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전환 돌파구, 독일에서 찾다
AI 전환(AX)·녹색 전환(GX)으로 요약되는 산업 전환기이자 '경제안보'로 대표되는 지경학적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시대다. 전통 제조업 강국 독일이 어떻게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생존 전략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5회에 걸쳐 조명한다.
AI 전환(AX)·녹색 전환(GX)으로 요약되는 산업 전환기이자 '경제안보'로 대표되는 지경학적 전환이 이뤄지고 있는 시대다. 전통 제조업 강국 독일이 어떻게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는지 그 생존 전략이 한국에 주는 시사점을 5회에 걸쳐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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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이 지난 3일(현지시간) 공개한 '유럽 기술주권 패키지'는 유럽의 경제안보가 구체적인 정책으로 진화하는 단면을 보여준다. EU 집행위원회는 이 패키지를 구성하는 세부항목으로 △반도체법 2. 0 △클라우드 및 인공지능 개발법(CADA) △EU 오픈소스 전략 △에너지 분야 디지털화 및 인공지능 전략 로드맵을 각각 발표했다. 이 중 반도체법2. 0 제안은 단순한 공장 유치를 넘어 설계·생산·수요까지 반도체 가치사슬을 유럽 안에 구축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EU는 세계 반도체 시장에서 유럽의 점유율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 아래 2023년 반도체법을 발효했다. EU 집행위원회(이하 위원회)는 이 법을 통해 520억 유로 이상의 공공·민간 투자가 약속됐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위원회는 "EU는 전 세계 반도체의 10% 미만을 생산하며, AI(인공지능) 칩을 포함해 5나노미터 미만의 최첨단 칩을 미국과 아시아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고 전제한 뒤 "이러한 구조적 의존은 자동차와 에너지에서 항공우주 및 방위에 이르기까지 EU 핵심 산업에 영향을 미치는 공급 차질과 강압적 압력, 시스템적 충격의 위험을 높인다"며 개정 필요성을 밝혔다.
2017년 독일의 자랑이던 정밀 로봇기업 쿠카(KUKA)가 중국 가전업체 메이디그룹에 인수된 사건은 독일 정책당국의 인식이 바뀌는 분기점이 됐다. 자국의 핵심 기술기업을 외국 자본에 매각하는데 대한 위기의식이 확산되면서다. 이때부터 개방경제에 대한 낙관론이 저물고 경제안보 논리가 부상하는 방향으로 변화가 시작됐다. ━외국 자본 투자 심사 늘린 독일━이는 외국 자본을 걸러내는 제도가 강화된데서 우선 확인된다. 독일 연방경제에너지부가 지난 1월 발표한 '독일의 투자심사: 수치와 사실'에 따르면 대외무역법(AWV)에 따른 독일 내 심사 건수는 2019년 106건에서 지난해 339건으로 늘었다. 이 심사는 외국 자본이 독일 기업의 의결권을 일정 비율 이상 인수하거나 독일 기업의 핵심 사업부 등을 인수하는 경우 대상이 된다. 실제 인수에 제동이 걸린 사례는 많지 않으나 제도적 관문을 깐깐하게 한 것만은 명확하다. 결국 팬데믹(감염병의 전세계적 유행)발 공급망 위기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거치며 이런 흐름은 새로운 정책 기조로 진화됐다.
최근 다녀온 전세계 전력·차량용 반도체 1위 기업 인피니온 테크놀로지스의 독일 작센주 드레스덴 사업장. 약 30만㎡(약 9만 평) 규모의 거대한 단지 안 '마인홀트슈트라세 2번지' 주소가 적힌 사무동에 들어서자, 임직원들의 발길이 빈번하게 오가는 내부 전광판에 한 문구가 반복해서 흘러나왔다. '탈탄소화와 디지털화를 함께 주도한다(Driving decarbonization and digitalization. Together. )' 일상 공간에서부터 전사적으로 강조되는 이 메시지는 탈탄소화가 단순한 선언적 구호가 아닌 인피니온의 경영 전략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에너지를 대량 소비하는 반도체 제조업이 전면에 탈탄소화를 핵심 목표로 내세운 것이다. 유럽 최대 반도체 클러스터(복합단지) 실리콘 작센의 중심에서 실현되고 있는 제조업 녹색전환(GX)의 단면이다. ━"기업, 지속가능한 에너지 투자해야 회복탄력성 지켜"━지난달 21일 인피니온 드레스덴 사무동에서 만난 팔코 횐스도르프 인피니온 드레스덴 기술 부문 부사장은 "인피니온이 추구하는 두 가지 주요 기업 비전은 탈탄소화와 디지털화"라고 재확인했다.
