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샘 대신 존중, 자극 대신 사람…故 안판석의 드라마

밤샘 대신 존중, 자극 대신 사람…故 안판석의 드라마

윤준호(칼럼니스트) ize 기자
2026.08.14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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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대본과 밤샘 촬영 거부…배우·스태프 기본권 지킨 연출가
폐암·뇌출혈 투병 끝 12일 별세…유작 '연애박사' 10월 공개

쪽대본과 밤샘 촬영을 거부하며 배우와 스태프의 기본권을 지켰던 안판석 감독이 12일 별세했다. 고인은 폐암과 뇌출혈 투병 중에도 차기작을 준비했으나 향년 64세로 숨을 거두었으며 유작인 연애박사는 10월 공개될 예정이다. 하얀거탑, 밀회 등 사회적 메시지와 인간 중심의 서사를 담은 다수의 명작을 남기며 한국 드라마계의 거장으로 추앙받았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제작발표회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바로보고 있는 안판석 감독과 배우 손예진 / 사진=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제작발표회에서 다정하게 서로를 바로보고 있는 안판석 감독과 배우 손예진 / 사진=JTBC

"인권이 있는 현장이었습니다."

지난 2018년 열린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여자’ 제작발표회.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 손예진은 이렇게 말하며 "앞으로 다른 감독님이랑 (촬영을) 못 할 것 같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이건 입바른 소리가 아니다. 굳이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유명 배우가 이런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다. 그동안 그와 일했던 다른 연출가들을 서운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손예진이 이렇게 이야기한 것은 ‘진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진심은 다른 배우들에게서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입을 모아 감사함을 표하는 대상은 12일 숨진 ‘드라마의 거장’ 안판석 감독이다.

안 감독은 지난 12일, 향년 64세로 숨을 감았다. 지난 2025년 폐암 진단 후 투병해왔으며, 최근에는 뇌출혈까지 겹쳤다. 그 사이에도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차기작 ‘연애박사’를 만들던 그는 결국 회복하지 못했다. 오는 10월 공개되는 ‘연애박사’는 안 감독의 유작이 됐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제작발표회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안판석 감독과 배우 손예진·정해인 / 사진=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제작발표회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안판석 감독과 배우 손예진·정해인 / 사진=JTBC

사전제작시스템이 도입되기 전, 드라마 제작 시장은 ‘야생’이었다. 쪽대본과 밤샘 촬영이 난무했다. 밥 때도 지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그래도 묵묵히 기다렸다. ‘그래도 되는 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이다 보니 욕설과 고성이 오가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겪었다는 토로로 수두룩하다.

그 시기를 관통한 안 감독은 달랐다. 쪽대본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자정을 넘어서까지 촬영하는 경우도 거의 없었다. 배우들이 현장에 있다는 것은, 스태프들도 모두 현장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의미다. 안 감독은 그들 모두의 기본권을 챙겼다. 그래서 그는 추앙받았다.

하지만 인간 됨됨이 만으로 안 감독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야기꾼’으로서도 그는 탁월했다. 시류에 휩쓸리는 자극적인 소재는 오히려 배제했다. 안 감독이 펼치는 이야기의 중심에는 항상 ‘사람’이 있었다. 그 어떤 환경 속에 놓이더라고 그 환경을 조성하고, 또 적응하며 개선해 나가는 주체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배우 최진실, 손창민 등이 주연을 맡은 1999년작 ‘장미와 콩나물’은 ‘장밋빛 젊음이 결혼 후 콩나물처럼 변해가는 여자들의 인생 이야기’다. 그 시기에는 여성 서사도 드물었다. 그래서 가부장적 현실을 꼬집는 동시에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힘을 얻었다. 이를 한층 더 발전된 형태로 보여준 작품이 제목부터 의미심장한 ‘아줌마’였다. 전업주부 역을 맡은 배우 원미경의 연기가 돋보인 작품이다.

고(故) 안판석 감독 / 사진=스타뉴스 DB
고(故) 안판석 감독 / 사진=스타뉴스 DB

안 감독은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데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를 명감독의 반열에 올린 드라마 ‘하얀거탑’은 명작 중 명작으로 꼽힌다. 한 남자의 지독한 욕망을 의료계의 계급·권력 갈등과 결합시켜 제시한 메시지는 웅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이 작품을 통해 배우 김명민은 ‘명민좌’라는 별명을 얻으며 연기파 배우로 거듭났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적절히 활용한 ‘아내의 자격’, ‘밀회’, ‘풍문으로 들었소’는 안 감독의 ‘계급 3부작’으로 불린다. 불륜이라는 소재를 차용했지만, 그 안에는 기득권층의 욕심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교육을 통해 인생을 바꾸려는 이들의 강남 교육열을 꼬집은 ‘아내의 자격’, 예술대학을 둘러싼 비리와 부조리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밀회’, 법조계의 카르텔과 민낯을 블랙코미디 형태로 꾸짖는 ‘풍문으로 들었소’는 안 감독의 깊이와 품격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그런 안 감독이 말랑말랑한 멜로에 손을 댔을 때, 세상은 또 한번 놀랐다. ‘밥 잘 사주는 예쁜 여자’는 연상녀 연하남 커플이 늘어나는 세태 속에서 남녀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렸고, ‘봄밤’에 이어 학원가 강사들을 내세운 ‘졸업’으로 또 한번 건재함을 알렸다.

이야기꾼으로 살아가는 내내, 안 감독은 ‘자신만의 세상’에 갇히지 않았다. 이성적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되, 그 온도는 따뜻했다. 극사실주의적 연출로 판타지보다는 현실에 발을 내딛고 있지만, 무엇보다 그 현실에 온기를 넣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앞서 손예진의 칭찬에 안 감독은 "인간의 마음을 좋게 바꾸려고 하는 드라마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리고 그게 연출자로서 자신이 가진 사명감이라고 말했다.

2026년 8월 12일, 우리는 대단히 따뜻한 이야기꾼을 잃었다.

윤준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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