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검, 외로운 사명
의학(medicine)은 산 자를, 법의학(forensic medicine)은 죽은 자를 구한다. 망자(亡者)가 보내는 억울한 죽음의 신호를 해석하는 이들이 법의학자다. 우리나라 사망자 수는 연간 28만명 선이다. 법의학자들은 이 중 원인불명의 사망을 해부한다. 안타깝게도 부검이 필요한 시체는 늘고 있는 반면 국내 법의학자들은 수년째 40~50명 선에 그치고 있다. 법의학자를 둘러싼 편견과 오해, 처우와 현황을 알아봤다.
의학(medicine)은 산 자를, 법의학(forensic medicine)은 죽은 자를 구한다. 망자(亡者)가 보내는 억울한 죽음의 신호를 해석하는 이들이 법의학자다. 우리나라 사망자 수는 연간 28만명 선이다. 법의학자들은 이 중 원인불명의 사망을 해부한다. 안타깝게도 부검이 필요한 시체는 늘고 있는 반면 국내 법의학자들은 수년째 40~50명 선에 그치고 있다. 법의학자를 둘러싼 편견과 오해, 처우와 현황을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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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 8일 오전 8시 서울 대학로 서울대 의대(연건캠퍼스) 교육관 3층. 파란 수술복과 수술용 일회용 앞치마를 갖춰 입은 유성호 서울대 법의학교실 교수(46)가 2명의 어시스턴트(법의조사관)와 함께 부검실에 들어섰다. 이날 유 교수를 찾아온 검체(시신)는 모두 3구다. 유 교수는 매주 월요일 서울대병원 인근 경찰서들이 의뢰한 사인불명의 사체 3~4구를 부검한다. 일반 의사들이 하루에 일정 횟수 이상 수술을 집도하지 않듯 부검의 역시 피로도와 집중도 등을 고려해 하루 4구 이상 부검하지 않는다. 미세한 증거도 놓치지 않으려 부검은 반드시 자연광이 비치는 오전에 진행한다. 유 교수는 '꼭 사인을 밝혀드리겠다'며 시신에 마음 속으로 말을 건넨 뒤 집도를 시작했다. 첫 번째 사체는 알 수 없는 이유로 급사한 남성이었다. 투명 비닐과 천에 감춰졌던 사체가 모습을 드러내며 차가운 부검대에 올랐다. 피 흘림을 방지하기 위해 유 교수는 조심스럽게, 그렇지만 재빠르게 메스를 움직였다. 고혈압 병력
'CSI 이펙트(effect·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국 드라마 CSI(과학수사대) 시리즈가 인기를 끌며 등장했다. 미제 사건을 부검 등 과학수사로 '뚝딱' 해결할 수 있다는 대중들의 환상을 일컫는다. 법의학자들은 드라마와 현실이 엄연히 다르다고 말한다. 법의학자는 순식간에 사건을 해결하는 마술사가 아니라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과학적 판단을 내릴 뿐이라는 것이다. ◇전국 법의학자는 고작 59명… 하루 평균 3~4구 시체 부검 대한법의학회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따르면 전국 법의학자는 올해 10월 기준 총 59명이다. 국과수 소속 법의관 32명과 대학 소속 법의학자 16명, 개원의 11명이다. 치아로 연령 추정이나 개인식별을 하는 치법의학자도 6명이 있다. 부검은 보통 4명 정도가 팀을 이룬다. 집도 부검의 1명과 시체를 뒤집거나 톱으로 두개골을 여는 등 보조 역할을 맡는 법의조사관 2명, 카메라로 기록하는 사람 1명 등이다. 시체 1구를 부검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평균 1시간 내
죽은 자는 자신의 몸에 남겨진 단서로 메시지를 남긴다. 하지만 망자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해석하고 진실을 밝혀내기까지는 복잡한 절차가 기다리고 있다. 경찰의 현장 검시가 그 시작이다. ◇사망원인 불분명할 때 부검…검시로 부검 신청 결정 사체 부검 여부를 판단하는 가장 첫 번째 절차는 경찰의 검시다. 검시는 변사체나 변사의 의심이 있는 사체를 조사해 범죄 연루 가능성을 판단하는 절차다. 검시는 시신이 발견된 담당 경찰서 소속 형사와 검시 전문요원인 검시조사관(경찰청 소속), 의사 등이 진행한다. 예를 들어 서울시 구로구 빌라에서 변사체가 발견되면 담당 경찰서인 구로경찰서 형사과 당직 형사 2명, 검시조사관 2명, 의사 1명 등이 파견되는 식이다. 부검이 이뤄지는 대상은 변사체다. 변사체는 사망의 원인을 단정할 수 없고 조사해 보지 않으면 원인을 알 수 없는 시신을 의미한다. 이를 판단할 때 검시조사관과 의사의 역할이 크다. 검시조사관은 간호사, 임상병리사 자격증 소지자 등을 대상으로
2001년 2월 전남 나주 드들강 인근에서 17살 여고생이 숨진 채 발견됐다. 피해자에게서 목을 졸려 살해된 흔적이 발견됐다. 하지만 용의자를 찾지 못했다. 10년 넘게 해결하지 못했던 이 사건은 2012년 8월 여고생에게서 발견된 정액과 DNA(유전자정보)가 일치하는 피의자 김모씨(41)를 찾아내면서 실마리를 찾았다. 하지만 검찰은 김씨를 기소하지 못했다. 김씨는 "여고생과 성관계를 한 것은 맞지만 강간이나 살인한 적은 없다"고 주장했다.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을 뻔했지만 법의학자의 분석 이후 완전히 뒤바뀌었다. 원로 법의학자인 이정빈 가천대 법의학과 석좌교수(72)는 피해자가 성관계 직후 살해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이 교수는 피해자 질내에서 생리혈과 정액이 섞이지 않은 상태로 검출된 점을 의아하게 봤다. 정상적으로 성관계를 맺은 직후 여고생이 신체를 움직이는 등 활동을 했을 경우 생리혈과 정액은 빠른 속도로 섞이기 때문이다. 이 교수는 직접 혈액과 정액으로 실험도 해봤
김문영씨(34)는 현재 서울대학교 법의학교실의 유일한 의사자격증 소지 전공생이다. 학위를 따더라도 부검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학생은 김씨 뿐이란 뜻이다. 김씨는 일반 대학에 다니다가 부검의가 되기 위해 의사 자격증을 땄다. 하지만 김씨 같은 사례는 의대생 사이에서 극히 드물다. 현재 전국에서 부검의가 될 수 있는 의사 출신 법의학 전공생은 단 3명(고려대·서울대·전남대 각 1명)뿐이다. 법의학이 의대생들에게 외면받는 이유는 노력에 비해 얻는 성과가 적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부검의가 되려면 4년간 전공의 과정을 마치고 다시 법의학 교수 밑에서 박사과정을 밟아야 한다. 법의학 전공자들의 진로는 크게 두 가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 법의관이 되거나 법의학 교수가 되는 길이다. 교수가 될 수 있는 자리도 많지 않다. 전국 41개 의대 중 법의학 교실이 있는 곳은 10곳, 법의학 교수는 16명에 불과하다. 그마저도 가톨릭대와 건국대는 최근 유일한 법의학 교수가 은퇴하면서 병리학 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