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애 충전소
세상과 사람이 싫어지는 날이 있습니다. 어떤 날에는 반대로 위로를 받기도 하고요. 구석구석 다니며 숨어 있던 온기를 길어내려 합니다.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좋은 일들도 선한 이들도 많다고 말이지요. 힘들어 무너질 것 같은 날에 이리로 와서 쉬세요. 쪼그라 들었던 좋은 마음을 꺼내어 드립니다. 반갑습니다, '인류애 충전소'에 잘 오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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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남동소방서 옆에 우뚝 솟은, 7~8층 높이 훈련탑. 주로 119 구조대원들이 훈련하는 곳이다. 예컨대, 아파트에서 고층 화재가 났을 때 옥상에 로프를 설치해 들어가는 등 구조를 하는 거다. 위급 상황에서 빠르게 생명을 살리기 위해 훈련탑을 쓴다. 이는 구조대원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소방대원의 땀과 발자국으로 30년된 훈련탑은 낡아갔다. 페인트칠은 벗겨졌다. 그로 인해 안 좋은 물질이 나올 우려도 있었다. 온몸엔 페인트가 잔뜩 묻은, 노란 옷을 입은 사내가 소방서로 저벅저벅 들어갔다. 얼굴에 털이 많은 '털보'였다. 그는 소방대장에게 대뜸 이리 말했다. "남동소방서 건물에 페인트 시공을 해드리고 싶어요. 가격은 무료입니다." ━이태원 참사 때 소상공인 돕고 싶어…'무료 페인트칠' 시작━'털보페인트' 박건욱 팀장(31)의 제안이었다. 다소 뜬금 없다 여기거나 경계심이 들 수도 있는 말. 공짜로 페인트칠을 해준다니 이게 무슨 말일까 싶을 수 있었다. 박 팀장은 진심
지난해 8월 말, 한여름이었다. 경기 고양소방서 119 구조대인 박준흠 소방장(36)이 쉬는 날이었다. 같은 고양소방서 소속 '구급대'인 아내 양주경 소방장(33)과 북한산에 오를 때였다. 걸음이 좀 더 빠른 박 소방장이 정상 근처에 도달했을 때였다. 부축받으며 내려오는 30대 여성을 봤다. 거동이 거의 안 되는 상태로, 양쪽에서 부축받고 내려가고 있었다. 여성의 아버지, 어머니, 예비 남편, 남동생이 함께 있었다. 통증을 많이 호소하고 있었다. 내려가는 게 만만찮을 것 같았다. 800m 고지에 가까운 높이. 백운봉암문이란 곳. 양쪽 다릴 거의 못 쓰는 상태로면 3시간 이상은 내려가야 했다. 구급대인 아내가 급히 상태를 확인하고 응급 처치를 했다. 박 소방장이 그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렇게 내려가다간 '2차 사고'가 발생할 수 있으니, 119에 신고하셔야 합니다." 그랬더니 놀란 대답이 돌아왔다. "여긴 높은 산인데, 119에서 뭘 해줄 수 있나요?" ━쉬는 날에도 '소방관'…
지난해 여름, 8월 25일 저녁 7시쯤.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날. 하승우 대구경찰청 제5기동대 순경(28)은 대전 유성구의 한 상가 건물 1층, 꼬칫집에 있었다. 경찰 동기들을 만나기 위해 휴가를 쓴 날이었다. 오랜만에 대화도 나누었다.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에 갈 때였다. 상가 직원이 "불이 났다"고 했다. 하 순경은 위치를 봤다. 화장실에 가기 직전, 천장에서 이미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연기도, 불꽃도 다 보였다. 