독일 정부는 데이터센터 산업의 핵심 경쟁력으로 높은 재생에너지 비중을 꼽고 있다. 막대한 전력을 쓰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산업을 키우고 있는 가운데 재생에너지 접근성을 강점으로 내세운 것이다. 이에 에너지전환을 선순위 목표로 두고 그 위에 데이터센터 전략을 결합해 정책 정합성을 높이는데 주력하고 있다. ━"100% 재생전력이 목표"━지난 3월 독일 내각을 통과한 디지털·국가현대화부(BMDS)의 '데이터센터 전략' 보고서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오는 2030년까지 데이터센터 용량을 최소 2배로 늘리고, 고성능컴퓨팅(HPC)과 AI를 위한 컴퓨팅 용량도 4배로 확대할 계획이다. 독일은 이미 용량·수 기준 유럽 최대 데이터센터 시장 중 한 곳이다. 100킬로와트(kW) 초과 데이터센터가 약 2000개, 5메가와트(MW) 초과 대형 데이터센터가 약 100개가 있다. 독일의 IT 접속용량은 2980MW이며 이 중 약 500MW가 AI용이다. BMDS 보고서는 데이터센터 전략의 3대 정책 목표를 △에너지와 지속가능성 △입지·부지 △기술과 주권으로 제시하며 "'에너지와 지속가능성'을 신뢰할 수 있고, 감당가능한 가격이며, 환경친화적 방식으로 에너지를 데이터센터에 공급하는 것"으로 설명했다.
베를린 남동부의 '아들러스호프(Adlershof) 사이언스 파크'. 1909년 독일 최초의 동력 비행장이 문을 열며 항공 실험의 무대가 됐던 이곳은 독일 통일 후 또 한 번 방향을 틀었다. 지금은 4. 6㎢ 부지에 대학· 연구소·기업·스타트업들이 함께 자리 잡은 과학기술 단지로 성장했다. 산업 연구단지·대학 캠퍼스·기술기업 집적지·공공 창업 지원 기능이 한 공간에 맞물려 돌아가는 복합 생태계다. ━기업·연구기관·대학 모인 대형 클러스터━ 아들러스호프의 가장 큰 특징은 '연구'와 '창업'이 물리적으로 가깝다는 점이다. 이곳에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교수로 재직했던 기초과학 명문 훔볼트대의 자연과학 캠퍼스와 비대학 연구기관·기술기업·스타트업 지원시설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 1300개가 넘는 기업과 18개 연구기관, 대학의 학생을 포함해 약 3만5000명이 일하거나 공부한다. 물리적 긴밀함은 협업의 속도와 밀도를 배가시킨다. 대학에서 배출된 석·박사 인력이 바로 옆 연구소와 기업으로 이동하고, 기업은 연구기관과 공동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베를린 중심지 알렉산더 광장에서 차로 약 15분, 운하를 따라 늘어선 한적한 로뮐렌 거리에 육중한 붉은 벽돌 건물이 나타났다. 과거 아그파 필름을 생산하던 공장이었던 이 부지는 현재 독일 스타트업 생태계 거점 CIC(Cambridge Innovation Center) 베를린으로 탈바꿈했다. 지난달 24일 방문한 이 건물 1층 로비에 들어서자 영화 '백투더퓨처'의 타임머신으로 알려진 드로리안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차량은 단순한 전시물이 아니라 입주 기업들이 개발한 소프트웨어를 실제 차량과 연동해 보여주는 시연 장치로 활용된다. 