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회사에서 계좌를 개설할 때 지점에 찾아가 직접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도 본인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겠다."
금융당국이 지난달 발표한 '비대면 본인확인 허용'의 핵심 내용이다. 금융실명법상 본인확인의 방법을 그동안 '대면 확인'만 허용해 왔지만 앞으로는 다른 방식으로 해도 법규 위반이 아니라는 얘기다. 각종 기술개발로 본인을 증명할 방법이 많아졌으니 시대 변화를 반영한 당연한 조치다.
금융당국이 금융개혁의 일환으로 추진해 왔고 인터넷전문은행 도입의 전제 조건이기도 했다. 금융권도 '시대착오적 규제'라며 개선을 요구했던 사안이다. 결국 개선됐으니 잘 됐지만 그 과정엔 우리 금융의 현실과 수준이 그대로 숨겨져 있다.
금융당국은 비대면 실명인증의 방식을 금융회사들이 자율로 정하도록 할 방침이었다. 대신 최소 2가지의 절차를 거쳐 안정성을 확보하도록 하는 규정만 둘 계획이었다.
하지만 정부 발표에는 △신분증 사본 제시, △영상통화, △현금카드 등 전달시 확인, △기존계좌 활용 등 4가지 방식이 제시됐다. 금융권이 원했기 때문이다. 정부가 방법까지 정해달라는 것.
금융위는 네 가지 방식 외에 금융회사가 자율적으로 한 가지 방식을 추가해 최종 3가지 절차를 거치게 했다. 하지만 금융회사가 자율로 정할 한 가지 방법도 금융위는 안내했다. 역시 금융권의 요청 때문이었다. 금융위 고위 관계자는 "심지어 영상통화의 해상도는 어느 수준으로 맞춰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달라는 게 은행들의 요구"라고 전했다.
비슷한 사례는 '빅데이터 활성화 방안'에도 등장한다. 개인신용정보를 비식별화하면 빅데이터로 활용할 수 있도록 법적 제약을 모두 해소해 주는 내용이다. 이렇게 되면 금융회사는 막대한 고객정보를 가공해 다양한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 수 있다.
문제는 여기서도 지침이 나온다. 금융회사 자율성을 침해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당초 방침이었지만 금융위는 비식별화의 방법을 제시해 달라는 금융권의 요청에 따라 결국 지침을 만들기로 했다.
규제를 풀어 달라면서 새로운 지침을 달라는 얘기다. 이해는 된다. 자율로 정했다가 나중에 문제 생기면 그 책임을 어떻게 지느냐는 걱정이다. 최근 몇 년간 금융권은 '사고의 시대'였고 '제재의 홍수'를 거쳤다. 돈을 다루다 보니 책임에 민감하고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업종의 특수성도 있다.
하지만 정도가 지나치다. 금융회사들을 돌며 건의사항을 접수하는 금융개혁 현장점검반 관계자는 "가장 많이 받는 요구가 지침을 달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규제 순응성이 커진 것도 규제 탓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이쯤 되면 "수익성 추락과 경쟁력 하락은 규제 때문이야"라고 말하기 쑥쓰러워진다.
규제는 장애물이지만 밖에서 보면 울타리다. 울타리 바깥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하면 금융개혁은 도로아미타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