불이 난 곳과 반대 방향으로 피하고 싶은 게 '본능'. 그러나 하 순경은 거꾸로 움직였다. 휴가였고, 불을 끌 의무도 없음에도, 본능적으로 소화기를 집어 들었다. 소화기를 들고, 천장을 향해 거세게 분말을 뿌려 불을 끄려 애썼다. 그때였다. 불이 활활 타오르던 천장에서, 무언가가 그의 얼굴에 떨어졌다. 뜨거운 낙하물은 이마를 먼저 덮쳤다. 이어 그의 왼쪽 얼굴까지 상처 낸 뒷바닥으로 떨어졌다. 특별할 것 없는 아주 평범한 날. 친구들과 꼬치로 저녁 먹던 그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이었어요. 열여섯 살, 중3인 전현서 학생은 등교 준비 중이었었지요. 비 온단 걸 알고 우산을 챙겼습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파트 1층 현관에 내려왔을 때, 3~4학년쯤 돼 보이는 초등학생들이 웅성거리고 있었어요. 이미 비가 쏟아지고 있는데, 우산을 거의 다 안 가져온 거였습니다. 쓸 수 있는 우산에 몇몇이 낑겨서 가고, 한 여자 아이만 남았습니다. 아이는 야속한 하늘만 보며 고민했습니다. 집은 고층, 아침 시간이라 오래 기다려야 하는 엘리베이터. 다시 올라갔다 오면 학교에 지각할 게 뻔했거든요. 현서양은 그걸 잘 알기에 염려했습니다. 지각하지도, 비 맞지도 않게, 자기 우산을 빌려주고 싶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망설였습니다. 실은 모르는 아이였고, 괜한 관심이 아닐까 싶었거든요. 현서양 성격이 내향적인 편이기도 했고요. 잠시 머뭇거리다 현서양은 불끈 용기를 냈습니다. "저기…이 우산 쓰고 갈래?" ━손에 쥐어주고, 도망치듯 비 맞으며 달렸다━ 어찌
혜민씨가 강아지 '이쁜이'를 만난 건 올해 봄이었다. 삼일절이었고 차를 타고 가던 중이었다. 짙은 밤색 털, 축 쳐진 귀, 까만 입, 어쩐지 꾀죄죄한 강아지가 길을 헤매고 있었다. 모두가 어딘가 정해놓고 향하던 그 거리에서, 이쁜이만 모든 방향으로 걸었다. 게다가 그는 앞다리를 쩔룩거렸다. 그때였다. 강아지가 불현듯 차도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았다. 혜민씨는 너무 놀라서 황급히 차를 세웠다. 죽음에 다가가려는 강아지 앞을 막았다. 죽지 않았음 좋겠단 본능에 가까운 마음. 낯선 이가 다가오자 이쁜이도 방향을 바꿨다. 붙들려는 이의 마음을 오롯이 보기엔, 강아지는 험한 길 생활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저 무서워하고 달아나기만 했다. 혜민씨는 지방자치단체에 신고했다. 강아지를 잡아 구해달라고 했다. 누군가 현장으로 왔다. 그 역시 잡지 못했다. 그가 떠나며 말했다. "선생님, 저는 저 강아지가 그냥 저렇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저 녀석 잡으면 저는 10만원 받긴 하지만요. 바로 보호소 가거든
8월 4일 오후 5시 10분. 현주씨(22)가 퇴근하던 길이었다. 집으로 데려다줄 초록색 마을버스에 무거워진 몸을 실었다. 앉을 자리가 있나 두리번거렸다. 다른 자리는 꽉 차 있는데, 딱 한 곳만 비어 있었다. 왼쪽 맨 앞 창가 좌석이었다. 조금 의아했으나 털썩 앉았다. 여기만 빈 이유를 금세 알았다. 창틀에 쓰름매미가 붙어 있었다. 한여름을 알리며 "쓰-름, 쓰-름"하고 구애하는 그 매미. 나무껍질에서 알로 1년, 땅속에서 유충으로 5년. 그리 오래 준비하다 막상 성충이 되면 고작 2~3주 살고 떠나는. 짧은 삶. 한껏 울다가도 애달픈데, 인간 세계에 잘못 들어선 거였다. 당황해 날아다녔다간 대부분 싫어할 거였다. 급하게 잡으려 할 거였다. 그러다 죽을 수도 있었다. 다행이었던 건, 그 자리에 앉은 이가 다름 아닌 현주씨란 거였다. ━매미 입장에선…많이 놀랐을 거잖아요━350만회. 현주씨가 버스에서 매미를 살려준 걸 올린, SNS 영상 조회수가 그랬다. 우연히 그걸 보고, 이 사람