블록체인 기반 전기차 결제 솔루션 기업 등이 이 차를 활용했다. ━스타트업·인큐베이터·대학 '한 공간'에━CIC 베를린은 미국·유럽·일본에 거점을 둔 공간 운영사 CIC의 베를린 캠퍼스다. 5개 층에 걸친 약 1만3000㎡ 규모의 이 공간은 최근 92%입주율을 기록 중이다. 단순히 공간만 빌려주는 공유 오피스가 아니라는 점이 높은 입주율의 배경이다. 이곳에는 베를린 경제법대의 창업지원센터인 '스타트업 인큐베이터 베를린(SIB)'을 비롯해 엑셀러레이터, 교육기관, 기업들이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독일 하노버 산업 박람회(하노버메세)에서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코트라)가 운영한 한국관에는 전 세계 제조업의 인공지능(AI) 전환(AX)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려는 국내 중소기업들의 도전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한국 제조업 특유의 정밀함과 독자 기술로 글로벌 공급망 변화 속의 틈새시장을 노리고 있었다. ━글로벌 기업들이 신뢰하는 '맞춤형' 로봇 근육━제조업용 로봇의 '근육' 격인 정밀 구동부품을 제조하는 회사 오병은 대형 로봇 제조사가 대응하기 힘든 시장을 공략한다. '규격화된 표준품'이 아닌 '고객 맞춤형(커스터마이징)' 부품 제작으로 틈새 시장을 파고 들었다. 지난달 23일 하노버메세 한국관에서 만난 장경희 오병 부사장은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대기업들은 대량 생산된 표준제품을 저렴하게 판매하지만 우리는 고객사가 현장에서 더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미세한 요구 조건까지 반영해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오병은 국내에서 이미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완성차 업체들 공정의 정밀 작업을 돕는 로봇 부품을 공급하고 있다.
지난달 20일부터 닷새간 열린 세계 최대 규모 독일 하노버 산업 박람회(하노버 메세)를 지배한 핵심 키워드는 '산업용 인공지능(AI)'이었다. 지난달 23일 현장에서 만난 후베르투스 폰 몬샤우 도이체메세 무역박람회 및 제품관리 총괄이사는 "이제 AI는 산업이 됐다"며 "이는 완전히 다른 국면"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과거의 AI가 마케팅용 수식어(buzz)에 가까웠다면 이제는 산업 전반에 걸쳐 실질적인 변화를 일어키고 있다"며 AI가 "엄청난 잠재력과 함께 산업 현장 곳곳에 실질적인 전환(shift)을 일으키고 있다"고 했다. 그는 이러한 산업용 AI의 진화가 크게 '엔터프라이즈 AI'와 '피지컬 AI'라는 두 축으로 나뉘어 일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첫번째는 엔터프라이즈 AI다. 기업의 방대한 데이터를 분석하고 최적의 판단을 내리는 '두뇌' 격이다. 엔터프라이즈 AI는 AI가 공장 현장이나 사무실에서 비행기의 부조종사(코파일럿)처럼 인간의 곁에서 업무를 실시간으로 보조하거나, 인공지능 비서(에이전틱 AI)가 되어 복잡한 공정을 스스로 판단하고 조율하는 기술로 구현된다.
