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생존의 문제다."
지난달 열린 한국화학산업협회 신년회엔 비장한 공기가 감돌았다. 한자리에 모인 국내 주요 석유화학 기업 수장들은 수차례 '위기'를 언급하며 올해 역시 녹록지 않을 것이란데 뜻을 같이했다. 현장에선 "수십 년 업계에 몸담았지만 이런 장기 불황은 처음"이란 토로까지 나왔다.
지난해 석유화학 업계는 유독 혹독한 한 해를 보냈다. 정부 주도의 구조재편이 본격화되며 각 기업이 설비 감축과 인력 구조조정까지 사업에 '메스'를 들이댔기 때문이다. 연말까지 재편안 초안이라도 제출하기 위해 물밑에선 몇개월간 논의가 벌어지기도 했다.
문제는 1호 사업재편안인 충남 대산 산단 이후 좀처럼 '2호' 사례가 나오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1호안엔 롯데케미칼 대산 공장을 물적분할해 HD현대케미칼과 합병하고, 중복 설비를 조정하는 내용이 담겼다. 실제로 전남 여수와 울산 산단 모두 정부에 초안을 제출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모두 뚜렷한 진전은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정부의 대산 산단 최종 금융지원 방안마저 늦춰지고 있다. 업계는 당초 올해 1월 중 승인이 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채권단 실사와 조율 과정이 길어지며 일정이 미뤄지는 모습이다.
일각에선 정부 지원의 규모와 방식이 가늠되지 않는 상황에서 기업들이 사업재편안을 구체화하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인센티브의 윤곽이 보이지 않으니 결단을 내리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연초 들어 분위기가 한층 조용해진 것은 사실"이라며 "재편안 구체화 과정에서 다시금 몸을 사리는 것 같다"고 전했다.
반세기 넘게 이어져 온 산업 체질을 단기간에 바꾸기란 쉽지 않다. 다만 골든타임이 지나면 쇄신의 기회마저 놓칠 수 있다. 기업의 스페셜티 전환 노력과 함께 산업용 전기요금 합리화, 신사업 진출을 가로막는 규제 개혁 등 정부의 신속한 지원이 필요한 이유다.
올해 신년회에서 위기만큼이나 자주 거론된 단어는 '극복'이었다. "끝이 보이는 터널로 생각하고 조금만 버텼으면 한다"는 한 기업 대표의 말에선 절박함이 전해온다. 기업들이 뼈를 깎는 자구 노력을 시작한 만큼 정부의 답변이 필요한 시점이다. 정부와 업계가 진정한 원팀으로 움직일 때 구조재편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