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제가 기대만큼 활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수출이 뒷걸음질을 치고 산업생산이 둔화되는 한편, 청년실업률은 고공행진을 계속하고 있다. 등락을 거듭하는 투자와 소비의 회복세도 미미하다. 주택 거래가 늘어나는 등 부동산시장은 오랜 침체의 늪에서 깨어나는 추세이긴 하다. 하지만 활기를 띠는 것처럼 보이던 자본시장은 위안화 가치 절하와 미국 기준금리 인상 예고 등으로 인해 변동성과 하방 위험이 확대되고 있다. 이러다간 저성장 기조가 고착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도 차츰 설득력을 더해가고 있다.
우리경제가 이처럼 지지부진한 까닭은 세계경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외의존도가 높은 우리는 세계교역의 위축, 중국경제의 눈에 띠는 감속과 질적 성장으로의 방향 전환, 자원수출국 경기 침체 등의 부정적 영향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저성장 추세를 대외요인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오히려 세계경제는 2012년을 저점으로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에너지자원과 곡물을 비롯한 원자재 가격의 하향 안정세는 자원빈국인 우리에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된다. 그런데도 우리경제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선진국과 인도, 멕시코 등 일부 신흥국의 선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때 글로벌 금융위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극복한 나라로 손꼽혔었지만, 최근엔 다른 주요국들보다 정상적인 성장경로로의 복원력이 뒤처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최근 우리 경제의 저성장 기조가 경기순환과정이나 대내ㆍ외적인 충격보다는 서서히 진행되고 오랫동안 쌓여온 복합적ㆍ구조적인 측면에 주로 기인함을 시사한다. 따라서 기준금리 인하나 추경예산 편성 등 단기적인 확장정책보다는 중ㆍ장기 시계에서 진행되는 흐름에 대응하는 긴 호흡의 구조 개혁과 낡은 체질 개선에 무게 중심을 두는 것이 절실하다.
물론 2007년 하반기 이후 지속되어 온 ‘대침체’(Great Recession) 국면에서 벗어나려면 어느 정도의 확장정책이 불가피한 측면은 있다. 그러나 확장정책은 정말 어려울 때에만 일시적으로, 그리고 목표를 잘 겨냥해서 제 때에 구사해야 한다. 지속적인 확장정책은 구조 조정과 체질 개선을 늦추고 거품을 키운다. 금리를 내리고 세금을 더 걷지 않고 재정지출도 줄이지 않으면서 빚을 늘리는 것은 손쉽지만, 그 부담은 고스란히 후세대가 떠안아야 한다. 미래로부터 차입하는 성장을 무책임하게 마냥 계속할 수는 없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저항이 따르며 성과가 더디게 나타나더라도 근원적인 구조개혁을 꾸준히 추진해야 생산성이 높아지고 기초체력도 튼튼해진다. 생산성 향상은 저출산ㆍ고령화 추세에 따른 생산가능인구 감소와 성장잠재력 하락을 벌충하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구조개혁의 방향은 크게 ① 개방과 경쟁 촉진, ② 정부 입김 축소, ③ 안정ㆍ수직ㆍ폐쇄형 사회경제시스템(종신 고용, 연공서열, 유유상종, 도제식 교육, 수직계열화, 주거래은행제, 화석연료 의존 등)의 유동ㆍ수평ㆍ개방형 시스템 전환 등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세계표준보다 엄격한 과잉ㆍ획일ㆍ불요불급 규제, 서비스업의 높은 문턱과 울타리, 정규직 중심의 경직된 고용과 임금체계, 과도한 정책금융과 허술한 신용분석 및 위험관리 역량,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길 기피하는 ‘피터 팬 증후군’과 정부 지원에 기대 연명하는 ‘좀비형 한계기업’, 시장수요와 동떨어진 고등교육과 직업훈련,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느슨한 지배구조와 유인체계, 연공서열과 단기 순환보직 위주의 공공부문 인사시스템을 수술해야 한다.
나아가 근로와 자활 유인이 약한 복지시스템, 낡은 지방행정구역과 취약한 지방자치제도, 정치권의 ‘표심경쟁’과 대중인기 영합주의 등도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자유롭고 공정한 시장경제가 적은 거래비용으로도 작동할 수 있도록 열악한 사회자본(법치, 신뢰, 투명성, 기부와 봉사)을 확충하고 시민의식을 함양하는 과제도 빼놓을 수 없다. 이들 가운데 이하에서는 핵심 개혁과제만 살피기로 한다.
첫째, 세계표준에 발맞춰 획기적으로 규제를 줄여야 한다. 규제개혁은 돈 안들이고 – 더 정확히 말하면 규제 때문에 파생된 비용을 줄여 - 경제를 살리는 유일한 길이다. 2015년 Heritage재단이 발표한 우리의 ‘경제자유지수’는 100점 만점에 71.5점으로 1위 홍콩과 18점이나 격차가 난다. 이를 80점 정도로는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자유지수’가 높을수록 생활수준과 1인당 소득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정부 규제가 적고 부정부패와 세율이 낮을수록, 근로자 채용과 해고 그리고 외국인 투자가 자유로울수록, 무역장벽이 낮을수록 ‘경제자유지수’는 상승한다. 따라서 서비스업 진입, 수도권 입지, 기업출자ㆍ지배구조, 고용ㆍ노동 등 세계표준과 동떨어진 낡은 규제의 성역을 허물어야 한다. 도전과 모험을 장려할 수 있도록 개인회생제도, 배임 요건, 연대보증제도를 손질해야 한다.
