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뜨는 가로수길, '진짜 선수'들의 경쟁이 시작되다

다시 뜨는 가로수길, '진짜 선수'들의 경쟁이 시작되다

이정흔 기자
2010.12.09 10:11

[머니위크 커버]프리미엄 로드/ 신사동 가로수길&세로수길

"잘 보이고 싶은 마음 너무 그렇게 웃을 건 없잖아요! 뽐내며 살기도 힘들어요."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주목 받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이렇듯 얄밉도록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 이곳에서는 공사 현장을 가리는 가림막마저도 평범하지 않다.

테라스형 카페에 앉아 즐기는 커피 한잔, 이국적인 레스토랑에서 브런치를 즐기는 여유, 작지만 개성 있는 디자이너들의 패션숍…. 마치 한국의 작은 유럽을 연상시키는 분위기다. 말하자면 요즘 이곳, ‘뽐내고 싶은’ 여성들 사이에서 확실하게 떴다.

◆가로수길, 문화와 개성을 입고 ‘제대로 떴다’

가로수길이 지금처럼 북적거리기 시작한 건 3년 전쯤부터. 하지만 그 전에도 이곳은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유명한 거리였다.

신사역에서 압구정 현대고등학교까지 길이 670m, 폭 15m 정도. 2차선 도로를 끼고 있지만 적당히 눈치보고 길을 건널 수 있을 정도의 넓지 않은 도로. 번화한 강남에서도 아파트 하나 없이 한적한 이곳에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무렵부터.

지금은 가로수길의 랜드마크가 된 예화랑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게 1982년이다. 이후 골동품이며 액자, 갤러리숍 등이 하나둘 들어서며 점차 예술적인 풍모를 띠게 됐다. 이즈음 의류매장이 뒤따라 들어오면서 분위기를 돋웠다. 특히 이 무렵 근처 ‘S모드’라는 패션학교 출신으로 유학생활을 거친 신진 패션디자이너들이 이 거리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름을 건 패션숍을 내기 시작하면서 ‘디자이너 거리’로서의 정체성은 한층 더 강해졌다. 아르마니, 베네통, 쉐비뇽 등 내로라하는 해외 의류 브랜드의 직영점이 모두 이곳에 위치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1990년대 후반 IMF 사태를 겪으며 당시의 갤러리숍과 의류 패션숍들은 한차례 밀물 빠지듯 세대교체가 되긴 했지만 그들이 쌓아 놓은 문화적인 색체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새롭게 오밀조밀 둥지를 튼 개인 디자이너들의 패션숍들을 중심으로 이국적인 인테리어로 치장한 카페며 레스토랑이 하나둘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가을이면 길 양쪽을 노랗게 물들이는 은행나무와 앙드레 김도 기꺼이 패션쇼를 열게 만드는 예술적 분위기는 ‘가로수길 낭만’을 완성하기에 충분했다.

마치 유럽의 작은 동네를 거니는 것 같은 ‘이국적인 골목길’에 가장 먼저 눈길을 돌린 건 유럽의 문화를 한번쯤 향유해 본 적 있는 유학생들. 자연스레 가로수길은 ‘강남에 거주하며 유학 경험이 있는 젊은 여성’들이 자주 찾는 프리미엄 거리로서 이미지가 굳어진 셈이다.

◆너무 뜬 가로수길, 이제는 성숙기?

가로수길이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면서 이곳 분위기도 조금씩 바뀌고 있다. 여전히 가을이면 노란 은행잎이 쌓이고, 골목마다 오밀조밀 숨어있는 이국적인 카페를 찾는 재미가 쏠쏠하긴 하지만 가로수길 메인 거리의 풍경은 3년이라는 시간을 거치며 꽤 많이 변화했다.

쌓여가는 명성과 함께 매장 운영을 위한 임대료와 권리금 역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현재 시세를 감안하면 10평 매장을 기준으로 했을 때 이곳에 매장을 오픈하기 위한 투자비용은 대략 2억5000만원에서 3억원 정도. 권리금만 2억원을 넘어서는 곳도 적지 않다. 3~4년 전과 비교하면 거의 두배 정도 높아진 가격이다.

투자금이 높아지면서 개인이 들어오기엔 부담스러워진 이 거리를 메운 건 대기업 자본이었다. 삐뚤빼뚤한 간판을 내걸고 이목을 끌던 조그만 카페들이 있던 자리는 어느새 스타벅스며, 커피빈, 네스카페 같은 대기업 브랜드들로 교체됐다. 디자이너들의 패션숍 사이사이에는 대기업의 패션 브랜드들이 더 넓은 공간을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제일모직의 편집매장인 ‘일모’를 비롯해 TNGT의 여성전용 브랜드 ‘TNGT W’, LG패션의 프리미엄 여성 상설매장 ‘라움’이 가로수길의 메인 거리 중앙에 문을 열었다.

변화의 한가운데 위치한 디자이너들의 패션숍 역시 자연스레 이와 같은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예전부터 가로수길에서 전통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몇몇 패션숍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대문에서 패션숍을 운영하며 이곳에 제2의 매장을 내놓는 이들이 늘어났다. 동대문에서는 저가에 대량으로 의류를 판매하더라도, 이곳에서만큼은 각자의 개성을 살려 직접 디자인한 제품을 내건다. 의류제품의 가격대 또한 중고가로 조정됐다. 현재 이곳에서 판매하는 의류 중 니트 한벌의 가격대는 대략 7만원 정도다.

