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 현대사에서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만큼 오래도록 사회적 상처로 남은 사건도 드물다. 30년 넘는 세월 동안 미제로 남았던 이 사건은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여러 차례 재현되며 대중의 기억 속에 반복적으로 호출됐다. 다만 사건이 끝내 해결되지 않았던 시기, 대부분의 서사는 ‘진범을 모르는 상태’라는 한계를 전제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범인을 특정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야기의 긴장은 자연스럽게 ‘누가 범인인가’를 추적하는 방향으로 수렴됐다.
드라마 ‘허수아비’는 진범이 밝혀진 이후 처음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것만으로도 출발선부터 다르다. 결국 이 드라마는 더 이상 정체를 숨긴 범인을 쫓지 않는다. 대신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그 진실에 ’어떻게 도달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무너지고 버텨냈는가를 집요하게 따라간다. 서사의 초점이 ‘누가 범인인가’가 아닌, 이미 알고 있는 진실에 ‘어떻게 도달하는가’를 따라가는 과정으로 이동했기에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 같은 사건을 다룬 여러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을 가질 수밖에 없다.

지난달 20일 첫 방송을 시작한 ENA 월화드라마 ‘허수아비’(극본 이지현, 연출 박준우)는 연쇄살인 사건을 쫓던 형사 강태주(박해수)가 과거 깊은 악연을 지닌 검사 차시영(이희준)과 뜻밖의 공조 관계를 맺으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설정만으로 보자면 익숙한 장르물의 문법을 따르는 듯 보이지만, 이 드라마가 응시하는 지점은 조금 다르다. 이 작품이 들여다보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건의 결과가 아닌 그 사건을 통과해야 했던 사람들의 ‘시간’. 살인자와 같은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이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일상이 돌이킬 수 없이 훼손된 사람들의 이야기다. 기자 서지원(곽선영), 여고생 김민지(김환희), 평범한 연인 이기범(송건희)과 강순영(서지혜)에 이르기까지, ‘허수아비’는 연쇄살인이라는 사건으로 ‘보통의 삶’이 어떻게 균열되는지를 보여준다.
이 드라마의 핵심 장치는 매 회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 배치된 ‘2019년 현재’의 대담 장면이다. 교도소 접견실에서 마주 앉은 강태주와 진범의 대화는 이미 도달한 결말을 현재 시점에 단단히 고정시키는 동시에, 시청자로 하여금 1988년 수사 현장으로 다시 끌어당긴다.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몰입은 단순한 추적의 긴장과는 결이 다르다. ‘범인이 누구인가’에 더해 그 시간을 통과한 인물들이 어떻게 무너지고 버텨냈는지를 지켜본 시청자에게 감정의 밀도와 무게를 고스란히 전달한다. 박준우 감독은 범죄의 자극적 재현을 최소화하고 인물의 심리와 시대의 공기를 포착하는 데 집중하며, 올 로케이션 촬영과 치밀한 미술로 1988년의 감각을 설득력 있게 복원해낸다.

배우들의 연기는 이 서사를 단단히 붙잡는 축이다. 박해수가 연기하는 강태주는 정의감과 분노, 무력감이 공존하는 인물이다. 극 초반에 강성으로 좌천된 강태주는 일련에 벌어진 살인 사건이 연쇄살인임을 눈치챈다. 범인을 잡기 위해 노력하지만 범인은 잡히지 않고, 사건은 계속된다. 범인을 잡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다시 수사에 뛰어드는 각성이 한 인물 안에서 충돌하는 과정 등 강태주라는 한 인물 안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균열을 박해수는 감정의 과잉 없이 설득력 있게 그려낸다. 이희준이 연기하는 차시영은 적인지 아군인지 경계를 허물며 극의 긴장을 떠받치는 또 다른 축이다. 과거 강태주에겐 학교폭력 가해자였던 인물이지만 현재 공조를 제안하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상을 입으면서도 강태주의 동생인 강순영을 구해내는 선택을 하며 시청자의 판단을 끊임없이 흔든다. 흥미로운 점은 두 배우가 20여 년 지기라는 사실이다. 연극 무대에서 시작된 인연이 세 번째 작품으로 이어진 지금, 화면 속 긴장과 실제 신뢰의 간극이 두 인물 관계에 미묘한 깊이를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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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방송 이후 꾸준한 시청률 상승세를 보인 ‘허수아비’는 4회 기준 5.2%(닐슨 코리아 전국 유료 가구 기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2026년 ENA 월화드라마 1위에 올랐다. 이 성과는 단순한 수치를 넘어, 실화를 다루는 방식이 어디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를 다시 묻는다.
이 드라마는 첫 화부터 확실히 말했다. “이 이야기는 살인범이 아니라, 그 사건을 함께 살아낸 사람들, 그리고 끝까지 진실을 포기하지 않았던 이들의 기록이다.”라고. 4회까지 방송된 지금, ‘허수아비’는 그 약속을 흔들림 없이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다.
조이음(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