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녀 캐시의 시선으로 다시 쓴 원작

부모를 죽이고, 결혼 첫날밤 남편의 동생과 잠자리를 갖고, 갓 태어난 두 아들을 버린 여자가 이야기의 주인이 됐다. 넷플릭스 시리즈 '에덴의 동쪽' 이야기다. 작품은 자신의 욕망을 좇는 절세미인의 악녀 캐시 에임스(플로렌스 퓨)를 중심에 놓는다. 그의 잔혹함을 지우는 대신 그가 원했던 삶과 남들이 요구했던 삶의 차이를 들여다본다. 악녀에게 사정을 부여하는 이 선택이 작품의 매력이자 논쟁거리다.
지난 1일 공개된 이 작품은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존 스타인벡의 동명 소설을 각색했다. 제임스 딘이 출연한 1955년 영화가 트래스크 가족사의 후반부에 집중했다면, 이번 시리즈는 캐시를 중심으로 트래스크 집안에 대대로 이어진 비극을 7부작으로 펼친다. 각본은 당시 영화를 연출한 엘리아 카잔의 손녀 조이 카잔이 맡았다.
이야기의 출발점은 아버지의 편애 속에서 자란 애덤(크리스토퍼 애벗)과 이복동생 찰스(마이크 파이스트) 트래스크 형제다. 아버지가 죽은 뒤 엄청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그 돈의 출처를 두고 갈등하던 두 사람 앞에 상처투성이 캐시가 나타난다. 애덤은 캐시의 아름다움과 연약해 보이는 모습에 이끌리지만, 찰스는 본능적으로 자신과 닮은 캐시의 기질을 감지하며 경계하고 의심한다.

애덤은 "형을 산산조각 낼 것"이라며 경고하는 찰스의 반대에도 결국 캐시와 결혼한다. 그리고 캐시는 결혼 첫날밤 남편을 약에 취해 잠들게 한 뒤 찰스와 성관계를 맺는다. 찰스의 경고가 정작 그 자신을 통해 현실이 된 셈이다. 캐시에게 애덤은 안전을 보장하는 남자이고, 찰스는 자신과 닮은 기질을 지닌 남자다. 남자를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만 보던 캐시가 처음으로 본능적 끌림으로 상대를 취한 순간이다.
캐시에게 주목하면 헌신적인 순애보로 여겨지는 애덤의 사랑도 다르게 보인다. 애덤은 캐시의 반대에도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가족의 미래를 계획한다. 캐시를 보호하려 하지만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는 제대로 듣지 않는다. 자신의 행복이 상대의 행복과 같다고 믿어서다. 순진한 남자와 사악한 여자의 관계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캘리포니아에서 쌍둥이 아들 아론과 칼을 낳은 캐시는 아내와 어머니로서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애덤의 어깨에 총을 쏜 뒤 달아난다. 캐시가 떠난 뒤 애덤의 상실과 좌절은 아들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다.

캐시의 행동을 모두 자립을 위한 저항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그는 자신을 돕는 사람까지 이용하고, 자유를 확보한 뒤에는 타인을 통제하려 한다. 그 과정에서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억압을 거부하는 욕망과 권력을 쥐려는 욕망이 한 인물 안에 공존한다. 피해를 겪었다는 사실이 가해의 책임을 없애지는 않는다. 캐시를 이해할 단서를 얻을수록 그의 다음 선택이 더 불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성적 묘사의 수위도 높다. 캐시가 매춘부를 거쳐 매음굴 운영자가 되는 과정에서 노출과 정사 장면이 상당히 자주 등장한다. 성은 그가 돈을 벌고 남성의 약점을 파악하는 수단이다. 남성의 욕망을 읽고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용하는 캐시의 태도가 이 장면들에서도 드러난다. 정사신에서도 인물 사이의 거래와 힘의 차이가 나타나면서 불편한 긴장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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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렌스 퓨는 이 모순을 표현하는 데 능하다. 도움이 절실한 얼굴에서도 상대를 살피는 계산이 읽히고, 다정한 태도에서도 경계심이 사라지지 않는다. 호의와 냉담함을 오가며 필요에 따라 자신을 연출하는 캐시를 보여준다. 캐시를 의뭉스럽게 뻗어내면서 시선을 붙든다. 무엇을 할지 불안해서, 또 어떻게 해낼지 궁금해서 계속 보게 된다.

이 이야기의 또 다른 중심은 중국계 미국인 가사 노동자 리(훈 리)다. 애덤이 상실에 매여 있는 동안 아이들을 먹이고 돌보는 것은 리다. 혈연으로 묶인 사람들이 서로를 상처 입히는 집에서 가족을 유지하는 일은 그에게 맡겨져 있다. 캐시의 선택이 가족을 흔든다면 리의 선택은 그 가족을 지탱한다.
훈 리는 차분한 태도에 피로와 서운함을 더해 무조건 헌신하는 조력자로만 남지 않는다. 자신의 삶을 원하는 마음과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 함께 드러난다. 중국계 인물을 연기한 훈 리는 실제로는 한국계 미국인이다. 인물의 감정을 울림 있게 전달하는 그의 깊은 연기는 국내 시청자에게 반가운 발견이 될 만하다.
시대극을 보는 즐거움도 충분하다. 농장과 저택, 매음굴로 이어지는 공간과 정교한 의상은 인물의 처지가 달라지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다만 캐시를 새롭게 설명하려는 의욕이 때로는 인물을 단순하게 만든다. 잔혹함의 원인을 어린 시절의 폭력에 거듭 연결하면 예측하기 어려웠던 인물이 익숙한 상처의 결과로 정리된다.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강조할수록 돈과 권력을 위해 타인을 해치는 행동과의 간극도 커진다. 캐시의 사정을 들려주는 것과 그를 충분히 설명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그럼에도 이 시리즈에 시간을 내줄 이유는 분명하다. 캐시를 욕하면서도 그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게 하는 퓨의 연기, 혈연보다 돌봄으로 가족의 의미를 보여주는 리가 있다. 이들을 따라가다 보면 질문은 악녀의 정체에서 가족의 책임으로 옮겨간다. '에덴의 동쪽'은 악녀의 행동에 붙들렸다가 가족 전체의 사정을 궁금해하게 되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