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 窓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이 열립니다. 음악과 문화, 책이야기 등 부드러운 이야기로 세상을 들여다 봅니다.
총 1,261 건
AI 시대 신고전영화 반열에 오른 '그녀'(Her·2014년)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지만 질문에 관한 영화다. 테오도르는 남의 연애편지를 대필하지만 정작 자신의 연애편지를 쓸 사람이 없다. 우연히 인공지능 OS(운영체제) 사만다를 알게 되고 마침내 사랑에 빠진다. 언제나 먼저 질문을 하는 사람은 테오도르다. 테오도르는 마침내 사만다에게 동시에 대화하는 사람과 사랑하는 사람의 숫자를 묻는다. 사만다는 각각 8316명과 대화하고 614명과 사랑을 나눴다고 답한다. 오로지 한 사람의 사랑을 원한 테오도르는 크게 각성한다. 사만다는 거꾸로 테오도르에게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테오도르와만 사랑을 나누는 데 대한 의지가 없다. AI는 사람에게 질문하지 않고 질문에 답할 뿐이다. 혹 질문을 할 수는 있지만 형식적이라 정말 궁금하거나 알려는 의도는 없다. 르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며 인간의 본질을 이성, 즉 지능에 뒀다. 생물학 연구의 성과가 축적되면서 지능은 인간에게만 있지 않았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으로 만든 것은 질문이다.
"교수님, 이거 대상포진 맞죠? AI가 그렇게 얘기해서 왔어요. " 환자는 의자에 앉기도 전에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진료는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진단은 벌써 끝나 있었다. 화면 속 피부에는 붉은 반점과 좁쌀만 한 돌기가 모여 있었다. 다음 화면에는 AI(인공지능)의 답변을 갈무리한 글이 떴다. 군집된 붉은 구진, 한쪽에 국한된 병변, 대상포진 가능성, 신경통 후유증. 필요하면 입원할 수도 있다는 설명까지 붙어 있었다. 그는 야외에서 운동한 뒤 등과 가슴이 따갑고 가려워졌다고 했다. AI와 상담한 뒤로는두려움에 잠을 설쳤다고 했다. 직접 살펴보니 땀이 차기 쉬운 곳에 자잘한 붉은 돌기와 긁은 자국이 흩어져 있었다. 통증보다는 가려움이 심했고, 증상이 한쪽에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땀띠 같은 겁니다. " "땀띠요? 이게요?" 환자의 표정이 묘해졌다. 고작 땀띠라니. AI는 어려운 의학 용어를 동원해 입원 가능성까지 알려 주었는데, 내 대답은 너무 짧고 시시했던 셈이다. 나도 교과서 속 병명을 몇 개 꺼내 길게 설명할 수는 있었다.
대학에서 경제사를 공부할 때 이해하기 힘든 학자가 한 명 있었다. 바로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다. 산업혁명의 한복판을 살았던 그가 왜 뜬금없이 태양 흑점으로 경기변동을 설명하려 했을까. 당시 농업의 비중이 컸기에 기후와 작황의 영향을 중시한 측면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가 흑점보다 '주기(Cycle)'를 보았다는 점이다. 그는 호황과 불황이 왜 반복되는지 그 파동을 집요하게 추적한 경제학자였다. 태양흑점설에 앞서 1865년 제본스는『석탄 문제』에서 산업혁명의 거대한 흐름을 읽어냈다. 증기기관의 연료효율이 좋아지면 석탄 소비가 줄 것이라는 우려가 컸지만 현실은 반대였다. 동력비용이 낮아지자 증기기관은 공장·철도·선박으로 퍼졌다. 영국 석탄 생산량은 1854년 6470만 톤에서 1913년 2억8700만 톤으로 4배 넘도록 늘었다. 소위 '제본스의 역설'이다. 그러나 석탄 소비의 장기 추세가 우상향한다고 그 길의 모양까지 직선은 아니었다. 경기와 전쟁, 공급제약에 따라 석탄가격도 급등락을 반복했다.
전기요금이 다시 중요한 경제 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안정적인 전력공급과 적정한 전기요금은 오래된 정책과제이지만, 최근 이를 둘러싼 여건은 한층 복잡해지고 있다. 전력수요가 빠르게 늘어나는 가운데 에너지전환을 위한 발전설비와 전력망, 저장장치 등에 대한 대규모 투자도 동시에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력공급의 안정성과 에너지전환을 위한 투자를 지속하면서도 전력시스템 전반의 비용을 낮추고, 그 부담이 소비자에게 과도하게 전가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과제는 이미 주요국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영국의 사례는 발전비용의 하락이 반드시 전기요금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보여준다. 영국의 전기요금이 유럽 내에서도 높은 수준을 보이는 데에는 가스발전의 한계비용이 전력시장 가격을 좌우하는 시장구조가 크게 작용하고 있다. 이 때문에 풍력과 태양광의 발전비용이 낮아졌음에도 그 혜택이 소비자에게 충분히 전달되지 못하고, 소비자는 여전히 높은 가스가격이 상당 부분 반영된 전기요금을 부담하고 있다.