세계 최대 산업 박람회 중 하나인 독일 하노버 산업박람회(Hannover Messe·하노버 메세). 지난달 23일 박람회가 진행 중인 하노버 전시장(Fairgrounds Hannover)에 들어서자 전 세계에서 몰려든 인파가 전시장 곳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수많은 부스 중에서도 유독 사람들의 발길이 오래 머문 곳은 인공지능(AI)이 두뇌 역할을 하는 공정과 로봇 전시 구역이었다. AI가 소프트웨어 화면 안에 머물지 않고 공장과 로봇, 공급망이라는 물리적 세계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이 전시장 곳곳에서 확인됐다. ━'내 발'에 맞는 러닝화를 '대량생산'으로━AI가 실제 제조 현장에 어떻게 스며들었는지 확인하려는 열기로 가득했던 곳 중 하나가 독일 대표 기업 지멘스 부스였다. 지멘스 부스 한가운데에는 관람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푸른색 러닝화 한 켤레가 놓여 있었다. 그 옆에서는 투명하고 촘촘한 격자구조의 러닝화 중창(midsole)이 3D 프린터 안에서 천천히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이 공정은 그동안 공존하기 힘들다고 믿었던 '개인 맞춤형'과 '대량 생산'이 한 공간에서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독일 작센주의 TSMC 투자 유치는 유럽연합(EU) 차원의 거대한 산업정책이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 준다. EU는 지난 2023년 글로벌 공급망 위기에 대응하고 아시아·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EU 반도체법(EU Chips Act)'을 발효했다. 이 법의 핵심 목표는 현재 10% 수준인 유럽의 글로벌 반도체 생산 비중을 2030년까지 20%로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를 위해 EU는 공공· 민간 투자를 포함해 약 430억 유로(약 74조 원) 규모의 지원·투자 패키지를 추진한다. ━전략자산 된 반도체…유럽도 공급망 구축 속도━ 최근에는 'EU 반도체법 2. 0'에 대한 논의도 본격됐다. 기존 법안이 대규모 반도체 생산시설 유치와 긴급 공급망 대응에 초점을 맞췄다면, 2. 0은 양자 컴퓨팅용 차세대 칩과 AI 반도체 설계 등 기술 고도화에 방점을 찍는다. 보조금 경쟁에 따른 국가 간 불균형을 해소하고 유럽 전체를 유기적인 생태계로 묶는 '범유럽적 협력' 강화도 핵심이다. EU 반도체법 발효는 팬데믹이 촉발한 공급망 혼란이 방아쇠가 됐지만, 그 이면에 기술 패권이 국가 안보로 연결되는 지정학적 변화가 있다.
독일 작센주의 TSMC 유치는 독일 특유 연방제가 구축한 '분업체계'의 결실로도 볼 수 있다. 연방정부가 입지 선정을 지원하고 주(州)정부는 실무를 도맡는 체계다. ━연방은 입지 선정, 지방 정부는 기업 맞춤형 지원━외국 기업이 독일에 투자를 결심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곳은 연방정부 산하 독일 무역투자진흥청(GTAI)이다. GTAI의 저력은 독일 16개 연방주와 기업을 잇는 안내자 역할을 하는 데 있다. 기업의 요구사항을 분석해 후보지를 골라내는 과정을 GTAI가 맡는다. GTAI를 통해 입지가 특정 주로 좁혀지는 순간, 본격적인 실무는 주정부 차원에서 진행된다. 이들은 지역의 산업 지형을 꿰뚫고 있는 전문가로서, 특정 지자체만이 제공할 수 있는 맞춤형 인센티브·인프라 지원·인적 자원 수급 방안 등 정책 패키지를 제공한다. 이러한 분업 시스템은 초기 의사결정 단계에서 다소 복잡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일단 방향이 정해지면 각 주의 전문성이 결합하며 타국이 갖지 못한 '디테일' 발휘로 이어진다.
독일 남동부 작센주 주도(州都) 드레스덴 인근 아우토반 13호선(A13)을 달리다 드레스덴 공항 인근에 이르자 지평선을 메운 거대한 기중기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곳은 대만 반도체 기업 TSMC가 인피니온·보쉬·NXP 등 유럽 반도체 기업들과 합작한 ESMC의 반도체 팹(fab·반도체 생산 공장) 건설 현장이다. ESMC는 이 곳에 100억 유로(약 17조 원)를 투입해 월 4만 장의 300mm(12인치) 웨이퍼 생산 능력을 갖춘 팹을 구축한다. 올해 공사를 마무리하고 내년 양산하는 게 목표다. TSMC가 첫 유럽 진출지로 이 곳을 낙점한 데엔 유럽연합(EU) 반도체법에 따른 보조금이 마중물 역할을 했으나 그게 전부는 아니다. 수많은 EU 내 입지 중 왜 독일이었고, 독일 중에서도 16개 주 중 하나인 작센이었는지를 살피는 과정은 한국에 시사점을 준다. ━ TSMC의 첫 유럽 공장…유치 핵심 '산업 클러스터'━지난달 21일 작센주 총리 집무청사에서 만난 토마스 호른 작센주 경제개발공사(WFS) 대표는 TSMC 유치의 핵심 요인을 묻자 "이미 형성된 클러스터"를 첫손에 꼽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