봄비가 막 쏟아지려던 올해 사월이었다. 오후 4시, 바다가 가까운 작은 책방 문이 닫혔다. 북끝서점. 여기, 강원도 고성이 북쪽 끝이기도 하고, 여기서 책을 샀다면 끝까지 다 읽길 바라며 오래 마음 쓴 이름. 책방 주인 상아씨가 자신의 차에 올랐다. 가족이 기다리는 서쪽으로 향하던 퇴근길. 갑작스레 불행이 동동동동 뛰어들었다. 차 앞을 가로막은 건 누런 털에 두 귀가 풀죽은듯 내려온, 동네 누렁이였다. 상아씨가 잠깐 차에서 내렸다. 강아지가 쫄쫄 다가왔다. 그의 몸에, 작고 마른 몸을 부대꼈다. 해석이 불필요한 반가움이었다. 그때였다. 일명 '자크 할머니(별명)'라 불리는 동네 횟집 어르신이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는 다급히 말했다. "마침 잘 만났네. 이 누렁이가 글쎄 며칠 전에 나타났지 뭐야. 온 동네에서 엊어맞고 다녀. 이대로 두면 개장수한테 끌려갈 거야. 얼마나 가여워…." 할머니는 상아씨에게 부탁했다. 하루만 맡아줄 수 있느냐고. 그럼 개가 지낼 곳을 알아보겠다고. 낯선 이조
오후 2시. 섭씨 33도. 끝자락인 여름이 무색하게 찌는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소담한 동네 버스정류장엔 흔한 지붕 하나 없었다. 뜨거운 해가 두 명짜리 나무 벤치에 고스란히 내리쬐었다. 달궈진 의자는 텅 비었고, 짐든 어르신은 땀을 부지런히 훔치며 버스정류장 전광판을 봤다. 전광판엔 '곧 도착할 버스 없음'이란 피로한 문구가 떠 있었다. 5분, 7분, 10분, 12분. 버스 번호마다 부여된 저마다의 대기 시간. 짧은 듯 긴 시간은 천천히 흘러갔다. 누군가는 민무늬 양산으로, 또 누군가는 길에서 받은 전단지를 부채 삼아서, 또 다른 이는 콘크리트 건물이 만들어낸 그늘로 몸을 숨기며 버텼다. 어떤 방법도 신통치 않을 때, 우연히 뒤를 돌아본 사람이 있었다. 버스정류장 바로 뒤편, 보는 방향에 따라선 옆쪽에 동물병원이 있었다. 사람들 시선이 머문 건 병원 유리창이었다. 거기엔 바깥을 향해 이리 적힌 종이가 붙어 있었다. '폭염! 너무 더워요! 들어와서 잠시 쉬다 가세요!' 쉬다 가라니,
"삑, 삑삑, 삑, 삑." 건물 어디선가 작은 새 울음이 들려왔다. 지난달 4일 오전이었다. 서울 용산에 있는 '카페 SON' 사장 조대원씨(36)가 영업 준비를 할 때였다. 그는 삑삑 소리를 따라갔다. 카페가 있는 5층과 옥상인 6층 사이 창문. 거기에 '아기 딱새'가 있었다. 아마도 이소하다가 어미 새를 놓친 걸로 보였다. 날아가라고 옥상 문을 열었다. 그리고 오픈 준비가 끝난 뒤 다시 살펴봤다. 딱새가 여전히 거기서 삑삑거리고 있었다. 손이 안 닿아 어찌 구조할지 몰랐다. 대원씨는 긴 도구로 어렵사리 딱새를 내렸다. 6층으로 다시 오르려 해서 손으로 잡았다. 요만해서 조금만 힘주어도 부러질 것 같아 떨리는…온기 있는 생명이었다. 상자에 넣어 옥상에 올라갔다. 살포시 품은 손에서 날려 보내주려 했다. 그런데 딱새는 눈을 감고 잠자듯 가만히 있었다. 별수 없이 카페에 다시 데려왔다. 그랬더니 상자 안에서 삑삑거렸다. 다시 옥상으로 가니 또 눈을 감았고, 돌아오면 삑삑거렸다. 세 번
