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육신은 하나, 영혼은 둘. 무녀와 악신, 첫사랑과 원한 관계, 귀물과 로맨스까지. SBS 새 금토 드라마 ‘귀궁’(극본 윤수정, 연출 윤성식 김지연)은 수많은 재료를 몰아넣고 섞은 비빔밥 같은 작품이다. 판타지와 사극, 퇴마와 로맨스, 심지어 활극과 스릴러까지 장르가 겹겹이 쌓였지만, 드라마는 무게보다는 속도, 진중함보다는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라는 한 축에 확고히 닻을 내린다. 이 복합 장르의 격전지에서 ‘귀궁’은 첫 회부터 시청률 9.2%(닐슨코리아 통계, 전국 기준)를 기록하며, SBS 금토극의 흥행 계보를 무난히 잇는 데 성공했다.
이야기는 인간을 혐오하는 악신 이무기 강철이(김영광)가 왕의 검서관 윤갑(육성재)의 몸을 차지하면서 시작된다. 윤갑은 온화하고 정직한 성품의 왕실 충신이자, 주인공 여리(김지연)의 첫사랑이다. 여리는 맑은 거울처럼 신령을 투명히 비추는 신기를 타고났지만, 무속인의 삶을 거부하고 안경 장인으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이무기 강철이는 그 신력을 탐내며 10년 넘게 여리를 따라다니지만 번번이 거절당한다. 그렇게 비켜 나 있던 두 사람의 운명은, 궁궐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광증 사건으로 다시 맞물린다.
왕의 어린 아들이 원인을 알 수 없는 광기를 앓자, 윤갑은 해결책으로 여리를 떠올린다. 그러나 무속을 금기시하는 궁궐 사정상, 그는 왕의 안경을 만들어달라는 핑계를 대고 여리를 데려오려 한다. 그렇게 궁궐로 향하던 길목에서 윤갑은 정치적 암살을 당하고 만다. 이를 지켜보던 강철이는 윤갑의 육신을 차지하고 여리에게 접근한다. 드라마는 그렇게 첫사랑의 얼굴을 한 악신과 무녀의 오묘한 공생을 본격적으로 펼쳐낸다.

이 드라마의 주된 재미는 바로 이 꼬이고 얽힌 관계성이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첫사랑마저 되찾을 수 없게 된 여리의 정서는 비극적이지만, 그 감정을 정통 멜로가 아닌 황당한 상황의 연쇄로 풀어간다는 점이 흥미롭다. 윤갑에게 빙의한 강철이가 처음 느끼는 미각에 도취해 걸신처럼 굴고, 여리가 윤갑의 얼굴을 한 강철이를 향해 “왜 하필 너냐”며 절규하는 대목들이다. 장르 전복의 유쾌함, 정색과 환장의 교차, 그 틈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진폭은 이 드라마의 서사를 가볍지만 공허하지 않게 만든다.
연출을 맡은 윤성식 감독은 ‘화랑’, ‘철인왕후’, ‘클리닝 업’ 등에서 보여줬던 경쾌한 연출감각을 이 작품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한다. 귀신들의 비주얼은 공포보다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쪽에 가깝다. 외다리귀, 수살귀, 팔척귀 같은 존재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음 귀신에 대한 기대가 앞선다. CG와 특수분장, 사운드 디자인은 한국적인 귀물의 무드를 살리되, 지나치게 과하지 않고 오히려 장면의 코믹성과 혼재된 분위기를 배가시킨다. 연출은 활극의 리듬을 살리기 위해 장면 전환을 빠르게 가져가 극적 여운을 길게 끌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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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궁’의 주역 육성재는 1인 2역을 무난하게 소화한다. 육성재는 실질적으로 1인 2역, 아니 그 이상의 감정 분열을 소화하며 윤갑과 강철이라는 상반된 인물 사이를 유연하게 오간다. 단정하고 곧은 윤갑, 막무가내로 덤비는 강철, 인간 오감에 황홀해하는 악신이라는 여러 층위를 모두 설득력 있게 표현한다. 극단의 정체성 충돌을 능청스럽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육성재의 장점이 설득력 있게 발휘된 캐릭터다. 김지연 역시 ‘조선변호사’ 이후 2년 만의 사극 복귀작에서 안정된 연기 톤을 보여준다. 진지한 인물 안에 경쾌한 리듬을 은근하게 실어 감정의 밀도를 높인다.

무엇보다 ‘귀궁’은 복잡한 설정을 하나하나 설명하려 들지 않는다. 사건은 휙휙 튀어나오고, 장르 간 전환은 경쾌하며, 플롯은 빠르다. 복잡한 구조 속에서도 시청자는 인물들의 감정에 빠르게 몰입하게 되고 그 몰입은 어느새 웃음을 유발하거나 살짝은 오싹한 흥미를 돋운다.
‘귀궁’은 요란하고, 바쁘고, 유쾌하다. 동시에 어두운 궁궐의 기운과 왕실 내부의 음모, 팔척귀를 둘러싼 미스터리한 조짐들이 드라마의 무게감도 잡아준다. 웃음과 긴장이 공존하는 이 균형감이 ‘귀궁’의 매력이다. 익숙한 듯 낯설고, 낯선 듯 익숙한 장르 뒤섞기의 실험. ‘귀궁’은 그 혼란스러움 자체를 에너지로 삼아 시청자의 눈길을 붙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