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돈이 잠든 사이
유동성의 시대다. 돈이 풀리자, 돈은 가치를 잃었다. 시중에 풀린 돈은 자산 시장으로 향했다. '에브리씽 랠리'(Everything Rally)는 달라진 자산 시장의 흐름을 보여준다. 자산 가치가 올라가자 돈의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랠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실제로 가난해졌다. 그 현상을 짚어본다.
유동성의 시대다. 돈이 풀리자, 돈은 가치를 잃었다. 시중에 풀린 돈은 자산 시장으로 향했다. '에브리씽 랠리'(Everything Rally)는 달라진 자산 시장의 흐름을 보여준다. 자산 가치가 올라가자 돈의 가치는 더욱 떨어졌다. 랠리에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은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실제로 가난해졌다. 그 현상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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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각국 중앙은행은 경기부양을 위해 완화적 통화정책을 경쟁적으로 펼쳤다. 코로나19 팬데믹 등 위기 때마다 유동성은 풀렸고, 넘치는 돈은 소비보다 자산시장으로 흘러갔다. 주식, 부동산 등 투자자산들이 동시에 오르는 '에브리씽 랠리(Everything Rally)'는 그 상징이다. 돈이 넘칠수록 자산가격은 더 뛰었고 돈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한국은 경제 규모와 비교해 유동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광의통화(M2) 비율은 2008년 3분기 처음 100%를 넘어선 뒤 꾸준히 상승해 2021년 2분기 150%를 상회했으며 지난해 3분기에는 153. 8%를 기록했다. M2는 현금과 요구불예금, 수시입출식 저축성 예금 외에도 머니마켓펀드(MMF),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등 곧바로 현금화할 수 있는 단기 금융상품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통화 지표다. 한국의 M2는 최근 10년 동안 2232조원(2015년 10월 평잔)에서 4498조원(2025년 11월 평잔) 수준으로 2배 가량 늘었다.
#. 외환위기(IMF)를 겪던 1998년 말 GOD는 자식 사랑에 '자장면이 싫다'고 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했지만 그래도 2000년대 초반 '1만원'이면 4인 가족이 중국집 외식이 가능했다. 자장면 한 그릇 가격이 2000~2500원이었다. 탕수육 소(小)자는 5000원이면 먹을 수 있었다.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은 복학생들이 새내기 후배들을 거느리고 선배놀이 하기에도 부담없던 시절이었다. 간혹 "전 간짜장이요"라고 외친 신입생은 '눈치없는 놈'으로 낙인 찍히긴 했지만 낭만이 살아있던 시대였다. 개화기 인천 개항과 함께 화교에 의해 들어온 자장면은 경제개발 시기를 거치면서 대표적 서민음식으로 자리잡았다. 가격은 1970년대 200원대를 유지하다 1988년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1000원대로 올라섰고 IMF를 거치면서 3000원대로 뛰었다. 1만원 자장면이 일반화된 지금의 Z세대·알파 세대는 인터넷이나 SNS(사회관계망서비스)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야기다. 지폐에 적힌 숫자는 같지만 물가가 오르면서 돈이 가진 실질적인 힘은 서서히 약해진 것이다.
