), 인간의 머리(뇌)를 움직이는 이성적인 글보다 몸과 마음을 움직이는 감성적인 글이어야(신체성) 한다.
p-콘텐츠는 어떠해야 할까? 전자미디어의 등장은 라디오에서 인터넷까지 다양한 변화를 가져왔다. 언제나 그랬듯 새로운 사고의 도구는 새로운 사고양식을 부른다. 따라서 종이책 또한 다르지 않다. 장편소설이 주류를 이루던 소설시장에서도 '짧은 소설'이 점차 주목을 받고 있다. 20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앨리스 먼로가 단편작가인 것이 어떤 전환점인 것을 시사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영미권 소설시장에서도 그동안 서자 취급을 받던 '숏 스토리'가 점차 인기를 얻고 있다.
정이현은 최근작 '말하자면 좋은 사람'(마음산책)의 '작가의 말'에서 "이야기이기도 하고 짧은 소설이기도 하고 콩트이기도 하고 쇼트 스토리이기도 하며, 그 모두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했다. 11편의 '짧은 소설'은 모두 페이스북에 읽은 흔한 고백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았다. 혼자일 수밖에 없고, 혼자여서 고독한 현대인의 절박한 심정을 담아내는 것은 200자 원고지로 20-30매면 충분하다는 것을 이 소설집은 입증하고 있다. 책에 실린 그림과 함께 스마트 기기로 읽으면 감흥이 클 것이다.
박완서의 '노란집'(열림원)에 나오는 '짤막한 소설'과 신경숙의 '짧은 소설'인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문학동네) 등도 최근 인기를 얻었다. 머지않아 '짧은 소설'이 대세가 될지 모르겠다. 어쩌면 '장편(掌篇)소설'도 너무 길어 '손가락소설'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