쇠락하던 스페인 조선·철강업체들의 변신..풍력 키워 지역산업 떠받쳤다[르포]

쇠락하던 스페인 조선·철강업체들의 변신..풍력 키워 지역산업 떠받쳤다[르포]

빌바오(스페인)=김지현 기자
2026.10.11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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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력 '메카' 바스크]②바스크주 풍력산업 현장 방문..빌바오항 중심으로 150개 풍력 밸류체인 기업 형성
민관 협력 통해 조선·철강 제조사들 성공적 전환..전통 제조업 경쟁력 있는 한국에도 시사점

지난 2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바스크주에 위치한 빌바오항에 컨테이너 박스들이 쌓여 있다 /사진=김지현 기자
지난 2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바스크주에 위치한 빌바오항에 컨테이너 박스들이 쌓여 있다 /사진=김지현 기자

지난 2일(현지시간) 찾은 스페인 북부 바스크주의 빌바오항. 부두에 들어서자 거대한 풍력발전기 블레이드와 타워가 곳곳에 쌓여 있었다. 바다에서는 화물을 실어 나르는 선박들이 쉴 새 없이 오갔다. 총면적 430헥타르(약 130만750평), 부두 길이만 22㎞에 달하는 빌바오항에는 매년 선박 3000척과 화물열차 4000편, 트럭 150만대가 드나든다. 욘 아나사가스티 빌바오항 사업개발·복합운송 총괄은 "이곳이 바로 유럽 풍력발전의 물류 허브"라며 "지멘스가메사나 베스타스 등 글로벌 기업들이 각종 부품을 이곳에 보관한 뒤 세계 각지로 보내고 있다"고 전했다.

스페인 지역에서 풍력 기자재를 수출하는 사실상 유일한 항구인 빌바오항의 풍경은 '글로벌 풍력의 메카'로 불리는 바스크주의 산업 지형을 압축해 보여주고 있다. 빌바오항 전체 면적의 38%가 풍력산업에만 활용될 정도다. 바스크주에는 지멘스가메사·이베르드롤라 등 풍력 관련 기업 150여곳이 몰려 있고 종사자는 약 5100명이다. 블레이드를 제외한 모든 풍력 기자재를 지역 내에서 생산할 수 있을 만큼 촘촘한 밸류체인(가치사슬)도 구축돼 있다. 항구를 중심으로 기자재 생산과 물류, 수출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생태계가 형성된 셈이다.

지난 2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바스크주에 위치한 빌바오항에 해상풍력 주요 부품 중 하나인 타워가 늘어서 있다 /사진=김지현 기자
지난 2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바스크주에 위치한 빌바오항에 해상풍력 주요 부품 중 하나인 타워가 늘어서 있다 /사진=김지현 기자

글루알·슬링신트 등 대표적…풍력 매출 비중 매년 확대

바스크주 풍력산업 개요/그래픽=김현정
바스크주 풍력산업 개요/그래픽=김현정

처음부터 바스크주가 풍력산업의 중심이었던 것은 아니다. 과거 이 지역을 먹여 살린 건 조선과 철강산업이었다. 하지만 한국·중국·일본 등이 빠르게 따라잡으면서 전통 제조업은 쇠락하기 시작했다. 돌파구는 재생에너지에서 보였다. 조선·철강 기업들이 보유 기술력을 활용할 수 있는 풍력산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풍력 기자재 생산에 필요한 용접·단조·금속가공 등의 기술이 기존 산업과 연결될 수 있어서다.

1969년 설립된 바스크 기업 '글루알 그룹'이 대표 사례다. 수력발전용 유압 기술을 주력으로 하던 이 회사는 1990년대 초 풍력터빈용 유압 시스템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현재 전세계 9개 생산공장을 운영하며 80여개국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고, 글로벌 주요 터빈 제조사를 대상으로 최대 11㎿(메가와트)급을 포함해 총 50GW(기가와트)가 넘는 육상·해상 풍력터빈에 제품을 수출했다. 앞서 지난 1일(현지시간) 만난 알라즈네 사발레타 글루알 대표는 "유압 기술이 실제로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수력에서 풍력으로 전환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며 "현재 풍력사업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약 35%까지 늘었다"고 소개했다.