특히 국민경제 비중(일반 집중)이 높은 점에 주목하여, 특정 대기업집단에만 부과하는 출자와 지배구조, 사업구조, 계열사 거래에 관한 규제는 논거가 미약하고 효과는 없으면서 부작용만 초래하고 있다. 불합리한 규제에 정부의 자원이 집중되면서 우월적 지위 남용, 불공정거래 등 시장집중을 교정하는 바람직한 노력은 오히려 미흡한 편이다. 앞으로는 시장집중의 폐해를 바로잡고 공정경쟁을 촉진하는 데에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
흔히 혼동하는 규제와 감독도 구분해야 한다. 규제 수준은 세계표준에 따라 낮추되, 단속과 감독을 철저히 해서 명과 실이 부합하도록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 안전ㆍ환경ㆍ교육 등 사회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꼭 필요한 규제라도 시장과 친화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이를테면 대형 마트의 의무휴업처럼 일률적인 규제는 소비자의 편익을 줄이고 마트 근로자의 일자리를 줄이게 된다. 입법 취지를 구현하려면, 대형 마트에게도 언제든 영업을 허용하되, 특정일 판매액에는 부과금을 매기고 그 수입을 골목상권과 전통시장 지원에 쓴다든지 하는 차선책을 천착해야 할 것이다.
둘째, 서비스산업을 개방하고 생산성을 높여야 한다. 특히 제조업보다 두 배 이상 높은 진입 문턱과 업역 사이에 가로놓인 울타리를 낮추어, 불필요한 지대(Rent)를 줄여야 한다. 보건ㆍ의료ㆍ교육산업은 투자를 개방하고 자격기준을 완화해야 한다. 에너지ㆍ철도ㆍ항공ㆍ금융ㆍ우편공기업은 민간의 참여를 허용하거나 적어도 경쟁체제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금융산업은 주인 찾기와 함께 인력ㆍ점포의 군살을 빼면서, 자산운용 규제를 완화하고 금융투자업을 육성해 활발한 창업을 뒷받침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의료ㆍ금융ㆍ도소매ㆍ사업서비스산업은 디지털기술과 융ㆍ복합을 촉진해 중국 ICT 기업들이 출시한 ‘대안형 금융상품’(예: 알리바바의 위어바오, 余額宝)처럼 새로운 비즈니스모형을 개척해야 한다. 부가가치가 날로 높아지는 소프트웨어산업의 핵심인력과 관광ㆍ전시ㆍ의료산업 등에서 거리낌 없이 활약할 수 있는 영어ㆍ중국어에 능통한 실무인력의 양성도 긴요하다.
셋째, 인적 자원을 확충하고 교육ㆍ연구시스템을 갱신해야 한다. 여성의 경력 단절을 완화하고, 노인기준(65세)을 상향 조정해 가용인력을 극대화해야 한다. 만성적으로 초과수요 상태에 있는 외국인 근로자의 공급을 늘리고 이민을 장려해야 한다. 게르만 우월주의가 팽배한 독일도 이민자비율이 2013년 13.1%에 달했다. 주요국 중 독일에 이어 두 번째로 노동력이 부족한 우리도 이젠 전향적인 이민정책으로 전환할 때가 됐다. 특히 언어와 문화의 동질성을 지닌 재외동포에게 복수국적을 부여하는 등 이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우리 청년들이 OECD 회원국 평균보다 4~5년 뒤늦게 첫 직장을 갖는 입직 연령을 앞당기는 것도 긴요하다. 그러자면 두 가지 정책 변화를 도모해야 한다. 우선 수학기간이 너무 길고 산업현장의 수요와 동떨어진 고등교육의 판을 바꿔야 한다. 미국, 영국 등에서 빠르게 진화하고 있는 ‘대중 개방형 온라인교육’(MOOC)을 도입하해 OECD 평균의 절반에 불과한 평생교육을 강화해야 한다. 그럴 경우 일부 전공의 캠퍼스 학제는 지금보다 1~2년 단축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먼저 취업을 한 후 일에 걸맞은 지식을 꾸준히 습득ㆍ갱신할 수 있어 학습과 일의 괴리도 줄일 수 있다. 이공계와 인문계가 5대5인 전공인력 공급비율도 산업현장 수요에 걸맞게 8대2로 바꿔나가야 한다.
