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모바일 신분증, '생활 인프라' 돼야

[기고]모바일 신분증, '생활 인프라' 돼야

박수용 서강대학교 교수
2026.09.28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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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용 서강대학교 교수

고대 그리스인은 신뢰를 말로만 확인하지 않았다. 나무나 도기 같은 물건을 둘로 나눠 한 조각씩 가졌다. '심볼론(symbolon)'이라 불리는 표식이다. 다시 만났을 때 맞물리는 절단면은 서로를 알아보는 증표였다. 상징을 뜻하는 영어 '심볼(symbol)'이 여기서 나왔다.

신원의 본질은 그때와 다르지 않다. 화면에 이름과 사진이 뜬다고 신분증이 되는 것은 아니다. 누가 발급했는가, 위·변조되지 않았는가, 효력이 살아 있는가. 이 세 가지가 확인돼야 비로소 신뢰할 수 있는 신분증이 된다.

모바일 신분증도 이 세 가지에서 출발한다. 국가가 발급하고 본인 확인을 거쳐 본인 명의 스마트폰 한 대에만 담긴다. 신원정보는 암호화되고 전자적 정보에는 유효기간을 둔다. 발급·폐기와 진위·유효성 검증을 위한 공통 기반도 국가가 운영한다. 지난 8월 시행된 전자정부법 시행령은 이런 안전장치를 발급기관의 의무로 구체화했다.

보안을 강화하면서 편의성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도 특징이다. 필요한 정보만 골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인 여부를 확인하는 데 주소나 주민등록번호 전체를 보여줄 필요는 없다. 이용자는 노출을 줄이고, 확인 기관은 필요한 정보만 다룬다.

법도 이 조각의 무게를 인정했다. 모바일 신분증은 실물 신분증과 동일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단순히 신분을 '보여주는' 수단을 넘어 신뢰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하지만 기술의 완성도와 현실 속 활용도는 아직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고 있다. 국가가 법적 효력을 보장하고 기술적 기반까지 갖췄지만, 모바일 신분증은 아직 국민 생활 속에서 익숙한 신분증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잘 만든 신뢰 인프라가 일상의 사용으로 충분히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결국 모바일 신분증을 '쓸 수 있는 기술'에서 '늘 쓰는 인프라'로 끌어올려야 한다. 빼어난 신원인증 기술을 사회의 경쟁력으로 바꾸는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민들의 일상에서 신원을 증명하는 번거로움을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변화이기도 하다.

활성화를 논한다면 핵심은 '접점의 밀도'다. 통신 매장과 은행, 병원, 편의점처럼 국민이 신분 확인을 반복하는 생활 현장부터 공공 영역까지 모바일 신분증 검증 체계를 촘촘히 깔아야 한다. 신분 확인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서든 받아주고, 제시하는 사람이 설명하지 않아도 확인하는 쪽이 먼저 알아볼 정도로 보편화돼야 한다.

그래야 발급할 이유가 선명해지고 사용은 일상이 된다. 지갑에서 신분증을 꺼내고 개인정보를 불필요하게 내보이는 번거로움도 줄어든다. 결국 기술의 확산은 국민 생활의 편의로 돌아오게 된다.

세계가 향하는 방향도 이쪽이다. 세계은행은 올해 '디지털 지갑-새로운 패러다임' 보고서를 통해 디지털 지갑을 사용자 중심의 디지털 신원과 데이터 공유, 결제가 결합하는 새로운 구조로 제시했다. 개인이 디지털 자격증명을 보유하고 필요한 순간 필요한 정보만 꺼내 증명하는 방식이다.

유럽연합(EU)은 아예 법으로 못 박았다. 27개 회원국은 올해 말까지 시민과 거주자, 기업이 이용할 수 있는 디지털 신원 지갑을 제공해야 한다. 통신·금융·의료 등 다양한 민간 영역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체계로 확대된다.

Web3 시대의 글로벌 인증 경쟁은 기술력만의 승부가 아니다. 일상과 얼마나 빠르고 면밀히 연결하느냐도 경쟁력이 된다. 한국도 기술의 우위를 생활 속 확산으로 증명할 때다.

박수용 서강대 교수
박수용 서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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