항만에서 화물을 옮겨 싣는 인양 장비를 생산하던 '슬링신트'도 풍력으로 사업 기회를 넓힌 기업 중 하나다. 40년 넘게 축적한 인양 기술을 활용해 풍력 전용 인양 장비를 개발했고, 현재 지멘스가메사·제너럴일렉트릭(GE) 등 글로벌 주요 풍력터빈 제조사에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현재 회사 전체 매출에서 풍력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80%에 달하고 있다.

발전단지 없이 산업 확장…민관 협력이 이룬 성과

지난 1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지역에 위치한 바스크 기업 슬링신트에서 작업자가 풍력발전기 기자재 중 하나인 허브를 제작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풍력산업협회
지난 1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지역에 위치한 바스크 기업 슬링신트에서 작업자가 풍력발전기 기자재 중 하나인 허브를 제작하고 있다/사진제공=한국풍력산업협회

이렇게 바스크가 세계적인 풍력산업 거점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유럽 전역의 풍력발전 수요에 더해 주정부와 기업의 체계적인 협력이 있었다. 지역 내 발전 수요에 기대기보다 민관이 힘을 합쳐 유럽 시장을 공략하는 산업 기반을 구축한 것이다.

민관 협력의 토대는 1991년 시작된 클러스터(복합단지) 정책이다. 기업과 기술센터, 행정기관을 하나로 묶은 '에너지 클러스터'를 중심으로 기업 간 협업과 기술 개발을 추진했다. '하시텍'과 '엘카르텍' 등 지원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과 연구기관의 공동 연구개발(R&D)에 자금을 꾸준히 투입했고, 바스크 무역투자청은 기업의 해외 진출과 네트워크 구축을 도왔다. 지난 30년간 빌바오항에 투입된 투자금 35억유로(약 5조2700억원) 중 10억유로(1조5000억원) 역시 공공 부문에서 나왔다.

일각에서는 지멘스가메사와 이베르드롤라 등 풍력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춘 대기업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산업이 성장했다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이들 기업의 존재만으로 지금과 같은 생태계를 구축하기는 어려웠다는게 현지 업계의 평가다. 산업 발전 초기 지멘스가메사와 이베르드롤라가 협력하는 과정에서 공작·산업용 기계 등을 제작하던 지역 중소기업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에너지 클러스터는 이 과정에서 기업 간 지식과 기술 교류를 지원했다. 기존 대기업이 바스크주에 남을 수 있도록 조세 혜택 등 주정부 차원의 지원도 이어졌다.

신생 기업 생겨나…"한국도 풍력산업 경쟁력 충분"

지난 1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지역에 위치한 바스크 기업 키무와에서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풍력산업협회
지난 1일(현지시간) 스페인 북부 지역에 위치한 바스크 기업 키무와에서 직원들이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제공=한국풍력산업협회

현재는 기업을 대상으로 어떤 기술이 중요하고 유망한지 가이드라인과 구체적인 로드맵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바스크 기업들이 '전환형 프로젝트'에 지원하면 정부가 프로젝트를 선정해 보조금이나 자금을 지원한다. 안데르 곤잘레스 에르난데스 바스크주 에너지 클러스터 국제협력 총괄은 "많은 기업이 이런 방식을 통해 사업을 전환했다"며 "기업들이 새로운 비즈니스 관계를 만들고 실제 상업적 계약이나 협약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탄탄한 밸류체인을 기반으로 신생 기업도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국내 전남해상풍력 1단지 건설에 참여했던 '키무와' 역시 14년 전에 설립된 업체다. 부유식 해상풍력용 커넥터 제조 스타트업 '디트렐'의 본 레레아 아스토비사 최고기술책임자(CTO)는 "바스크 무역투자청의 소개로 한국의 LS전선·대한전선(28,100원 ▼1,700 -5.7%)과도 접촉할 수 있었고 협력 요청을 받았다"고 말했다.

바스크주의 사례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 역시 조선과 철강 등 유사한 제조업 기반을 갖추고 있어서다. 현장에서 만난 기업 관계자들도 대부분 한국 기업이 풍력산업에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추고 있다고 평가했다. 알라즈네 대표는 "한국은 풍력산업에 필요한 기술과 인프라를 모두 갖추고 있다"며 "해상풍력 확대를 추진하는 만큼 국가 차원에서 전략적인 에너지 믹스를 구축하기 위한 선택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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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현 기자

안녕하세요. 머니투데이 산업1부 김지현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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