아울러 징병제를 징ㆍ모병 혼합제(전문병사와 일반병사의 이원화)로 전환하여 일반병사는 복무기간을 줄이는 방안도 본격 검토해야 한다. 연령별 인구구조의 추이에 비추어 60만에 달하는 병력을 유지하는 것은 조만간 불가능해 질 것이므로 이에 관한 논의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넷째, ‘최소보장-자기책임’의 규율에 따라 ‘일하는 복지’(Workfare)를 확립하고 고용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복지의 종착역은 자활이므로 ‘복지함정’에서 탈출할 유인과 함께 근로능력이 있는데도 복지수혜자로 계속 머무를 경우 제재를 강화해야 한다. 적어도 근로빈곤층이 일하지 않는 복지수혜자보다는 유리하도록 제도를 다듬어야 한다. 무상급식처럼 선진국보다 관대한 일부 복지제도는 재구조화해야 한다. 그 대신 중학생 1만 5천 명에게 보습기회를 부여하는 삼성그룹의 이른바 ‘Dream Class’처럼 빈곤층의 교육 기회를 늘리고 평생교육ㆍ직업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독일의 2003~2005년 Hartz 개혁과 1990년대 중후반 Nordic 국가들의 사회보장개혁의 사례를 좇아 복지서비스 공급 경로를 민간에도 개방하는 등 다양화하고 수혜자의 선택권과 바우처를 확대해야 한다.
심각한 청년실업을 완화하려면, 고용 유연성을 높이고 연공급 위주의 임금체계를 능력과 성과 위주로 전환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청년실업의 한 원인은 일자리와 눈높이의 미스매치라고 할 수 있다. 대학과 대학원 졸업자는 연간 40만 명 수준이지만, 이들이 선호하는 일자리는 연간 16만 개 정도만 창출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2016년부터 단계적으로 정년이 연장되어 퇴직자는 급감하는데 비해, 대학진학률이 사상 최고에 이른 2008~2011년 입학생들이 졸업하기 때문에 당분간 취업문은 크게 좁아질 수밖에 없다. 세대간 상생은 물론 지속 가능한 성장을 담보하기 위해서도 강도 높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고, 무급휴직을 활성화하며 저성과 근로자의 고용 보호를 완화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나아가 ‘Walk-out 쟁의원칙’을 준수하는 등 세계표준을 존중하는 노사관계를 확립해야 할 것이다.
다섯째, 기후변화 적응과 함께 녹색기술 개발 등 녹색성장의 입지를 선점하는 노력도 절실하다. 특히 탄소배출권 거래제와 저탄소 협력금 등은 미래 위험에 대한 예방주사이자 미래 먹거리 확보의 디딤돌로 여겨야 한다. 자원빈국이면서 지금처럼 높은 화석연료 의존도를 유지할 경우, 세계은행의 권고처럼 갑작스레 ‘갈색빈곤함정’(Brown poverty trap)에 빠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생활온실가스를 줄이고 녹색 일자리를 만드는 노력을 촉발하기 위해 탄소세 등 가격기제의 도입을 전향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끝으로 위태로운 재정 건전성의 악화를 예방하는 조치도 절실하다. 우선 의무지출을 늘릴 때에는 그 재원 조달방안도 함께 확정짓도록 해야 한다. 빚을 내든지, 기존 의무 지출을 줄이든지, 증세를 하든지 선택하도록 해야만 선심정책과 방만한 재정팽창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다. ‘예산폭탄’처럼 저질 선심공약을 경계하고, 핵심 대선공약은 중앙선관위가 소요재원을 검증하는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 특히 복지예산은 ‘비가역성’을 띠므로 신중히 편성해야 한다. 연금제도가 지속 가능하도록 스웨덴처럼 연금재정의 자동안정장치를 도입하고 확정부과방식을 완화하는 것도 시급하다. 아울러 각 부처, 자치단체와 공공기관이 조직이기주의 관점에서 움켜쥐고 있는 유사ㆍ중복사업, 필요성이 낮거나 심지어 하지 말아야 할 일까지 육성ㆍ촉진ㆍ진흥을 명분으로 남발하는 보조ㆍ출연ㆍ감면ㆍ정책금융을 줄여야 한다.
지금까지 기술한 구조개혁은 형극의 길이다. 하지만 저성장이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면, 죽기를 각오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당장의 인기가 아니라 백년대계, 소집단 이기주의가 아니라 국리민복, 대증요법이 아니라 근원적인 처방에 입각해 정부ㆍ국회, 언론ㆍ학계ㆍ시민단체를 조율하면서 정치공학의 유혹을 떨치고 정책논쟁을 이끄는 ‘창도’(advocacy)의 리더십을 갈구한다.–
박 재 완
성균관대 국정관리대학원장
1955년 1월 24일 출생(경상남도 마산)
서울대 경제학 학사
하버드대 대학원 정책학 석·박사
성균관대 사회과학부 행정학전공 부교수
한국행정학회 연구이사
제17대 한나라당 국회의원
한나라당 대표비서실 실장
대통령실 정무수석비서관
대통령실 국정기획수석비서관
제2대 고용노동부 장관
제3대 기획재정부 장관
現 한반도선진화재단 이사장
▶본 기사는 입법국정전문지 더리더(the Leader) 10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