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위크 커버]착한기업 DNA를 찾아서/ 왜 지금 착한기업인가

"독하게 굴어. 그래야 네가 살아." 400만 관객몰이에 성공한 영화 <신세계>의 명대사 중 하나다. 영화 후반부, 병원에 누워있는 정청(황정민)이 친동생처럼 아끼는 이자성(이정재)에게 유언처럼 이 한마디를 남긴다. 조직이 살아남으려면, 그리고 조직 속에서 '내'가 살아남으려면 독해져야 한다는 깨달음을 전한 것. 이후 이자성은 정청의 뜻을 살려 '독한' 방식으로 거대그룹 '골드문'의 새 수장에 등극해 자신만의 신세계를 열어간다.
"착하게 굴어. 그래야 네가 살아." '라면 상무' 등 연이어 터진 영화 못잖은 기막힌 사건사고들로 사회적 '멘붕'을 겪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이 한줄이 명대사다. 이는 '독한' 갑을관계에 찌든 '을'들이 쓰러져가며 유언처럼 남긴 메시지다.
정부발 경제민주화 바람도 선(善)에 포커싱한 기업경영 패러다임을 주문하고 있다는 점에서 '을'이 남긴 메시지와 본질이 같다. 거대그룹, 기업이 지속성장하려면 선이 선순환하는 '신세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것.
이에 기업들은 이윤만 추구하는 '독한 기업'이 아닌 사회적 책임에 민감한 '착한 기업'으로 전환하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비상식적 갑을관계가 남긴 폐해와 정부의 경제민주화 드라이브에 '착한 기업'이 주목받고 있는 것이다.

◆인터넷·SNS 타고 공개된 이상한 '갑을관계'
사회공헌활동, 기부 등을 통해 '착한 기업'의 길을 걷고 있는 기업은 이전에도 있었지만, 최근 갑과 을 사이에서 연이어 발생한 씁쓸한 사건사고들이 인터넷을 타고 순식간에 퍼지면서 '착한 기업'에 대한 주목도가 어느 때보다도 커지고 있다.
발단은 지난 4월 발생한 일명 '라면 상무' 사건. 포스코에너지 A 상무가 대한항공 미국 LA편 여객기 비즈니스석에 탑승해 제공된 라면을 다시 끓여달라는 주문을 반복하는 등 기내서비스에 불만을 표출하다 여성 승무원을 책으로 때려 물의를 빚은 것. 이후 A 상무의 이름과 사진이 인터넷을 타고 퍼져나가며 파문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급기야 포스코에너지 측이 사과문을 내고 A씨를 보직 해임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임원 개인의 인격상 문제를 넘어 '갑 문화'에 젖어있는 대기업의 조직문화가 도마 위에 오르는 등 사회적 지탄은 더 거세졌다. 이로 인해 하락한 기업의 브랜드가치 역시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라면 상무' 충격파가 가시기도 전에 프라임베이커리 회장이 호텔 지배인을 장지갑으로 폭행한 '빵회장' 사건, 30대 본사 영업사원이 50대 대리점주에게 욕설을 퍼부은 '남양유업 욕설 녹취록' 사건, 밀어내기 압박이 불러온 '배상면주가 대리점주 자살' 사건 등이 잇달아 터져 여론을 들끓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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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임베이커리는 코레일관광개발로부터 납품 중지통보를 받았고, '빵회장'은 사업을 접었다. 남양유업과 배상면주가는 기업 매출 감소로 이어진 제품 불매운동으로 혼쭐이 나고 있다.
기업 또는 조직 구성원의 '악행'이 기업 브랜드가치 하락, 매출·영업이익 감소로 이어지는, 그야말로 착하게 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신세계'가 본격적으로 태동하고 있는 모습이다.
◆'착한 경영' 주문하는 경제민주화 바람
정치권 핵심의제로 부상한 경제민주화 역시 기업들에게 '착하게 굴 것'을 종용하고 있다. '대기업 일감몰아주기 방지법', '금산분리 관련 법안' 등 경제민주화법안에 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전개될 6월 임시국회가 지난 3일 시작된 것.
앞서 지난달 31일에는 여야 정치권이 원내대표간 협의를 통해 6월 국회에서 경제민주화, 일자리창출, 민생관련 법안 등을 중점 처리한다는 데 합의한 바 있다. 이 중 경제민주화법안과 관련해서는 새누리당이 12건, 민주당이 34건의 법안을 중점 처리하겠다고 발표한 상태다.
특히 최근 남양유업 사측과 남양유업대리점협의회의 공식 단체교섭 중재에 나섰던 민주당의 경우 가맹사업자 보호를 위한 '대리점법' 제정을 추진하는 등 '을' 보호에 초점을 맞춘 경제민주화법안들을 강력 추진할 태세다.
민주당 김한길 대표는 지난 5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통해 정상적인 갑을관계 형성을 위한 사회적 대타협위원회 설치를 제안하기도 했다. 이날 김 대표는 "대통령의 경제민주화 실천 의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며 "대통령과 여야 지도자, 경제주체들이 참여하는 위원회를 구성, 경제주체 간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지속 가능한 성장동력을 만들자"고 말했다.
정부도 경제민주화에 강력 드라이브를 걸 수밖에 없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취임 이후 경제민주화 정책이 표류하면서 '의지 부족'이라는 비판을 받았던 정부로서는 변화가 불가피한 시점에 맞닥뜨렸다는 게 정·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선행 방도 찾는 기업들
여론과 정치권의 움직임에 '착한 기업'이 화두가 되면서 기업들은 너도나도 '착한 기업'을 표방하고 나섰다.
재계 1위 삼성그룹의 경우 최근 1조2000억원의 상생로드맵을 내놓았다. 올해 3270억원, 5년간 1조2000억원을 투입하는 '상생협력 생태계 조성프로그램'을 통해 1, 2차 협력업체들과의 상생을 모색하겠다는 것.
LG그룹도 2000억원 규모의 동반성장펀드를 조성해 2, 3차 협력회사를 지원하기로 했고, 현대·기아차는 동반성장펀드와 상생 금형설비 펀드를 1차 협력사는 물론 2차 협력사도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이동통신시장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도 '사회와 상생하는 동행' 프로그램을 위해 1조2000억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런가하면 사회적기업에서 방도를 찾는 기업도 있다. SK브로드밴드의 경우 지난 2011년 설립한 사회적기업 (재)행복한녹색재생에 대한 인증절차를 올해 마무리하고 이를 통해 소외계층에게 일자리를 지원하는 선행을 본격화할 예정이다. (재)행복한녹색재생은 SK브로드밴드의 고객 임대용 통신단말기 점검·세척·포장 사업을 위탁 수행하고 있으며, 전직원 중 장애인의 비율이 36%에 이른다.
특히 올해에는 경제민주화 영향으로 (재)행복한녹색재생 같은 사회적기업을 직접 설립하거나 사회적기업을 지원하는 대기업들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윤종태 한국사회적기업진흥원 기획홍보팀장은 "최근 6년 중 가장 많은 인증기업이 탄생한 해는 2010년인데 당시 216개의 기업이 사회적기업 인증을 받았다"며 "그런데 올 한해에만 200~250개의 사회적기업이 새롭게 탄생할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내 배만 부르면 그만'이라는 식으로는 더 이상 생존할 수 없음을 깨달은 기업들의 '착한기업 되기' 행보가 과연 언제까지, 그리고 어떤 규모와 방식으로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28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