고등학교 1학년 아이가 책방에 들어왔다. 1층 오른편에 꽂힌 책들을 바라봤다. 파란 종이에 안내 글이 적혀 있었다. '미미책 선물. 뜻있는 어른들이 청소년 여러분께 보내는 선물입니다. 청소년이라면 읽고 싶은 책 한 권을 골라 당당하게 카운터로 가져오세요.' 17살, 아이도 책을 선물 받을 수 있는 나이였다.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름 모를 어른들이 남긴 메모를 살펴봤다. 신중한 고민이 이어졌다. 그중 한 책을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리고 집어 들었다. 나태주 시인의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시집이었다. 아이는 책을 고른 이유를 이리 적었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마라. 책 제목이 입시 생활에서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인 것 같다." 오늘의 일은 오늘로 충분하다며, 따뜻하게 껴안아 주는 시(詩) 한 편. 3년의 공부로 지칠 때, 행여나 자책할 시간에, 아이는 그 책 제목만 보고도 위로받을 수 있을 터였다. 책방에 온 어른이 책을 미리 계산한다. 그 책을 이름 모를
'태풍'과 '새끼 고양이' 얘기가 나왔을 때, 2020년 가을이 떠올랐다. 동네를 걸을 때였다. 축 늘어진 새끼 고양이를 봤다. 숨은 쉬었으나 꼼짝도 안 했다. 저녁엔 접근하기 힘든, 우거진 수풀쪽에 옮겨져 있었다. 어미가 물어다 놓은듯 했다. 그날 밤엔 야속한 비가 세차게 내렸다. 다음날 아침, 경비원님 도움을 받아 수풀을 헤쳐 들어갔다. 비에 흠뻑 젖은 작은 존재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울면서 고이 보내주었다. 그러니 한정애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고양이를 살렸단 얘길 꺼냈을 때, 그 장면이 만져지듯 떠오른 거였다. 살리지 못했던 죄책감을, 살려낸 누군가 이야기로 고요히 토닥였다. 결과가 '해피엔딩'인 이야기라 듣는 내내 흐뭇하게 웃었다. 동물을 좋아해 관련법을 많이 낸 이는, 고양이 얘길 할 때만큼은 '고양이 집사'다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 여기선 한 의원의 고양이 얘기만 하려 한다. 이름은 '태풍이'다. ━비 피하려고, 위험한 차에 들어가던 '작은 생명'━바라보았고, 바라
"삼각지역 편미혜님, 시청역 조옥자님, 대방역 박미화님, 부평역 이홍수님…." 화장실에선 어쩌면 "아줌마! 아저씨!"로 주로 불렸을 이들의 '몰랐던 이름'이었다. 배변이 묻은 변기를 닦고, 세면대 물기는 마른 걸레로 훔치고. 물기로 흥건한 바닥은 걸레로 밀고, 휴지로 꽉 막힌 변기는 뚫고. 그리 화장실을 빠짐없이 책임지며 깨끗하게 만드는 이들이 상을 받는 자리였다. 13일 오후, 여긴 서울시청 다목적홀이었다. 수상자로 호명된 이들이 한 명씩 올라왔다.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아버지·어머니뻘 어르신들이었다. 저마다 반듯한 정장을 입고, 넥타이를 매고, 빨간색 스카프를 두르고, 구두를 신었다. 표창장과 금빛, 은빛으로 화려하게 잘 포장된 선물이 주어졌다. 가족들은 꽃다발을 품에 안겨주었다. 찰칵찰칵, 사진을 찍었다. 박수 소리가 가득했고 웃음이 얼굴에 머금어졌다. 시청역 화장실을 청소하는 조옥자씨도 행복해보였다. 소감을 물었다. "너무 해피하죠(웃음). 처음엔 좀 창피하고 그랬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