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전 대통령 서거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 재계, 국민 각계의 추모와 장례위원회 구성,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조명하며 YS의 업적과 시대적 의미를 되새깁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정치권, 재계, 국민 각계의 추모와 장례위원회 구성, 통합과 화합의 의미를 조명하며 YS의 업적과 시대적 의미를 되새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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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의 영웅이 돌아가셨다. 고인과 함께 민주화 투쟁을 했던 시절의 모습들이 선하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가 22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에 대해 "너무나 충격적이다. 가슴이 아프다"면서 이같이 말했다. 고 김 전 대통령의 '상도동계'에 정치적 뿌리를 둔 김 대표는 '상도동계 막내'로 불리다 지난해 집권여당 수장이 됐다. 30년 전으로 인연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김무성을 키운건 8할이 YS"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게 된다. 고 김 전 대통령을 먼저 찾은 건 김 대표였다. 김 대표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1980년부터 정치에 뜻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에서 병원을 운영했던 지 인의 처가 쪽이 연락두절 상태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군사독재의 실상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결국 1983년 사업체와 주식 등을 정리하고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고 김 전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 뒤 고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하자 창립 멤버로 참여
'삼김시대'를 이끌었던 세 주인공 중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김영삼 대통령이 유명을 달리했다. 민주화와 개혁의 정치사가 마침표를 찍은 것처럼 '삼김시대'의 주역들도 역사 속 인물로 사라지고 있다. '삼김시대'는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정치계를 풍미한 김영삼·김대중·김종필이 활약한 시대를 일컫는다. 무려 30년 간, 한 세대를 아우르며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를 탄생시켰다. 삼김은 일명 YS(김영삼), DJ(김대중), JP(김종필)란 애칭으로 불렸다. 각각의 지지 기반은 뚜렷하게 갈렸지만 국민적 관심과 애증의 대상이 된 정치인이었다. 이들의 정치적 행보는 비슷한 듯 다르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군부독재정권에 저항하는 야당 정치인으로 국민들의 기대를 받았고 김종필은 박정희정권의 중심부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후계자를 꿈꿨던 핵심 인물이었다. 1970년대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유신 정권을 계기로 정치 전면에 나선 '삼김'은 1980년대 들어 나란히 신군부의 탄압을 받으며 정치권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12시22분 서거했다. 직접적인 서거 원인은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증이다. 김 전 대통령은 19일 정오께 고열로 입원했지만 상태가 악화돼 22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동해 치료를 받았다. 아래는 이날 오후 2시 기자회견에서 오병희 서울대병원 원장의 일문일답. -원래 있던 지병 때문인가. 새롭게 병환이 발생했나. ▶원래 심장 혈관질환과 동맥 경화가 있었다. 수차례 시술을 받았고, 패혈증과 같은 급성 스트레스 겹쳐서 심장 기능이 약화돼 서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가족들이 임종을 지켰다. 미망인인 손명순 여사는? ▶(손 여사가 임종 지킨 것은) 확인 못 해드린다. 못 뵌 거 같다. -현철씨는 임종 지켰나? ▶그렇다 -향후 빈소 마련 및 장례 절차는 어떻게 되나? ▶유족 들과 당국에서 결정할 것으로 생각한다. -서거 전 남기신 말씀은? ▶확인해드릴 수 없다. 중요한 말씀 아니다. -최근 의식이 언제까지 있었나? ▶(19일) 입원하실 때까지 어느정도 있었다. 갑자기
21일 0시22분 서거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재임시절 공과 과가 어느 대통령 보다 뚜렷하게 갈렸다. 하나회 척결과 금융실명제 도입, 지방자치제 부활 등 우리 정치, 사회, 경제의 틀을 바꾸는 굵직한 개혁들을 끌어냈지만 임기 후반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이라는 국가부도사태를 초래해 전국민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임기 후반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극복하지 못하고 역대 대통령 평가 설문에서 여전히 하위권에 머물러 있지만 그가 이룬 업적을 감안할 때 저평가돼 있는 대통령 중 한 명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한국 사회 틀 바꾼 '금융실명제' '하나회 척결' = 고 김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업적으로는 금융실명제 도입과 군부 정권을 이끌었던 군의 핵심 사조직 '하나회' 척결을 든다. 김 전 대통령은 취임 첫해인 1993년 8월 12일 극도의 보안 속에서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명령제'를 전격 발표했다. 5공 정부 시절 '장영자ㆍ이철희 사건'을 계기로 10년 넘게 검토
22일 향년 88세로 서거한 거산(巨山) 김영삼 전 대통령은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한국 정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산 증인'이다. 1927년 경상남도 거제시에서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195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기 전 장택상 전 국회부의장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정계 입문 두 달 후 손명순 여사와 결혼했다.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제 3대 총선에 자유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26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돼 최연소 국회의원 기록을 세웠다. 이 기록은 6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깨지지 않은 기록이다. 여당 의원으로 의정 활동을 시작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이승만 전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자 자유당을 탈당해 길고 긴 야당 정치인 생활을 시작한다. 김 전 대통령은 1961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군사쿠데타를 계기로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1968년 김 전 대통령은 박 전 대통령이
22일 서거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은 생전 눌변이지만 단순하고 간결한 메시지로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말로 민주주의가 다가오고 있음을 설명한 것은 널리 회자되는 말이다. 김 전 대통령의 어록을 정리해 봤다. ○…"머리는 빌리면 되지만 건강은 빌릴 수 없다" ○…"대도무문(大道無門), 정직하게 나가면 문은 열립니다. 권모술수나 속임수가 잠시 통할지는 몰라도 결국은 정직이 이깁니다" (1979년 6월4일, 5·30 신민당 총재 재선 직후) ○…"이 암흑적인 정치, 살인정치를 감행하는 이 정권은 필연코 머지않아 반드시 쓰러질 것이다. 쓰러지는 방법도 무참히 쓰러질 것이다 하는 것을 예언해 주는 것" (1979년 8월11일, YH무역 여공 신민당사 농성 강제진압 항의 기자회견) ○…"닭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1979년 10월4일, 헌정사상 첫 의원직 제명 뒤) ○…"나를 해외로 보낼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나를 시체로 만든 뒤에
김영삼 전 대통령이 22일 오전 0시 22분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에서 서거했다. 향년 88세다. 오병희 서울대병원 원장은 이날 오전 2시 병원 내 시계탑건물 1층 회의실에서 긴급 브리핑을 열고 이같이 발표했다. 오 원장은 "서울대병원 측은 김 전 대통령은 과거부터 반복된 뇌졸중과 협심증, 폐렴 등으로 수차례 병원에 입원한 끝에 숨졌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은 2013년 4월부터 10월까지 반신불수를 동반한 중증 뇌졸증과 폐렴으로 입원한 바 있다. 그는 또 "김 전 대통령이 지난 19일 낮 12시 고열을 동반한 호흡 곤란으로 입원한 뒤 21일 오후 중환자실로 이송해 치료했으나 상태가 악화돼 끝내 서거했다"고 말했다. 직접적인 사망 원인은 허약한 전신 상태에서 패혈증과 급성 심부전이 겹친 것으로 판단된다고 서울대병원 측은 전했다. 관계자는 "지병 외 갑작스러운 병이 생겼다기보다는 워낙 고령에 중증질환 반복된 것으로, 누구한테라도 발생할 수 있는 상황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