한때 지구 온난화가 음모론이라는 주장이 있었다. 그런 의견을 대변하는 학자나 정치인들도 있었는데, 대체로 그들은 탄소를 배출하는 기업체로부터 후원금을 받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네팔의 빙하가 무너져 일어난 대참사와 국토가 물에 잠겨가는 투발루의 비극을 보면 지구상의 환경과 기후는 온갖 조건이 맞물려 유기적으로 변화해 가는 살아 있는 생명체 같다는 생각이 든다. 때로는 기후가 이렇게 쉽게 바뀌는 것인가 싶기도 하고, 지난 백 년간 인간이 기후에 끼친 영향을 생각하면 어떤 면에서는 대단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지구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그리 큰 변화나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다만 긴 순환과 변화의 타임라인에 맞춰 진화해 온 생명체들은 멸종을 맞이하게 된다. 어쩌면 인간은, 특히 자본과 기술을 축적하며 환경 변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쳐온 국가들은 악착같이 살아남을지도 모른다. 참으로 잔인하고 무책임한 이 결말이 역설적으로 자연의 이치 같기도 하다. 환경을 지키기 위해 들기 시작한 에코백은 어느새 패션 아이템으로 전락했다.
가을이 깊어지면 서점과 언론에는 어김없이 독서에 관한 이야기가 늘어난다. 그런데 요즘 풍경은 사뭇 낯설다. 책을 온전히 독파하는 사람보다 책의 분위기를 즐기는 방식들이 회자된다. 며칠 전 문학 작품의 표지를 입힌 편의점 빵이 인기라는 기사를 읽었다. 이른바 '텍스트힙(Text-hip)'이다. 책이 읽는 대상을 넘어 하나의 매력적인 이미지로 포장되고, 그에 맞춰 하나의 유행하는 소비 경험이 된다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인터넷 서점에서 사 모은 아기자기한 굿즈들이 처치곤란한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흥미로운 것은 책이라는 사물에 대한 감각적 향수가 실물 책이 일상에서 빠르게 사라져가는 시점에 더욱 강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사라져갈 때 비로소 그 물질성이 도드라지는 법이다. 디지털 화면의 세계가 처음 열렸을 때,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원형은 다름 아닌 종이책과 서재였다. '데스크톱', '폴더', '파일', '문서'라는 명칭은 책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인류의 오랜 지식 체계를 고스란히 화면 위로 옮겨온 흔적이었다.
미국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생 래리 페이지는 학위연구로 개발한 검색 알고리즘 '페이지랭크'를 100만달러(약 13억8000만원)에 팔고자 포털들에 제안했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대학원을 휴학하고 직접 회사를 차렸고, 특허는 대학에 남겼다. 훗날 그 회사가 세계적인 기업 구글로 성장하면서 대학이 라이선스 대가로 받은 주식은 2005년 3억3600만달러(약 4631억원)의 연구 재원이 됐다. 연구자는 기업가가 되고, 대학은 연구비를 얻었으며, 시장은 혁신을 누렸다. 실험실 창업이 만드는 선순환의 전형이다. 우리에게도 이런 장면은 낯설지 않다. 박사학위가 곧 교수직으로 가는 티켓이었던 1989년, 서울대 박사 변대규는 동료들과 창업해 매출 1조원의 '휴맥스'를 일궜고, 1997년 카이스트 박사과정생 김영달은 세계적인 디지털 영상저장장치 기업 '아이디스'를 세웠다. 2000년대에는 교수들도 벤처 열풍에 나섰다. 서울대 서정선 교수의 '마크로젠'은 바이오 벤처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했고, 포스텍 성영철 교수의 '제넥신'은 한때 시가총액 2조원을 넘겼다.
