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가리 사과로 자살한 튜링, 서울서 환생하면…

김희정 기자
2015.05.14 05:15

[우리가보는세상]

[편집자주] 뉴스현장에는 희로애락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사로 쓰기에 쉽지 않은 것도 있고,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일도 많습니다. '우리들이 보는 세상(우보세)'은 머니투데이 시니어 기자들이 속보 기사에서 자칫 놓치기 쉬운 '뉴스 속의 뉴스', '뉴스 속의 스토리'를 전하는 코너 입니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튜링 역할을 소화한 베네딕트 컴버배치.

24시간 마다 바뀌는 해독불가의 암호를 풀어 1400만명의 목숨을 구한 천재 수학자 앨런 튜링. '컴퓨터 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며 그 이름을 딴 튜링상이 만들어질 정도로 입지전적 인물이지만 정작 개인적 삶은 처참했다.

그가 살았던 1952년 당시 동성애는 '범죄'로 취급됐다. 결국 동성애 혐의로 영국 경찰에 체포돼 유죄판결을 받았다. 감옥에 가는 대신 화학적 거세를 받아야했던 그는, 2년 뒤 청산가리를 넣은 사과를 먹고 결국 생을 마감한다.

사후 59년만인 2013년 12월 24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크리스 그레일링 법무부 장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튜링의 동성애 죄를 사면했다. 튜링의 삶을 담담히 그려낸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의 스토리다.

피 말리는 암호전쟁을 중심축으로 한 영화에 감성이 입혀진 대목은 여자 주인공 키이라 나이틀리와의 우정보다 죽은 동성 벗에 대한 회상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했다기보다는 한 외톨이가 유독 따뜻했던 한 사람을 그리워한 모습이다.

튜링이 사후 61년만인 2015년 대한민국 서울에서 환생했다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강제로 화학적 거세를 당할 정도로 폭력적 사회는 아니지만, 서울광장에서의 '퀴어문화축제'를 반대하는 거친 목소리를 보면 또 한 번 생채기를 입게 되진 않을지.

정의당, 민주노총, 민변, 여성민우회 등 성소수자 인권을 지지하는 시민사회단체 및 정당 관계자들이 지난 11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오는 16일 열릴 예정인 2015 국제성소수자혐오반대의 날 공동행동을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고 있다. 2015.5.11/뉴스1

서울시청이 주변이 연일 시끄럽다. 시청 앞 시위야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지난해 서울인권헌장 동성애자 차별금지 조항을 둘러싸고 동성애 반대 움직임이 오히려 거세졌다.

시청 앞에는 기독교단체의 현수막과 '동성애 반대' 외침이 수개월째 끊이질 않고 있다. 내달 9일 서울시청광장에서 열릴 '퀴어문화축제'를 앞두고 한국기독교총연합회와 한국교회연합 등 교회연합기관들은 동성애 축제를 저지하기 위해 손을 잡았다.

서울시 '응답소'에는 시청광장에서 열릴 퀴어퍼레이드 허가를 취소해달라는 온라인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청사 앞 시위가 이어지면서 신청사 1층 정문이 수시로 폐쇄되는 등 일반 시민들까지 불편을 겪고 있다.

서울시청 건물은 1층 로비에서 각종 민원을 접수하거나 수시로 테마가 바뀌는 전시를 둘러보고 앉아 쉴 수 있는 시민의 공간이다. 지하 1층 시민청으로 가는 계단입구까지 각종 시위 여파로 수시로 폐쇄되면서 시민의 보행 동선도 수시로 막히고 있다.

'관청' 이미지를 벗고 시민들에게 환원된 시민청의 본래 취지가 시민들의 무리한 시위로 퇴색되고 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더구나 동성애 반대 시위의 칼끝은 시 혹은 정부가 아니라 또 다른 시민인 동성애자들을 향하고 있다.

다른 시민의 축제나 퍼레이드가 보기 싫다는 이유로 이를 막아 달라며 정부에 항의하는 또 다른 시민들. 관(官)에 기대는 게 많아도 너무 많은 게 아닐까.

뉴욕의 최대 퍼레이드인 성 패트릭스데이(St.Patrick's Day)에는 올해부터 동성애자 등 성소수자가 참여한다. 지난 1일(현지 시간) 뉴욕 퀸스에서 열린 사전 퍼레이드에 보라색 셔츠와 녹색 타이 차림으로 동참한 빌 더블라지오 시장의 말을 인용해본다.

"뉴욕에서는 누구라도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모두를 위한 사회란 모든 사람을 포용하고 존중할 뿐 아니라 저마다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사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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