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간 인증'.(경향신문 2026년 10월15일자)
사람이 사람임을, 사람이 온전한 자신의 힘으로 문학 창작물을 완성했음을 인증받아야 하는 시대. 기계, 정확히는 AI(인공지능)에 의존하지 않은 채 작가가 오로지 자신만이 지닌 정체성과 능력으로 작품을 창작했음을 공인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영국작가협회(SoA)는 최근 작가가 작품 속 본문을 AI로 작성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증받는 '휴먼 오서드(Human Authored)' 마크 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다고 경향신문은 보도했다. 국내 출판계에서도 이와 관련한 논의가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상황은 AI를 활용한 창작 활동에 대한 현실적인 경계심이 그만큼 커지고 있음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과연 인간은 AI가 장악해 갈지도 모를 가까운(가까울 것이라고 추정되는) 미래의 시대에 자신만의 정체성과 능력으로 세상의 숱한 문제에 대응해가며 살아갈 수 있을까.
지난 10월 21일 개봉한 영화 '실낙원'은 그럴 수 없을지 모른다고 말한다. 인간은 AI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인간으로서 지닌 본래의 정체성을 온전히 지켜낼 수 없을 거라는 '어두운' 미래의 한 단면을 영화는 경고하고 있다.

'실낙원'은 캠핑을 떠났다 실종된 10살 아들을 '낙원의 아이들'이라는 AI 프로그램을 통해 새롭게 만나게 된 엄마가 9년의 시간이 흐른 뒤, 실제 아들이 살아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낙원의 아이들' 속 아들은 현실의 과거 속에서 그랬듯 맑고 밝고 착한 아이. 비록 현실에선 실체의 인간으로서 만날 수 없지만, 엄마는 AI 프로그램이 재현하는 가상의 현실에 나타난 아이로부터 아픔을 위안받으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제 19살이 되어 돌아온 아들은 AI 프로그램 속에서 만나는 아이와는 전혀 딴판의 모습으로 엄마를 혼돈에 빠뜨린다. 살아 돌아온 아들이 숨겨놓은 비밀의 허물이 하나씩 벗겨질수록 엄마는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갈 뿐이다.
AI 프로그램이 살려 놓은 가상의 세계 속 아들, 살아 돌아온 현실의 아들. 영화는 엄마가 겪는 혼돈의 절망과 혼란의 공포를 통해 AI에 온통 의존해 갈 수도 있을 미래의 세상에 인간의 정체성은 과연 어디서 찾을 수 있을지 묻는다.
이를 좀 더 확장해 인간의 정체성이란 인간적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인간의 끊임없는 노력이라 규정한다면 어떨까. AI가 재현하는 인간과 그들의 세상이란, 결국 실제 현실을 살아가는 인간과 그들의 세상을 모방하거나 말 그대로 ‘재현’하는 것에 불과하리라 믿기 때문이다.
AI 기술의 상징적 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일론 머스크가 최근 선보인 AI 영화 '오디세이'는 이 같은 믿음을 더욱 굳게 한다. 그는 올해 최대의 화제작인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영화 '오디세이'를 비판하며 AI로 제작한 7분짜리 '오디세이'를 내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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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별점 5개 만점에 1개만을 준 영국 일간지 가디언을 비롯해 외신들은 혹평했다. 어설프고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숱한 AI 영상들처럼 그 역시 조악함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이다. 더욱이 이타카의 왕 오디세우스가 전쟁을 피하려 미친 척하지만 결국 참전하게 된다는 일론 머스크 영상 속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도 부합하지 않는 오류라는 혹독한 비판을 받고 있다.
한 편의 이야기를 통해 특정한 가치와 메시지를 세상과 공유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례라면 어긋난 시각일까.
최근 중국에서 개봉한 SF 애니메이션 영화 '삼성퇴: 미래왕사'는 그런 점에서 또 다른 눈길을 끈다. 영화는 중국 쓰촨성의 고대 문명 삼성퇴를 배경으로 미래의 인류가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상황을 그렸다. 인류는 결국 3000여년 전 고대의 문명에 기대 위기에서 탈출하려 한다.
영화 속 인간의 세상이 맞닥뜨린 위기는 AI 때문이다. 아니, 인간이 AI에 지나치게 의존한 끝에 위기가 찾아왔다는 설정이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인 제작진이 이 같은 이야기를 바로 AI를 통해 펼쳐놓았다는 것이다. '삼성퇴: 미래왕사'는 AI 영화로, 중국 당국의 허가를 받아 처음으로 극장에서 선보인 장편영화이다.
AI에 장악당한 인간과 그들의 세상이 맞닥뜨리는 어두운 미래의 이야기를 AI로 그려낸 영화는 그러나 20억여원의 제작비 가운데 10%도 회수하지 못한 채 관객에게 외면받았다. SF 장르의 애니메이션 영화라는 점에서 거대 규모의 제작비가 필수적이었지만, 인간은 강력한 '가성비'를 자랑하는 AI 영상으로 이야기를 구현했다. 그리고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의 세상으로부터 공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에 맞닥뜨렸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대치 아니, 그 이상을 구현해 펼쳐 보일 수 있을 만한 최첨단의 AI 기술력도 어차피 인간이 지시하고 제시하는 프롬프트에 기대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다. 그리고 그 프롬프트에 담기는 것 역시 인간이 지닌 자신만의 정체성과 가치일 것이다.

영화 '서울의 봄'의 김성수 감독은 AI 단편영화 '웜 트레인'을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에서 설정의 실마리를 찾은 김 감독은 상상 속 세상을 구현하는 데 단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은 아주 쉽게 이미지를 만들지만, 어떤 이미지를 만들고 어떤 장면과 장면이 부딪치게 할지는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 기술은 상상하는 모든 걸 다 보여주겠지만, 그 영상에 가치를 담는 건 사람이다."
결국, 다시 문제는 사람이고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