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효상 칼럼] 왜 상장기업들은 이사 수를 줄일까

[유효상 칼럼] 왜 상장기업들은 이사 수를 줄일까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 원장
2026.10.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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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유효상 유니콘경영경제연구원장

기업 지배구조를 둘러싼 새로운 힘겨루기가 본격화됐다. 지난 9월 10일부터 자산총액 2조 원 이상의 상장회사는 정관으로 집중투표제를 배제할 수 없게 되면서다. 대주주가 사실상 독점해 온 이사회에 소수주주가 추천한 이사가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에 앞서 올해 3월 정기주총에서 일부 대기업이 이사 정원을 줄이고 임기를 분산하는 정관 변경에 나서, 제도의 효과를 약화시키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집중투표제는 주주총회에서 여러 명의 이사를 선임할 때 각 주주가 선임할 이사의 수만큼 의결권을 갖고, 이를 자신이 원하는 특정 후보에게 몰아서 투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다. 가령 대주주가 60%, 소수주주가 40%의 지분을 가진 회사에서 이사 3명을 선임할 때, 일반적인 투표 방식에서는 후보별로 주당 1표가 부여되므로 과반 지분을 쥔 대주주 추천 후보 3명이 모두 선임된다. 반면 집중투표제에서는 발행주식 총수를 100주로 가정하면, 대주주에게 180표(60주×3), 소수주주에게 120표(40주×3)가 주어진다. 따라서 소수주주가 120표를 한 후보에게 몰아주면, 대주주가 180표를 아무리 정교하게 나눠 투표하더라도 소수주주가 추천한 이사 1명은 선임이 보장된다. 소수주주도 경영진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는 전문가를 이사회에 진입시키도록 하는 것이 집중투표제의 도입 취지다.

이 제도가 중요한 이유는 이사회가 기업의 투자와 사업 방향, 경영진 선임과 감독 등 핵심 의사결정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주총에서 일회성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과 달리 이사는 경영 의사결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한다. 대기업 이사회가 총수 일가와 경영진의 결정을 추인하는 거수기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집중투표제는 지배주주 중심의 의사결정 구조를 바꿀 수 있는 장치다.

1998년 도입된 집중투표제는 그동안 실효성이 크지 않았다. 실제로 이 제도를 채택한 상장사는 전체의 4.4%,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기업도 9.5%에 그쳤다. 의무사항이 아니어서 기업이 정관에 배제 조항만 두면 무용지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9월 10일 시행된 개정 상법에 따라 자산총액 2조 원 이상 상장회사는 집중투표제를 정관으로 배제할 수 없게 됐다. 다만 지분 1% 이상을 가진 주주의 직접 청구가 있어야만 제도가 작동하다 보니, 기업들은 집중투표제의 실질적 영향력을 줄일 방안을 다각도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핵심은 이사의 정원과 임기다. 한 번의 주총에서 선임하는 이사가 많을수록 소수주주가 표를 집중해 추천 후보를 이사회에 진입시킬 가능성이 커진다. 숫자로 보면 더욱 명확하다. 단순화하면 소수주주가 이사 1명을 선임하기 위해서는 한 번에 선임하는 이사 수(n)에 따라 1/(n+1)이 넘는 지분이 필요하다. 3명을 뽑을 때는 25%, 4명이면 20%, 9명이면 10%를 넘어야 한다. 반대로 이사 수를 줄이거나 임기 만료 시점을 분산하면 한 번에 선임되는 이사 수가 줄어, 소수주주에게 요구되는 지분율이 올라가고 집중투표제의 효과가 약해진다.

올해 3월 정기주총 결과, 50대 그룹 상장사 269개사의 이사 수는 전년보다 47명 줄었다. 그룹별로는 카카오가 14명으로 감소 폭이 가장 컸고, 롯데 13명, 삼성 9명, LS 7명이 뒤를 이었다. 다만 이러한 감소분만으로 집중투표제 대응 행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더 직접적인 증거는 정관 변경이다. 이사 수 상한을 조정하는 안건을 올린 기업이 15곳, 이사 임기 규정 변경안을 상정한 기업이 14곳이었다.