"젊었을 땐 예적금으로도 돈을 불릴 수 있었는데 이젠 '투자'가 기본이 된 시대잖아요. 근데 주식은 어떻게 하는지도 모르고, 가르쳐주는 사람도 없어요. " 경기도 광주에 사는 한모씨(75)는 "주식 등 자산 가격이 급등하는 뉴스를 보면 뒤처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면서도 "새롭게 주식·부동산 투자를 하려니 두려워 선뜻 나서기 어렵다"며 이같이 말했다. 주식·부동산·가상자산에 금까지 투자 자산 가격이 일제히 오르는 '에브리씽 랠리' 시대에 소외받는 '투자자들'이 있다.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한 중장년층은 상대적 박탈감을, 시드머니(종잣돈)가 없는 청년층은 벌어지는 자산 격차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고 있다. 인천에 사는 박동철씨(83)에게도 자산 시장 호황은 남 일이다. 박씨는 자산 대부분을 은행 예금으로 묶어놨다. 예적금만 하다 자산 증식 기회를 놓쳤다. 그는 "주식으로 큰돈을 잃은 지인들을 알기 때문에 겁이 났다"며 "뒤늦게라도 시작해보려 했지만 스마트폰으로 어떻게 주식을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성실함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때입니다. " 최근 자산 인플레이션 현상에 대한 한 경제 전문가의 진단이다. 10년 전만 해도 '성실함'은 월급을 아끼고 적금을 부어 돈을 차곡차곡 모으는 행위를 대표하는 단어였다. 하지만 지금 그 행위는 '가장 안전하게 가난해지는 길'이 됐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노동과 자본의 위계 질서가 완전히 뒤집혔기 때문이다. ━"열심히 일한 사람이 잘 되는 세상 아니다"…자산 양극화의 '덫'━전문가들은 '성실 방정식'이 깨진 것을 두고 "자본주의의 룰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한다. 과거에는 위험을 피하는 것이 미덕이었다면 이제는 위험을 지지 않는 것(Zero Risk)이 가장 큰 위험이 된 시대라는 것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열심히 일해 돈을 더 벌어봤자 자산시장에서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이 뛰는 것을 잡을 수 없다"며 "이제 더이상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잘 되는 세상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과 교수도 "청년 쉬었음(일도 구직활동도 하지 않는 상태) 인구가 많은데 그중 3분의1이 금융시장에 있다고 본다"며 "근로소득보다 수익이 많고 이자도 있으니 오히려 그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예테크족(예·적금+재테크)의 위기다. 주가가 연일 급등하며 꿈의 '5000피'를 조기달성해 자본시장이 환호를 지르는 국면에서도, 서울 아파트값이 52주 연속 오름세인 상황에서도 예테크족은 소외돼 있다. 저금리 기조가 이어져 돈의 가치는 급락하고 자산 가격만 급등하면서 성실히 근로소득을 모아 저축한 이들은 '벼락거지' 신세가 됐다는 자조가 잇따른다. ━은행 정기예금 이율 따져보니━1일 5대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 따르면, 2016년 1월말 100만원을 5대 은행 1년 정기예금(대표상품)에 넣고, 1년 후 원금과 세후 이자를 다시 같은 상품에 재예치하는 방식으로 10년간 투자했다고 가정하면, 현재 세후 만기금액은 115만378원에서 120만9747원 수준인 것으로 파악됐다. 원금 100만원에 10년간 이자가 약 15만~21만원 붙은 셈이다. 10년 합산 누적 세후 수익률은 15. 04%~21% 수준이며, 연평균 복리 수익률(CAGR)은 1. 41~1. 92%에 머물렀다. 지난 10년간 5대은행의 대표 정기예금 상품(1년 만기) 금리는 2022년까지 대체로 2%를 밑돌다 2023년 3%대로 올랐다.
