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고영민 시인 '구구'

2002년 문학사상으로 등단한 후, 3권의 시집을 발간한 고영민 시인은 최근에 문학동네로 4번째 시집을 발간하였다. 시인의 말에서 “가질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짧은 소개로 시집을 표현하듯, 이번 시집은 시적 사유와 깊이를 한층 끌어올렸다. 또한, 83편의 시편이 실렸음에도 시인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텍스트를 따라가다 보면 일상적 이미지로 독자의 시선을 흡입력 있게 끌어당긴다. 1부 표제인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편에 실린 '식물', '버찌의 저녁'에서 시인의 현재 시적 지향성을 따라갈 수 있다.
그때 허공을 들어올렸던 흰 꽃들은 얼마나 찬란했던가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이제 흰 꽃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 자리에 검은 버찌가 달려 있을 뿐이다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 버찌는 몸속에 검은 피를 담고 둥근 창문을 걸어잠근 채 잎새 사이에 숨어 있다 어떤 이는 이 나무 아래에서 미루었던 사랑을 고백하고 어떤 이는 날리는 꽃잎을 어깨로 받으며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나무 아래를 천천히 걸었을 터, 누구도 이젠 저 열매의 전생이 눈부신 흰 꽃이었음을 짐작하지 못한다 지났기에 모든 전생은 다 아름다운 건가 하지만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찬란을 뒤로한 채 꽃은 다시 어둠에서 시작해야 한다 흰 꽃은 지금 버찌의 어디까지 와 있는 걸까 그리고 저 버찌의 오늘은 얼마나 검은가 - '버찌의 저녁' 中
시인은 '버찌의 저녁'에서 “꺼지기 전 잠깐 더 밝은 빛을 내고 사라지는 촛불처럼” 밝음과 어둠을 대비시키면서 “흰 꽃”과 “검은 버찌”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시간에 따라 사라지는 것을 “가장 환한 것은 가장 어두운 것의 속셈”으로 통찰력 있게 호소한다.
버찌나무 아래 찬란한 청춘의 표상인 “사랑을 고백”하기도 하고, 희망 없이 살고 있는 “폐지를 묶은 손수레와 함께” 걸어가는 이미지는 또 다른 울림을 준다. 밝음과 어둠은 청년과 노년의 힘겨운 노동으로 치환되어 독자의 시선을 움켜쥔다. 시적 상승단계는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밝음과 어둠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된다.
버찌나무 아래 일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한때 사랑의 이유였던 것이 어느 순간 이별의 이유가 되고 마는 것처럼” 가슴 시린 슬픔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이 시에서 자연에 속한 인간 또한 삶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보여주면서 버찌의 찬란한 꽃과 현실의 어두운 이미지에서 다시 한 번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코에 호스를 꽂은 채 누워 있는 사내는 자신을 반쯤 화분에 묻어 놓았다 자꾸 잔뿌리가 돋는다 노모는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구근처럼 누워 있는 사내는 왜 식물을 선택했을까 코에 연결된 긴 물관으로 음식물이 들어간다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 주세요 사내는 소리쳤으나 노모는 알아듣지 못한다 뉴스를 보니 어떤 씨앗이 700년만에 깨아났다는구나 - '식물' 中
두 번째 조명하는 이 시 또한 '구구' 시집 전면에 내세운 시로써 삶의 고통과 소통의 부재에 대해 말하고 있다. 서술된 시를 보면 알 수 있듯, 상황은 병실에 누워있는 사내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스스로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황에 욕창이라도 걸릴까 봐 노모는 계속 “안타까운 듯 사내의 몸을 굴린다” 식물인간이 된(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사내가 “이 봄이 지나면 저를 그냥 깊이 묻어 주세요”라고 말하지만, 노모와 사내 사이엔 소통의 부재가 존재한다. 이것은 사내의 고통스러운 현실과 노모의 안타까운 현실의 대비일 것이다. “어떤 씨앗이 700년 만에” 깨어난다는 뉴스도 화자에겐 무의미하다. 이러한 소통의 부재는 현실의 젊은이와 기성세대의 소통되지 않은 안타까운 상황을 말하고 있다면 비약일까?
독자들의 PICK!
고영민 시인은 “선명한 심상과 온유한 어조, 유쾌한 상상과 따뜻한 유머로 시적 대상을 순연하게 드러내는 개성적인 시세계”(경북작가회의, 이영환)를 이끌어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세상에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함축적으로 담아낸 두 편의 시를 보면서 시인의 역할과 시적 사유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시인의 전망이 때로는 해학적이고 서정적인 면도 있지만, 시집의 첫 시로 내세운 '식물'에서 말하듯 세상은 좀 더 시인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소통의 날을 기대해본다.
◇구구=고영민 지음. 문학동네 시인선 73. 140쪽/8000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