한화는 7개 계열사가 이사 임기 규정을 변경했으며, 삼성전자는 이사 임기를 '3년'에서 '3년 이내'로 바꿨다. 임기가 3년으로 못 박혀 있으면 같은 해에 뽑힌 이사들이 같은 해에 임기를 마치지만, 3년 이내로 바꾸면 이사마다 1~3년으로 다르게 임기 만료 시점을 조정할 수 있다. 회사는 법령 정비 차원이라고 설명했지만, 시장에서는 '시차임기제(Staggered Board)'를 염두에 둔 조치라는 해석이 나온다. 해당 안건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안대로 통과됐다. 시차임기제는 이런 방식으로 이사들의 교체 시기를 분산시켜 집중투표제의 영향을 무력화하는 전략이다. 물론 경영의 연속성과 이사회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이사 수와 임기를 조정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집중투표제 의무화 시점과 맞물려 이런 변화가 나타났다는 점이다.

해외에서도 시차임기제는 논란의 대상이다. 미국에서는 적대적 인수를 막는 방어 수단으로 쓰이면서 정당성 논란이 이어져 왔고, 영국은 상장사 이사 전원을 매년 재선임하도록 권고하며 이사회에 대한 주주의 견제를 강화해 왔다. 중요한 것은 제도의 명칭이 아니라 이사회가 지배주주로부터 얼마나 독립적으로 작동하느냐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제도 시행을 앞두고 법률 자문을 통해 이사 정원 상한 설정이나 임기 분산 등 우회 방안을 찾는 데 몰두하는 모습이 먼저 나타난 것이다. 기업이 법이 허용한 테두리 내에서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행동은 자연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법적 허점을 이용해 제도 도입의 본래 취지인 이사회 견제 기능을 사실상 무력화하려 한다면 시장과 주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집중투표제가 실제 경영권 분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고려아연 사례가 잘 보여준다. 적대적 M&A로 경영권 분쟁이 한창이던 작년 1월, 고려아연은 유미개발의 주주제안을 받아들여 임시주총에서 소수주주 보호 및 이사회 독립성 강화를 목적으로 집중투표제 도입을 추진했다. 경영권 분쟁을 계기로 특정 주주가 이사회를 사실상 장악하는 구조를 미연에 방지하고, 전체 주주의 의사가 이사회에 반영되도록 하겠다는 논리였다. 영풍·MBK 측이 집중투표 방식의 이사 선임을 막아달라는 가처분을 신청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해당 주총에서는 집중투표 방식으로 이사를 선임하지 못했다. 다만 경영권 확보를 시도하던 세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도 도입을 위한 정관 변경안은 통과됐다. 같은 제도가 견제의 장치이자 방어의 도구로 동시에 쓰일 수 있다는 점을 이 사례가 시사한다.

이후 올해 3월 정기주총에서는 외국인 주주가 일부 후보에게만 행사하고 남긴 표를 어떻게 처리할지를 놓고 양측이 다시 충돌했다. 이는 제도 도입 못지않게 적용 절차의 공정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드러낸다. 법 시행 전부터 집중투표제를 도입한 고려아연은 지난 9월 9일 임시주총에서 집중투표를 가장 선명하게 작동시켰다. 중도 사임한 독립이사 4명을 집중투표로 새로 뽑았는데, 양측은 후보를 2명씩만 냈다. 표 분산을 최소화해 2석씩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의도로 해석된다. 결국 양측에 2석씩 돌아갔다. 집중투표제가 지분 구조에 따른 전략적 수단으로 진화했음을 증명한 것이다. 이처럼 집중투표제가 경영권 분쟁의 전략적 수단으로 변질될 수 있는 현실은, 이 제도의 본래 취지인 전체 주주 가치 제고와 이사회 독립성 확보라는 목적을 살리기 위한 세심한 운용과 제도적 보완이 왜 필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본질적으로 집중투표제는 경영권을 위협하는 제도가 아니다. 지배주주의 이사회 독점을 깨고 전체 주주의 목소리를 반영해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한 장치다. 물론 행동주의 펀드의 단기 이익 추구나 내부 갈등에 따른 경영 효율성 저하도 우려되지만, 이러한 문제점들이 지배주주의 독점을 정당화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이제 기업이 고민해야 할 것은 제도를 우회할 '법률적 꼼수'가 아니라, 자사 후보의 당위성을 주주에게 '설득하는 능력'이다. 소수주주와 기관투자자 역시 단순히 대주주에 반대하는 후보가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인 성장에 기여할 전문성을 갖춘 인물을 추천해야 한다. 집중투표제로 선임된 이사 또한 특정 주주의 대리인이 아닌 회사와 전체 주주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한다.

집중투표제의 성패는 소수주주 추천 이사의 선임 여부가 아니라 이사회의 진정한 독립적 운영과 경영진에 대한 건전한 견제에 달려 있다. 권력투쟁의 끝에서 물어야 할 것은 누가 이겼느냐가 아니라, 이사회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느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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