#10여 년 전 집을 살지 고민하던 A씨는 결국 결정을 미뤘다. 당시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5억원대였지만 "지금도 비싼데 더 오르겠느냐", "부동산으로 돈 버는 시대는 끝났다"는 정부 메시지가 이어지던 시기였다. 대출 규제도 강화되면서 무리하게 집을 사기보다는 월급을 모으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10년이 지난 지금, A씨가 망설이던 서울 아파트 평균 가격은 15억원대를 넘어섰다. 대출 문턱은 더 높아졌고 월급을 모아 집값 상승 속도를 따라잡기엔 현실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됐다. 당시의 선택이 결과적으로는 자산 격차의 출발선이 된 셈이다. 서울 아파트 시장은 유동성 환경의 변화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한 자산으로 꼽힌다. 초저금리와 대규모 유동성 공급 속에서 시중 자금은 부동산으로 향했고, 대출·세제 규제가 강화될수록 여러 채보다 이른바 '똘똘한 한 채'를 선택하는 흐름이 굳어졌다. 자금은 지방보다 서울, 서울 안에서도 학군·교통·직주근접 여건을 갖춘 핵심 주거지로 집중됐다. 지역별 격차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올해 1월 2일 코스피 지수는 4309. 63에 거래를 마쳤다. 10년 전인 2016년 1월 첫 거래일(1918. 76)과 비교하면 2. 3배 올랐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 주가는 22. 5배 뛰었다. 삼성전자 주가도 10년 동안 5. 3배 상승했다. 주가만 뛴 게 아니다. 새해 첫날 금값은 온스당 4379. 90달러를 기록하며 10년 전보다 4. 1배 올랐다. 204. 6배가 오른 비트코인은 말할 것도 없다. '부동산 불패'를 증명하듯 10년 동안 서울의 중소형 아파트 매매 실거래 평균 가격은 1월 기준으로 단위 면적당 584만2000원에서 1634만6000원으로 2. 8배 상승했다. ━모든 자산이 다 올라…자산 속도 못 따라가는 근로소득━거의 모든 자산 가치가 뒤를 보지 않고 앞을 향해 달리는 시대다. '에브리씽 랠리'(Everything Rally)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빠진 게 있다. 돈의 가치다. 물가와 자산 가치가 오르자 돈의 가치는 떨어졌다. 1980~90년대 주택복권 1등 당첨금은 1억원이었다.
10년 전 100만원을 어떤 금융 상품에 넣었느냐도 돈의 가치를 갈랐다. 2016년 1월은 정기예금 금리가 연 1%대에 머물던 시기다. SK하이닉스 주가는 5만원 아래였다. SK하이닉스는 지난달 30일 주당 90만원을 넘기며 사상 최고가를 새로 썼다. 1일 한국은행 통계에 따르면 2016년 1월 정기예금(5년 이상) 금리는 연 1. 88% 수준이었다. 당시 100만원을 예치했다면 현재 약 120만원을 손에 쥘 수 있다. 이자 수익이 20만원 남짓 발생했다. 같은 기간(2016년 1월 4일부터 올해 1월30일까지) 코스피 지수는 2026. 46에서 5224. 36으로 상승했다. 약 2. 58배 올랐다. 그 사이 SK하이닉스 주가는 4만4700원에서 90만9000원으로 올랐다. 20. 34배 증가했다. 단순하게 세금과 수수료를 제외한 연평균 수익률로 환산했을 때 10년전 100만원이었던 SK하이닉스 주식은 2034만원이 된 것. 최근 국내 증시가 연일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자 주식투자 참여가 급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산가치가 치솟는 이면에 돈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다. 뉴욕증시에서 대형주 중심의 S&P500지수는 최근 장중 처음으로 7000선을 돌파하는 등 고공행진한 반면 같은 액수의 달러로 할 수 있는 일은 갈수록 줄어든다. S&P500지수, 다우존스30산업평균지수, 나스닥종합지수는 뉴욕증시 3대 지수로 꼽힌다. 이들 모두 3년 연속 상승 곡선을 그렸지만 그 중에도 S&P500은 미 전체 시가총액의 약 80%에 해당하는 대형주 중심이어서 뉴욕증시를 대표하는 지수다. S&P500지수는 지난달 28일(현지시간) 장중 사상 최고치인 7002. 28을 기록하며 처음으로 7000선을 넘어섰다. 2004년 11월 6000선을 돌파한 지 1년2개월 만이다. 애플, 테슬라, 메타 등 빅테크(대형 기술기업) 실적에 대한 기대감으로 기술주가 강세를 보인 영향이다. S&P500지수는 2023년 24. 2%, 2024년 23. 3%, 지난해 16. 4% 상승률을 기록했다. 투자 전문가들은 지난 3년에 이어 올해 4년 연속으로 두 자릿수 상승률을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