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NTM이 무슨 약자인지 아는가. 혹은 ‘도전! 슈퍼모델’이라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2000년대 케이블 채널을 통해 ‘America's Next Top Model(ANTM)’을 보며 자란 세대일 가능성이 높다. 제목 그대로 슈퍼모델을 꿈꾸는 젊은 여성 출연자들이 경쟁을 벌이는 리얼리티 쇼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2010년에는 한국판 ‘도전! 슈퍼모델 코리아’가 제작되며 이른바 ‘도수코’ 열풍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 프로그램과 진행자인 톱 모델 타이라 뱅크스가 2020년, 팬데믹 시기에 뜻밖의 비판대에 올랐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너는 미국 차세대 슈퍼모델이 되기 위한 경쟁을 이어갈 거야.” 타이라 뱅크스가 매회 화보 촬영 결과와 참여 태도를 심사해 10명의 출연자 앞에 서는 최종 탈락 결정 순간은 프로그램의 하이라이트였다. 타이라가 참가자의 화보 사진을 건네면 합격, 하얗게 비어 있는 사진을 받으면 탈락을 의미했다. 쓴소리와 함께 탈락 통보를 들은 참가자는 대개 눈물을 흘리며 호텔 숙소를 떠나야 했다.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3부작 ‘리얼리티 체크: 도전! 슈퍼모델과 그 이면’은 이 2000년대 리얼리티 히트작을 지금의 시선으로 다시 들여다본다. 팬데믹 기간 OTT와 유튜브를 통해 이 프로그램을 처음 접한 젊은 시청자들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모델의 꿈을 응원하고 패션업계의 이면을 보여주던 인기 방송이 오늘날의 기준에서는 문제점투성이의 ‘가혹한 리얼리티’로 보였기 때문이다.

이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그 때는 어땠는지 몰라도 지금은 틀리다’라는 문제 인식을 내세운다. ‘도전! 슈퍼모델’ 총괄 프로듀서이자 진행자 타이라 뱅크스를 비롯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제이 매뉴얼, 모델 트레이너이자 런웨이 코치인 미스 J.알렉산더, 패션 사진작가 나이젤 바커 등 핵심 제작진과 심사위원들, 그리고 참가자들이 직접 나서 프로그램 제작기와 출연 경험을 회고한다.
가장 먼저 나선 인물은 타이라 뱅크스다. 그는 모델로 성공했지만 차별을 겪어왔던 자신의 경험을 언급하며 “방송을 직접 만들어 모델들의 다양한 모습과 폭넓은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미스 제이와 제이 매뉴얼은 자신들의 콘셉트였던 ‘퀴어 콤비 캐릭터’를, 나이젤 바커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 사진가’라는 자신의 역할을 되짚으며 당시 제작 환경을 들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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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도전! 슈퍼모델’은 분명 야심찬 계획에서 출발했다. 키와 몸무게, 인종과 성적 지향으로 누군가의 꿈을 재단하지 않겠다는 프로그램의 선언은 당시로서는 진보적인 시도였다. 이에 시청자들도 높은 시청률로 응답했다. 문제는 제작진의 욕망이었다. “어떻게 해야 시청률을 유지하고 더 끌어올릴 수 있을까.” 이 고민이 제작진의 머릿속을 차지하면서 모델이 되고 싶어 참가한 10대와 20대 여성들은 점차 자극적인 연출 대상이 되어버린다.

다큐 속 자료 화면으로 다시 보는 ‘도전! 슈퍼모델’은 지금 기준에서 당혹스럽고 불편한 장면들이 가득하다. 다른 인종으로 변신하는 화보 촬영, 노숙자나 강력 범죄 피해자를 콘셉트로 한 촬영, 날고기 팬티를 입거나 동물 분장을 한 화보 촬영까지 등장한다. 제작진들은 잘못된 아이디어였음을 인정하면서도 “시청자들이 점점 더 자극적인 걸 원했다”고 말한다. 외모와 스타일을 바꿔주는 수준이던 메이크오버는 점점 수위를 높여 치아 발치 같은 의료 시술까지 감행하기에 이른다.
가장 논란이 되는 대목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전부 기록한다’는 원칙에 따라, 한 참가자가 촬영 도중에 겪은 심각한 사건을 방송에 그대로 내보낸 장면이다. 제작진은 이후에도 이 사건을 집요할 정도로 반복해 다루며 참가자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기밀 유지 계약 때문에 탈락 후에도 호텔 숙소를 떠나지 못하고 사실상 방치되었다는 참가자들의 증언은 특히 씁쓸하다.
여러 출연자가 제작진 중에서 특히 타이라 뱅크스에게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패션계의 냉혹한 현실을 뚫고 성공한 선배가 든든한 멘토가 되어줄 것이라 믿었지만, 돌아온 것은 체중과 외모에 대한 지적, “어쩔 수 없으니 업계 현실을 받아들이라”는 냉정한 조언이었다. 심지어 타이라는 오랜 동료였던 심사위원들이 해고될 때도 방송국의 결정을 따랐다. 이 프로그램이 “영혼을 갉아먹었다”고 말하는 참가자와 아직도 타이라와 재회하지 못했다는 심사위원의 고백은 보는 이를 먹먹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이 다큐는 타이라 뱅크스를 ‘마녀사냥’하기 위해 만들어졌을까. 그렇지 않다. 이 작품이 겨냥하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리얼리티 방송이라는 시스템이다. 재미와 화제성을 위해 윤리를 쉽게 저버리고, 자극 수위를 높이다 결국 함정에 빠지는 구조는 ‘도전! 슈퍼모델’만의 문제가 아니다. 최근 국내 리얼리티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고인의 사인을 맞히는 미션으로 논란이 되거나, 리얼리티 프로그램 출연자들의 검증 문제도 같은 맥락에 있다.
2003년부터 2018년까지 시즌 24까지 제작된 ‘도전! 슈퍼모델’은 미국 차세대 슈퍼모델이 될 기회를 약속했지만, 실제로 성공한 출연자는 많지 않다. 백반증을 극복하고 글로벌 모델로 자리 잡은 위니 할로우, 최초의 플러스 사이즈 모델이 된 휘트니 톰슨, 배우로도 활동하는 에바 마실 정도가 가장 잘 알려진 ANTM 출신 스타다. 다수의 참가자는 오히려 ‘리얼리티 방송 출신’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업계에서 외면받았다고 증언한다.
연애 프로그램, 경쟁 서바이벌을 중심으로 한 리얼리티 방송은 여전히 대세다. 그렇기에 ‘도전! 슈퍼모델’의 이면을 들춰보는 이 다큐가 던지는 물음이 유의미하다. 리얼리티 방송은 무엇을 지향하고, 무엇을 지양해야 하는가. 제작진이 시청률에만 집착하고, 출연자가 스타가 되겠다는 욕망에만 매달린다면 결국 누구도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없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자극을 추구하는 시청자도 예외일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즐기는지에 따라 방송의 지향점은 달라진다. 방송을 무작정 받아들이지 말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이쯤 되면 저자극 리얼리티 방송을 만드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나와도 흥미롭지 않을까. ‘도전! 슈퍼모델’이 남긴 오점은 리얼리티 방송이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하는 질문들이다.
정유미(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