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정경호를 향한 새로운 기대

[인터뷰] 정경호를 향한 새로운 기대

한수진 ize 기자
2023.03.07 09:22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넓은 강의실에서 발차기를 하며 열성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던 한 남자는, 강의실을 빠져나오자마자 화장실로 향한다. 그리고선 힘겨운 듯 속을 게워낸다. 1조원의 남자, 일타 강사라 불리는 남자는 화려하게 포장된 삶을 살고 있지만, 속은 텅 빈 강정처럼 음식조차 제대로 먹지 못한다. 넓은 침대를 두고 바닥 침낭에서 겨우 잠을 청하고, 텅빈 냉장고엔 물조차 없어 수돗물을 마신다. 울렁이는 속에 약을 털어넣으며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 눈에 봐도 야윈 얼굴은 위태로워 보인다.

하지만 분필만 손에 잡으면 다른 사람이 된다. 강의 시간에 딴짓을 하는 학생을 보곤 "난 니들이 잘됐으면 좋겠어 진심으로. 그래서 밥도 못먹고 잠도 안자고 연구해. 아주 치열하게. 지금도 단 하나라도 알려주고싶어서 마음이 급해 아주 똥줄이 탄다"라는 진심어린 말로 집중하게 만든다. 자신의 모든 에너지를 동원해 아이들을 가르치고 진정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남자. 정경호가 연기한 tvN 토일드라마 '일타 스캔들'(극본 양희승, 연출 유제원)의 최치열은 이름처럼 일터에서 불길같이 맹렬하게 존재한다.

그리고 이는 정경호 본인의 모습이기도 하다. 아직도 "카메라 앞에 서면 떨리"는 마음으로 경계를 늦추지 않고, 끊임없이 예민한 경계에 놓인 캐릭터들을 연기해온 배우. 수학에 문외한이던 그가 수학 강사를 연기하기 위해 집에 칠판을 사다놓고 치열하게 연습을 되풀이하며, 어려운 문제와 수식이 입에서 술술 나오도록 통째로 외우는 노력의 반복. '치열쌤' 그 자체였던 정경호는 본업에 열성적인 최치열처럼 부단한 노력들을 거듭했고, 시청자로부터 "진짜 수학 강사 같다"는 찬사를 이끌어냈다.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일타라는 단어도 몰랐어요. 더군다나 수학은 하나도 몰랐던 사람이었죠. 가장 중점적으로 연습했던 건 실제 선생님들이 어떻게 수업을 하는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거였어요. 자문 선생님 수업에 참관하기도 하고 직업을 이해하기 위해 대화도 많이 나눴죠. 판서를 해야하는 장면이 너무 어려워서 촬영 전까지 그걸 중심으로 연습했어요. 집에 칠판을 사놓고 두달 정도 연습했어요. 어려웠어요. 그런 노력들을 지나 드라마가 2023년 1월에 시작해서 시청자들에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해줬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는데 다행히 좋은 반응이 있어서 감사해요. '일타 스캔들'이라는 작품이 좋은 기억이 됐으면 좋겠어요."

'일타 스캔들'은 사교육 전쟁터에서 펼쳐지는 국가대표 반찬가게 열혈 사장 남행선(전도연)과 대한민국 수학 일타 강사 최치열(정경호)의 달콤 쌉싸름한 로맨스를 그린 드라마다. 정경호와 전도연의 달달한 로맨스 사이로 학부모와 학생들의 전쟁터 같은 입시 준비 과정을 사실적으로 그리며 대한민국 교육 시스템의 문제를 동시에 짚어낸 작품이다.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오 나의 귀신님' '고교처세왕'의 유제원 감독과 양희승 작가의 세 번째 호흡작이기도 하다. 믿음직한 작가와 감독에 더해 전도연이라는 상대역이 정경호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양희승 작가님 작품은 다 봤고 팬이었어요. 유제원 감독님도 '오 나의 귀신님'에 출연했던 조정석 덕분에 한 번 만난 적이 있었어요. 무엇보다도 전도연 선배님과 연기를 할 수 있다는 게 큰 기회라고 생각했어요. 선택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죠. 함께 연기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어요. 정말로 좋아했던 분과 투샷이 잡힐 때 정말 기분이 좋았어요. 선배님은 모르겠지만 투샷을 찍고는 모니터 앞에서 보고 그랬거든요."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정경호, 사진제공=매니지먼트 오름

치열이 행선을 바라보며 가졌던 따뜻하고 설레던 눈길처럼 정경호도 전도연과 호흡하는 내내 기분 좋은 설렘을 안았다. 행선으로 존재했던 순간들에 최선을 다하는 전도연을 보며 많은 것들을 배웠고, 배우로서의 고민을 덜었다. 그래서 정경호는 전도연과 연기한 순간이 "영광스러웠다"며 수줍은 소년처럼 미소지었다.

"함께 연기하며 느낀 건 전도연 선배님은 거짓이 없는 분이라는 거였어요. 저 정도 연차가 되면 카메라 앞에서 떨지 않을 줄 알았는데 늘 긴장하고 설레어 하시더라고요. 현장에서 있는 모든 순간에 행선으로 존재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정말 감명 깊었어요. 전 지난 20년 동안 환경적인 변화에 맞춰서 연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나 해요. 장르의 폭이 넓어지고 여러 OTT도 생기면서 쉽게 드라마와 영화를 볼 수 있는 환경에서 '나는 어떻게 연기를 해야할까'라는 고민이 있었어요. 그런데 전도연 선배님은 30년간 연기를 해오면서 변하지 않는 것들에서 오는 울림이 있으세요. 역할마다 다양한 면들로 변화하는 동시에 지키고 있는 것들도 너무나 좋았어요. 그런 걸 목격할 때마다 영광이었고 좋은 순간들이었죠."

정경호는 2004년 데뷔해 어느덧 여러페이지의 필모그래피를 쌓은 20년차 배우다. 데뷔한 해에 출연한 KBS2 '미안하다, 사랑한다'부터 대박을 터트려던 그는 커다란 굴곡없이 다양한 작품에서 주연으로 활약했다. 하지만 그가 토로한 대로 결핍이 있거나 예민한 캐릭터들이 그가 연기해온 주 역할들이었고, 때문에 변화가 필수인 배우라는 직업 앞에 고민하는 시간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이제야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실천한 경험의 내공이 결국은 단단한 무언가를 만들어낸다는 것을 말이다. 믿고 보는 배우라는 타이틀은 이러한 내공이 빛나는 순간들에 가질 수 있고, '일타 스캔들'로 시청자를 웃기고 울린 정경호의 오늘날이 바로 그렇다.

"돌이켜보면 지난 10년 동안 까칠하고 예민한 인물을 연기했더라고요. 왜 계속 이런 역할들만 하게 되는 건지, 또 여기서 벗어나고 변화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지금도 고민하고 있고요. 그런데 '일타 스캔들' 속 치열의 모습을 보면서 예전에 해왔던 연기와는 다른 식의 느낌을 내고 있다는 걸 목격하게 됐어요. 아픔을 표현하는 농도가 조금은 진해지지 않았나 하는. 애써 바꾸고 변화하기보다는 여러 순간의 경험들이 자연스럽게 다른 표현을 할 수 있도록 만들지 않았나 싶어요. 이제는 제가 조금 더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아야 하는 시기이지 않나 생각해요. 그래서 기대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어요. 이 사람이 어떤 연기를 할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배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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