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7월, 그룹 방탄소년단(BTS)이 먼저 움직였다. 미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대중음악 시상식이라 평가받는 그래미 어워즈가 ‘베스트 아시아 팝 뮤직 퍼포먼스’(Best Asian Pop Music Performance) 부문을 신설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하며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자 그래미도 반응했다. 그래미는 "BTS가 그래미 어워즈 출품 절차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타까웠지만, 음악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결정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서도 "오해가 생긴 부분에 대해 명확히 바로잡고자 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그래미 출품 마감일은 21일(현지시간)이었다. 그래미는 정확한 후속 절차에 대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고, BTS는 기존 입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올해 신보 ‘아리랑’를 발매한 BTS는 그래미에 작품을 내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이 상황을 두고 시시비비와 승패를 가리는 것은 그다지 적절히 않아 보인다. 그럼에도 궁금하다. 과연 누구에게 더 이익이 되는 상황일까?
일련의 과정을 다시 짚어보자. BTS는 지난달 29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저희는 올해 그래미에 출품하지 않기로 했다"면서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로 구분되기보다 음악 그 자체로 들리고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는 그래미가 한국·중국·일본 등 아시아권 음악을 구분해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을 신설한다고 발표한 직후 나온 BTS의 소신이다. 그동안 그래미는 그 ‘권위’ 못지않게 ‘권위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백인 남성 아티스트에게는 관대한 반면, 유색인종과 여성에 대한 평가가 박하다는 지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 역시 K-팝을 비롯한 아시안 팝을 하위 장르로 격하시키는 것이란 비판이 뒤따랐다.

BTS는 왜 이런 결정을 내렸을까? 그래미는 오랜 기간 K-팝 가수들이 꿈꿔온 무대였다. 그동안 빌보드어워즈, 아메리칸뮤직어워즈, MTV어워즈 등에서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냈지만 그래미에서는 유독 외면받았다. BTS도 꾸준히 문을 두드렸으나 후보에 그치거나, 축하 무대를 꾸미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해당 부문이 신설되면 BTS가 초대 수상자가 될 것이 자명하다. 하지만 BTS의 목표는 ‘아시안팝의 왕’이 아니다. 그래미의 본상인 제너럴 필즈(General Fields)를 노린다. 물론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과 본상 모두 거머쥘 수 있다. 하지만 신설된 상을 받는 데 그친다면 BTS를 비롯해 K-팝 전체의 위상을 낮추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를 지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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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BTS의 보이콧 선언으로 더 난감한 상황에 처한 건 그래미다. BTS의 팬덤뿐만 아니라 숱한 음악팬들이 그동안 지속돼 온 그래미의 차별적 행위에 동의했기 때문이다. 다만 그 누구도 그래미를 향해 쉽게 반기를 들지 못했을 뿐이다.
그래미 입장에서는 BTS의 보이콧 선언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아무도 이토록 ‘직접적으로’ 문제를 제기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년 시상식의 상업적 성공을 위해서는 BTS가 꼭 필요했다. 왜일까? 그래미는 내년부터 시상식 중계를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플랫폼인 디즈니 에 맡기기로 했다. 디즈니 입장에서는 이를 통해 당연히 신규 구독자를 확보하는 목표다. 경쟁자인 넷플릭스는 지난 3월 BTS의 컴백 공연을 생중계해 엄청난 경제적 가치를 창출했다. 디즈니 도 이를 노렸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BTS가 내년 그래미 시상식에 참석하지 않는다면 BTS 팬덤의 유입도 기대할 수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래미는 왜 적극적으로 기존 입장을 수정하지 않았을까? 그래미 주관사의 CEO 하비 메이슨 주니어 CEO는 지난 14일 2차 성명을 통해 "일부 아티스트들이 아시안 팝 부문이 자신들이 만든 음악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낀다는 점이 분명해졌다. 음악인 출신으로서 이를 가슴 깊이 받아들인다. 레코딩 아카데미는 변화하는 음악 환경에 맞춰 뮤지션들이 진정으로 존중 받는다고 느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그들의 ‘계속된 노력’의 결과물은 없었다. 그래미는 BTS의 보이콧에 따른 즉각적 대응을 보였을 경우, 또 다른 부문의 반발 역시 고려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BTS의 문제제기를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이 장기적으로 볼 때 그래미의 권위를 낮춘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는 의미다.
그래미를 상대로 한 BTS의 보이콧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래미의 즉각적인 태도 변화를 이끌어낸 것은 아니더라도 그들이 잇단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그만큼 BTS, 더 나아가 K-팝이 전 세계 음악 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영향력은 커졌다. 그래미에서 수상하지 못하더라도 아쉬울 게 없다. 그래미는 미국의 ‘로컬(local·지역) 시상식’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BTS의 무대는 미국이 아닌 세계다.
윤준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