분위기가 달라진 만큼 고객층도 달라졌다. 지금도 이곳을 찾는 고객은 여성과 남성의 비율이 7대 3 정도. 예전과 비교해 고객의 연령층은 더 어려지고 더 대중화 됐다는 설명이다.

신사동 가로수길 지역전문가인 동방컨설팅 심문보 대표는 “예전에는 외제차를 끌고와 디자이너 의상을 쇼핑하고, 유럽풍 레스토랑에서 수다를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면 요즘에는 인근 지하철을 타고 와서 쇼핑을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설명한다.

◆ 가로수길 포화? 이제부터 '진짜 선수'들의 경쟁

그렇다면 프리미엄 거리로서 가로수길의 강점이 사라진 것은 아닐까. 투자금이 높아질 대로 높아진 상황에서 더 이상 새로운 매장이 생겨나거나 거리가 발전해 나갈 여지가 있을까. 최근 불거진 이와 같은 우려에 대해 심 대표의 대답은 예상외로 간결하다.

“가격이 낮아졌다고는 해도 옷 한벌에 10만원 안팎이면 여전히 구매력 있는 여성들이 찾는 곳이라는 얘깁니다. 지하철을 타고 오는 어린 여성들이 늘었다곤 하지만 이들도 여전히 부유층에서 풍요롭게 자란 친구들이 대부분이죠.”

물론 요즘 가로수길이 뜬다니까 권리금 장사만을 노리고 모여드는 이들이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심 대표는 “이곳은 애초에 그렇게 성공할 수가 없는 곳”이라고 못박는다.

권리금이 높아진 만큼 웬만큼의 매출이 아니고서는 안정적인 경영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진 것이 엄연한 현실. 예전보다 이곳을 찾는 유동인구가 늘었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색깔이 강한 가로수길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문화를 정확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고객의 발길을 붙잡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최근 가로수길이 변화를 겪으면서 개인 매장을 오픈하기가 어려워진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히려 투자금이 높아진 만큼 이를 감당할 수 있는 ‘진짜 선수’들을 걸러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이곳의 문화적 힘을 인정하는 이들이라면 투자금보다 중요한 고객을 보고 이곳을 찾아 들어올 수밖에 없으니까요. 이미 실력을 검증 받고 웬만해선 실패하지 않을 실력가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니, 상권을 지금보다 더욱 안정적으로 이끌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거죠.”

가로수길 옆 ‘세로수길’ 가보셨나요?

번화한 서울 강남의 한복판, 전혀 다른 ‘한적함’을 무기로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 온 가로수길. 그러나 몇년새 가로수길이 번성하면서 이곳 역시 강남의 여느 곳과 다름없이 ‘북적거리는 곳’으로 변해버렸다. 그러자 사람들은 더 한적한 곳을 찾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가로수길 옆 골목에 위치한 세로수길. 요즘 이곳에는 여유 있게 브런치를 즐길만한 테라스형 레스토랑부터 이국적인 퓨전 음식점, 와인바와 사케바가 속속 들어서며 또 다른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심문보 대표는 “메인거리의 권리금이 높아지면서 개인 매장들이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 번지는 게 표면적인 현상지만 번화해진 가로수길을 걷다 예전의 한적함을 느끼고 싶어 하는 고객들의 요구와 맞아떨어진 부분도 있다”고 설명한다.

메인거리에서 커피를 마시며 쇼핑을 즐기고,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 여유 있게 식사를 즐기면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세로수길을 찾는 이들이 대부분. 심 대표는 “앞부분의 패션, 커피 상권에 이어 골목 안쪽으로는 외식 상권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셈”이라며 “보통 번화한 상권들이 이와 같은 구성으로 돼 있기 때문에 이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세로수길은 아직 확장 가능성이 큰 상권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이곳 역시 가로수길의 특성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에 만만한 상권은 아니다. 이곳에서 타이레스토랑 스파이스 마켓을 운영하는 김병은 사장은 “단순히 이색적이거나 특이하기만 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낭패를 보는 경우가 주변에 많다”고 전한다.

그는 “메인거리만큼은 아니더라도 권리금이나 투자금이 낮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다”며 “젊은 여성이라는 메인 고객과 지역의 문화적 특성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먼저”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곳에서 1년 넘게 안정적으로 장사를 하고 있는 김 사장의 경우 ‘여성고객끼리’ 많이 온다는 데 중점을 뒀다. 무겁게 술을 즐기는 분위기보다는 캐주얼하게 음료와 식사, 또는 간단한 와인을 즐기며 오랜 시간 부담 없이 시간을 보낼 만한 장소로 콘셉트를 잡았다.

“요즘 가로수길의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문화적 색채가 뚜렷한 곳인 만큼 상권 자체가 갖고 있는 가능성은 여전합니다. 실제로 ‘가로수길 분위기’를 느껴보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늘고 있고요.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 소위 ‘대박’을 노릴 만한 곳은 아니지만, 나만의 색깔과 아이템이 확실하다면 승부수를 던져 볼 만한 곳이라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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