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LIFE]색소폰 부는 CEO..권영수 LG필립스LCD 사장
지난해 12월20일 LG필립스LCD(이하 LPL) 구미공장 복지동 대강당. 2006년 적자에서 2007년 확실한 턴어라운드를 실현한 LPL 구미공장 직원들이 모여 한해의 성과를 평가하고 높은 성과를 낸 직원들에 대한 포상이 이뤄졌다.
시상식이 끝나고 흥겨운 록페스티벌. 임원들로 구성된 밴드의 공연이 시작됐다. 론 위라하디락사 최고재무책임자(CFO)가 드럼을 맡고 전략담당 최형석 상무가 기타와 보컬, 마케팅담당 김병수 상무가 기타, 현종민 상무는 베이스, 조미진 상무는 키보드 앞에 섰다. '임원 밴드'가 한달여 맹연습한 1970년대 히트 팝송인 '비너스', 영화 '복면달호'의 삽입곡 '2차선 다리' 등을 연주하자 분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했다.
2곡의 연주가 끝나고 흰색 와이셔츠 차림의 권영수 사장이 갑자기 무대로 걸어올라갔다. 느닷없는 권 사장의 등장에 직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그때 무대에 있던 임원이 권 사장에게 갑자기 '색소폰'을 건넸다. 직원들의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권 사장은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 등 2곡을 능숙한 솜씨로 연주했다. 직원들은 "오빠, 오빠"를 연호하며 사장의 깜짝 선물에 열광했다.
색소폰을 부는 CEO. 요새는 남다른 취미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졌기에 크게 이상하지는 않지만 권 사장과 색소폰은 그렇게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권 사장은 CFO 출신답게 칼 같은 사람이다. 또 다소 보수적인 성향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권 사장이 색소폰을 잡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3년 전쯤 고등학교 친구의 권유로 시작하게 됐다는 게 권 사장의 설명이다.
"나이가 들면서 의욕이 떨어지기 쉬운데 악기를 하나 하게 되면 자신감도 생기고 마음의 여유도 가질 수 있다고 친구가 권유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여유를 좀 찾자.' 20~30년씩 앞만 보고 달려온 샐러리맨들이 늦은 나이에 악기나 취미 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일반적인 계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바쁜 시간에 색소폰 학원 다닐 시간은 없었다. 당시는 그가 LG전자의 CFO를 맡고 있던 시기다.
결국 권유한 친구에게 부탁해 사사를 받았다. "권유한 친구가 프로급 실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시간 날 때마다 집으로 불러서 배웠죠." 그렇게 배웠지만 지난해 회사 행사에서 보여준 솜씨는 능숙했다. 하지만 권 사장은 "아직은 비기너(beginner; 초보자) 수준"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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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의 재미를 한창 느끼던 시기였지만 지금은 따로 색소폰을 불어볼 시간이 거의 없다. "너무 바빠서 최근에는 가끔 집에서 부는 정도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권 사장은 2006년 말 LPL의 CEO로 임명됐다. LPL은 당시 실적악화로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다. LPL은 2006년 9000억원에 가까운 영업적자를 냈다.
구원투수로 투입된 그로서는 최대한 빨리 회사 상황을 파악하고 턴어라운드할 방안을 마련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오죽했으면 LPL의 CEO로 임명되자마자 아내에게 "올해부터 1년은 내가 고3이 됐다는 생각으로 일할 테니 집안에 신경을 쓰지 못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말했을 정도다.
LPL은 권 사장이 부임한 이후 화려하게 턴어라운드했다. 지난해 1분기부터 4분기 연속 시장의 예상치를 뛰어넘는 실적을 기록했다. 연간 매출은 회사 창립 이래 최대였다.
이제는 다시 색소폰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그러나 권 사장은 "1년만 더 고3 생활을 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LPL이 지난해 정상궤도에 올랐다면 올해부터는 최고 회사로 도약하는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특히 올해까지는 LCD시장의 상황이 좋겠지만 내년에는 업황이 다소 악화될 것으로 전망되는 상황이다. 업황이 안좋아도 이익이 꾸준히 증가하는 회사를 만들기 위해 올 한해 또 '고3' 생활을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래도 시간날 때마다 조금씩 계속 할 생각입니다." 권 사장은 LPL 취임 이후 '배려경영'을 강조해왔다. LPL과 납품업체간 배려, 임원과 직원간 배려, 직원과 직원간 배려, 그는 좀더 높은 산을 오르기 위해서는 '배려를 통한 팀워크'가 필수라고 말한다. 배려는 여유에서 나오는 법. 삶의 여유를 찾기 위해 잡은 색소폰이 그가 추구하는 배려경영에도 영향을 주는 건 아닐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