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거 일변도 맥주, 소비자가 선택한 것… 규제 풀려도 하우스 맥주 위축
#1. 전국적으로 7857개 점포를 보유한 편의점 CU. 이곳에는 국산맥주 브랜드 7종과 수입맥주 브랜드 26종을 동시에 팔고 있다. 소비자들은 원한다면 얼마든지 일본이나 독일, 영국, 뉴질랜드 등 전 세계 맥주를 골라 마실 수 있다. 편의점 CU 전국 매장에서 올해 1월1일부터 지난 23일까지 판매한 맥주 매출액 중 국산맥주 대 수입맥주 비중은 78 대 22. 국산 맥주가 월등히 높은 수치다. 특히 개별 순위로 볼 때 국산 맥주들이 최상위권에 링크돼 있다. 수입맥주 판매 1위인 일본 아사히 맥주나 2위인 네덜란드 하이네캔 맥주는 전체 순위로 따져보면 각각 7위와 9위다.

#2. 20∼30대 직장인이 많이 찾는 서울시청 맞은편 남대문로 9길의 맥주바켓 시청점. 병맥주 전문점인 이곳에는 소주나 위스키는 물론 생맥주조차 팔지 않는다. 오직 전 세계 병맥주들이 진검승부를 벌이고 있다. 현재 이곳에선 세계 25개국 120여종의 맥주를 팔고 있다. 전국적으로 50여개 매장이 있는 맥주바켓에서 11월 한 달간 맥주 매출 순위를 집계한 결과 1위는 벨기에맥주 호가든이 차지했다. 이어 버드와이저(미국)가 2위를, 국산 카프리맥주가 3위를 보였다. 카스(5위)와 하이트d(7위)도 각각 10위권에 포진해 있다. 맥주바켓이 수입맥주를 즐기는 고객을 주 타깃으로 한 매장임을 감안할 때 국산맥주의 선전은 기대이상이다. 특이한 점은 맥주바켓 매출 상위 10위권 맥주들은 대부분 '하면 발효' 방식의 '라거' 맥주라는 점이다.
17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국산맥주가 천편일률적인 라거맥주로 맛이 없다는 논란이 뜨겁다. 이 논란은하이트진로(17,460원 ▼40 -0.23%)의 하이트맥주와 오비맥주가 과점 체제로 한국 맥주시장을 지배하고 있다는데서 출발한다. 과점시장이다보니 소비자들의 선택권이 위축되고, 맥주회사에 끌려다닌다는 것이다.
◇라거일변도 맥주, 과연 강제된 것인가
그러나 국내 맥주시장 판매 현황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현재 국내 맥주시장은 편의점이나 대형마트 같은 이른바 오프라인 구입 비중이 전체 매출의 46%로 해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호프집이나 음식점 같은 술집에서 팔리는 비중(47%)과 비슷하다. 그만큼 집에서 술을 마시는 추세로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이미 편의점이나 대형마트에서는 적게는 수 십종에서 많게는 100종이 넘는 수입맥주를 판매하고 있다. 국산맥주와 수입맥주가 무한경쟁을 벌이는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전히 국산맥주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과점을 형성한 맥주회사에 의해 강제된 것이란 논리와는 맞지 않는다. 편의점뿐 아니라 A대형마트에 따르면 올 초부터 지금까지 국산맥주와 수입맥주의 매출 비중은 83.8 대 16.2로 지난해와 큰 차이가 없다.
독자들의 PICK!
수입맥주가 꾸준히 연간 2~3%p 씩 비중을 높이고 있지만 아직 국산맥주는 수입맥주에 비해 수적 열세에도 불구, 건재하다. 더욱이 잘 팔린다는 수입맥주도 호가든 정도를 제외하면 대부분 국산맥주와 똑같은 라거 맥주다. 호가든도 사실 오비맥주 광주공장에서 만든 것이다.
전문가들은 "전 세계 맥주 매출액의 90% 이상은 부드러운 목 넘김과 깔끔한 뒷맛을 강조하는 라거맥주"라며 "상면 발효방식인 에일맥주는 소량 다품종 생산에는 유리하지만 맥주의 대세는 아니다"고 밝혔다.
