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멍 뚫린 주사기 안전망
중동 전쟁으로 촉발된 나프타 공급 부족이 주사기 수급 불안으로 이어지며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정부가 주사기 매점매석 행위를 금지하고 '사재기' 단속에 나섰는데도 의료 현장 일각에선 주사기 '품절'이 이어진다. 주사기 공급량은 예년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주사기 수급이 불안한 원인을 진단하고 의료제품 공급 안정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해 본다.
중동 전쟁으로 촉발된 나프타 공급 부족이 주사기 수급 불안으로 이어지며 환자 안전을 위협하고 있다. 정부가 주사기 매점매석 행위를 금지하고 '사재기' 단속에 나섰는데도 의료 현장 일각에선 주사기 '품절'이 이어진다. 주사기 공급량은 예년과 비슷하다. 그럼에도 주사기 수급이 불안한 원인을 진단하고 의료제품 공급 안정화를 위한 방안을 제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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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주 전에 산 주사기를 7월에야 받을 수 있다네요. " 지난 21일 오전 서울 중구의 한 안과의원. 물품 주문서를 보던 임찬영 원장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지난 7일 구매한 일회용 주사기의 예상 발송일이 3개월 뒤인 오는 7월로 지연됐단 알림 때문이다. 임 원장은 "가장 많이 쓰는 3cc 용량 주사기가 2주분 남짓 남았다"며 "백내장을 포함해 한 달 100~200건의 수술을 하는데 백내장 수술 한 건당 3cc 주사기를 10개 정도 쓴다. 물량 확보가 시급함에도 주사기 주문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이튿날 오후 찾은 경기 성남시의 한 정형외과의원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가득 차 있던 창고는 거의 빈 상태로, 주요 물품은 일주일분만 남아있었다. 창고 안을 들여다보던 최성욱 원장은 "주사기·수액 세트·수술용 장갑 등 모두 일주일 치 정도 물량"이라며 "새벽마다 재고를 확인하지만 대부분 품절"이라고 전했다. 중동사태로 플라스틱 원료인 나프타 공급망이 흔들리면서 평소 의료 용품 재고가 많지 않은 동네 병·의원은 제품 수급에 직격탄을 맞았다.
대학병원에 의료제품을 납품하는 김모 대표는 하루가 멀다고 쏟아지는 가격 인상 공문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김 대표는 "일회용 주사기, 수액 포장재, 의료용 튜브, 장갑, 감염 보호복까지 다양한 의료제품이 중동전쟁의 영향권 안에 있다"며 "코로나19 당시에도 경험해보지 못한 초유의 상황"이라고 혀를 찼다. 그가 머니투데이에 공유한 단가 인상 공문은 4월 한 달에만 8개 업체 이상에서 보내온 것이었다. 업체들은 중동전쟁에 따른 환율 인상·원자재 비용 증가를 가격 인상의 공통 이유로 지목한다. 탈지면, 일회용 가운, 석고 신발 등을 제조하는 A사는 지난 13일부터 제품 가격을 인상했다. 전국 중대형 병원에 일회용 식염수 주사기 납품하는 B사는 다음 달 1일부터 기존 단가 대비 가격을 30%나 한꺼번에 인상한다는 내용의 공문을 보냈다. 한 달새 2회 인상을 통보한 곳도 여러 곳이다. 수액백, 알코올 솜 등을 만드는 C사는 3월 말 원부자재 가격 상승에 따라 5%대로 제품 단가를 인상한 데 이어 다음 달부터 추가로 전 제품의 공급단가를 평균 약 10% 올린다고 안내했다.
최근 생산량이 늘었음에도 '주사기 대란'이 지속되고 있다. 그 배경으로는 공급이 줄어들 수 있다는 불안감과 가격 인상이 꼽힌다. 실제 현장에서는 100개에 1만원대짜리 주사기를 17만원에 올린 판매자도 나타났다. 그러면서 저렴한 가격에 미리 주사기를 선점하려는 '가수요'가 발생했다. 일부 유통사의 '매점매석'도 원인으로 지목된다. 정부는 공급량을 꾸준히 늘리고 시장 안정화를 위한 단속을 지속하겠다는 계획이다. 24일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지난 22일 오후 5시 기준 주사기 생산량은 460만개로 지난해 영업일 기준 하루 평균 생산실적 약 367만개(잠정치) 대비 약 25% 많다. 주사기 재고량은 4680만개다. 지난 13일부터 현재까지 4400만~4700만개 정도로 유지되고 있다. 식약처 관계자는 "주사기 제조업체의 하루 생산물량은 435만개(21일 생산 기준) 이상으로 유지되고 있고 지난 일주일 동안 일일 평균 생산량은 전년도 생산실적(일단위환산)과 비교해 14. 1% 증가했다"고 말했다. 정부는 주사기 수급 불안이 지속되자 지난 14일부터 주사기와 주사침의 매점매석을 금지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주사기·주사침 등 의료소모품 대란을 막기 위해 정부가 부랴부랴 대책을 내놨지만, 일선 현장에선 피부로 체감하기엔 역부족이란 볼멘소리가 쌓인다. 이런 주사기 대란에 개원가에선 역사 속으로 사라진 유리주사기가 대체품으로까지 거론된다. 앞서 보건복지부는 지난 21일 '중동전쟁 대응 제4차 보건의약단체 회의'를 열고, 수급 불안정 우려가 있는 주사기를 앞으로 7주 동안 50만개씩 추가 생산하고 소아청소년이나 분만·혈액투석 의료기관에 우선 공급하기로 했다. 또 14일 재정경제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주사기 및 주사침 매점매석행위 금지 등에 관한 고시'를 발령했다. 이에 따라 주사기·주사침 제조업자·판매업자가 주사기(일반용·치과용·필터·인슐린), 주사침(비멸균·멸균·치과용)를 고시에서 정하는 기준 이상으로 과다 보유하거나 판매를 기피하는 행위, 특정 구매처에 과다 판매하는 행위가 모두 금지된다. 하지만 정부의 이런 노력에도 1차 의료기관(의원급)을 중심으로 "정부의 대처가 아쉽다"는 지적이 나온다. 황규석 서울특별시의사회 회장은 23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개원가에서 일회용 주사기를 한 달치 이상 갖고 있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전쟁 이전엔 의원 한 곳당 적게는 6개월에서 1년치까지 비축했는데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이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