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주변인의 불편함과 용기

[기자수첩]주변인의 불편함과 용기

최중혁 기자
2008.07.09 15:10

어렸을 때는 자기 확신이나 신념이 강한 사람을 만나면 존경심이나 외경심이 생기곤 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 존경심과 외경심이 두려움과 거부감으로 바뀌었다. 아마도 대학 때나 사회에서 접한 잡다한 사상, 경험들의 영향일 것이다.

어떤 친구는 자신이 믿고 있는 종교를 나만 모르고 있어서 너무 안타깝다고 했고, 어떤 친구는 민족해방과 통일의 한 길에 기꺼이 몸을 던지자고 했다. 또 어떤 친구는 노동해방을 얘기했고, 또 다른 친구는 시민운동이 새로운 대안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떤 집단에도 쉽게 빠져들지 못했다. 집단 속 그들은 몸은 피곤할지언정 마음만은 편해 보였다. 나는 반대였다. 그래서 내 속에 똬리를 튼 의심과 경계를 강제로 몰아내려고도 해봤다. 하지만 잘 안됐다.

기자가 방황 끝에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된 것은 뜻밖에도 짧은 문구 하나 때문이었다. ‘자기반성 없는 계몽주의가 곧 파시즘이다.’ 파시즘에 대해 새롭게 정의내린 이 문구 하나가 '그들'에 꽂혀 있던 내 시선을 '나 자신'으로 돌려놓았다. 집단들도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쇠고기 정국'이 시작된 이래 우리는 수많은 폭력을 목도해야만 했다. '촛불'이 쇠파이프를 드는가 하면, 북파공작원 모임 회원들은 특정 정당 사무실에 난입해 폭력을 행사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이들은 각자 떳떳하고 자기 확신에 가득 차 있다. 확신이 지나쳐 간혹 광기까지 느껴진다.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폭력의 대상이 되는 사회. 잘은 몰라도 파시즘의 이탈리아, 나치즘의 독일, 매카시즘의 미국이 오래전 겪었던 사회일 것이다.

어쩌면 설득과 계몽, 폭력의 차이는 백지 한 장 차이일 지도 모른다. 무조건 믿고 따르라는 정부도 의심과 경계의 대상이지만, '촛불'로 어찌 해보려는 ‘꿍꿍이’들도 마찬가지의 대상이다.

광기와 폭력의 사회에서는 소속감이 주는 편함보다 주변인으로서의 불편함을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용기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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