◇"소비자 입맛에 의해 선택된 것일뿐"
국산맥주가 밍밍하다는 주장도 맥주의 쓴 맛을 나타내는 표준단위인 IBU(International Bitterness Unit)를 얼마로 정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IBU는 어떤 호프를, 어느 정도 비율로 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한 맥주 전문가는 "라거맥주는 IBU를 통상 10~20 사이로 하는데 국산맥주는 10~14로, 일본맥주는 16~18로 만든다"며 "반면 에일맥주는 대부분 IBU를 20 이상으로 쓴 맛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결국 국산맥주도 소비자 기호가 바뀌면 호프 양을 조절해 얼마든지 쓴 맛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찾지 않아 쓴 맥주를 만들지 않을 뿐이다.
에일맥주 제조기술도 같은 원리다. 한국 맥주회사들은 에일맥주를 못 만드는 것이 아니고 안 만드는 것이다. 오비맥주나 하이트진로는 이미 수 십 여종의 에일맥주 레서피를 자체 시험을 통해 보유하고 있다. 관건은 한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에일맥주를 얼마나 원하느냐에 달려있다. 국내 한 맥주업체 관계자는 "양념이 진하고 강한 한국 음식에는 라거맥주가 제격이고 이는 소비자들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며 "한국시장에서 에일맥주가 통하지 않는데 에일맥주가 왜 없느냐고 하는 것은 넌센스"라고 말했다. 영국 등 유럽에서도 판매 1위 맥주는 대부분 라거맥주다.
◇규제탓에 획일적 맥주?
정부의 강력한 맥주시장 규제로 맛있는 맥주가 태어나기 힘들다는 근본적인 지적도 있다. 실제 국세청이 주류시장 규제를 대거 푼 2010년말 이전까지는 오비맥주나 하이트진로를 견제할 맥주회사의 탄생이 어려웠다. 그러나 국세청이 규제를 푼 지 2년이 다 돼 가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있다. 그만큼 맥주사업이 엄청난 장치산업으로 막대한 투자가 수반되기 때문이다.
제주도개발공사가 일명 '삼다수맥주'를 추진했지만 3차례에 걸친 입찰공고에서 맥주사업을 하겠다고 나서는 기업이 없어 사업 규모를 줄인 게 단적인 예다. 또다른 맥주 전문가는 "국세청 규제 완화로 제주도개발공사가 350억~400억원을 유치하면 라거맥주 공장을 지을 수 있었지만 민간기업이 아무도 나서지 않아 불발로 끝났다"며 "규제는 풀렸지만 시장 원리에 따라 민간기업이 맥주사업에 나서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 제주도개발공사는 8억~15억원 정도 소액 투자로 가능한 에일맥주로 방향을 틀었다. 제주도개발공사 관계자는 "기존 오비나 하이트와 똑같은 라거맥주를 선보이려 했지만 여의치 않아 소량 생산이 가능한 에일맥주를 선택했다"며 "투자 리스크를 줄이고 다양한 맛을 실험할 수 있는 것이 에일맥주의 장점"이라고 밝혔다.
◇ 규제 풀려도 하우스맥주 되레 위축
하우스맥주를 만들 수 있게 규제를 푼 지 10년째지만 정작 하우스맥주 업체들은 되레 줄어든 것도 같은 맥락이다. 시장 경쟁 원리 때문이지 규제 자체가 한국의 맥주 맛을 밍밍하게 한 이유는 아니라는 것이다. 맥주 전문가들은 "규제 완화 이후 지난 2002년부터 2005년까지 하우스맥주업체가 100여곳에 달했지만 현재는 54개에 그친다"며 "대부분 에일맥주인데 그만큼 맛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힘들고, 수익성도 담보하기 힘들어서다"고 말했다.
하지만 프리미엄 맥주 개발을 위해 국내 맥주회사들이 더 분발해야한다는 지적은 귀담아 들어야 한다. 한 전문가는 "오비맥주가 홍콩으로 수출해 현지 판매 1위를 달리고 있는 블루걸 같은 프리미엄 맥주가 더 나와야 한다"며 "'안 팔린다'는 시장 원리에만 얽매이지 말고 다양한 맛의 맥주 시판에 나서야 할 때"라고 밝혔다. 국내 하우스맥주 활성화를 위한 사회적 공헌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