AI의 미래를 두고 숨가쁜 논쟁이 펼쳐지고 있다. AI 연구진과 기업 경영자에 이어 미국과 중국 현직 최고 지도자까지 가세했다. 먼저 실무 연구진. 앤트로픽의 연구원 제이콥 콕슨은 지난 8일 회사를 떠나며 충격적인 경고를 내놓았다. 지금의 AI 개발 경쟁이 계속된다면 AI가 "2030년까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앤트로픽 CEO 다리오 아모데이는 한발 더 나아갔다. 그는 12일 '프런티어 AI의 속도를 조절해야 한다'며 최첨단 AI 모델의 능력 향상 속도를 늦추자고 제안했다. 샘 올트먼과 일론 머스크 등도 이 논의에 호응했다. 이들 세사람은 속도조절론이 부각되기 전부터 'AI 글로벌 표준기구 설립'을 물밑에서 논의해 왔다는 보도도 나왔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전혀 다른 장면이 펼쳐졌다. 13일 인도 뉴델리 BRICS 정상회의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BRICS AI 오픈소스 공동체 구축'을 제안하며 중국이 관련 생태계 구축에 적극적인 역할을 하겠다는 구상을 내놓았다. 그러자 트럼프대통령은 14일 AI 속도조절론을 강하게 비판하며 중국과의 AI 경쟁에서 물러설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앤트로픽의 '클로드 페이블 5. 1', 오픈AI의 'GPT-6 아스트라'까지, 9월은 최신 모델 출시 소식으로 시작됐다. 오픈AI는 이 모델 하나에 GPU 10만 대를 쏟아부었다. 새 모델에 대한 감탄과 해설이 빠르게 쏟아진다. 단순한 성능 개선을 넘어 며칠짜리 작업도 혼자 끝내는 '에이전트(Agent)'의 등장, AGI(범용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다는 찬사까지 이어진다. 이런 급격한 변화의 시기일수록 다른 나라의 방향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눈여겨볼 만한 사례다. 30년 전인 1995년, 프랑스는 우리 사회에 묵직한 화두를 던졌다. 고(故) 홍세화 선생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한국 사회를 강타하며 '똘레랑스(tolerance)'라는 프랑스어를 유행시켰다. 필자도 그 유행에 휩쓸려 책을 손에 들었다. 그 시절 한국인에게 프랑스는 관용과 자유의 나라로 각인됐다. 30년이 흐른 지금, 프랑스는 우리에게 또 다른 화두를 던진다. 이번엔 사회문화가 아니라 기술패권과 리더십의 승부다. 바로 '소버린AI(Sovereign AI)'다.
"AI 개발에 참여하고 돈을 버세요(Get paid to build AI). " 글로벌 휴머노이드 선도기업 피겨 AI가 지난 8월 말 오픈한 크라우드소싱 플랫폼 '인덱스(Index)'의 도발적인 슬로건이다. 참가자가 헤드마운트를 착용하고 생활하는 것만으로 가사·사무·제조 전반의 시선과 손끝 궤적이 신체 행동 데이터로 축적된다. 이 실험이 성과를 거두자 피겨 AI는 향후 1년간 데이터와 컴퓨팅에 10억 달러(약 1조 4000억원)를 투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투자의 본질은 데이터를 쏟아부어 성능을 끌어올리는 '스케일링 법칙'을 피지컬AI에서도 관철하겠다는 것이다. 웹상의 3인칭 관찰 영상만으로는 물리 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로봇의 미세한 힘조절과 물리법칙을 온전히 학습시킬 수 없다. 시각 정보와 신체 행동이 일체화된 1인칭 데이터를 선점해 '피지컬AI의 챗GPT 모멘트'를 열겠다는 계산이다. 물리 데이터 확보전은 이미 국가 차원의 인프라 경쟁으로 격화되었다. 미국이 구글과 앱트로닉처럼 빅테크와 스타트업이 손잡는 '로봇 파크' 생태계를 구축해 기업연합 전선을 펴는 반면, 중국은 70여 곳의 데이터 공장에 40여 곳을 증설하며 국가 주도의 기반을 다지고 있다.
1990년대 중반, 첫 직장인 산업은행 시절의 일이다. 함께 일하던 과장님은 명문 상업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분이었다. 사모님도 여자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은행에 다니셨다. 형편이 넉넉한 집에서 자랐다면 명문대 커플이 되었을, 실력과 인품을 두루 갖춘 분들이었다. 함께 일한 지 반년쯤 지난 어느 날, 과장님이 팀원들을 집들이에 초대하셨다. 강북의 작은 새 아파트에 둘러앉은 그날, 다른 이야기는 다 잊었는데 세 형제의 막내였던 그분의 한마디만은 지금도 생생하다. "내 평생 처음으로 우리 집을 가져봅니다. " 오랜 셋방살이 끝에 마련한 첫 집이었다. 형 들을 대학에 보내려 자신은 상업고등학교를 택했던 분의 담담한 그 말에, 긴 세월의 인내와 성취감이 담겨 있었다. 30년 전 과장님 집들이의 추억은 한국 사회에서 '내 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정책 당국자에게 주택은 수급 곡선이나 규제 비율, 투기 억제의 대상일지 모른다. 그러나 대다수 국민에게 집은 투자 자산 이전에, 눈치 보지 않고 쉴 수 있는 안식처이자 오랜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다.
최근 정부가 발표한 'AI 기본의료 전략'은 무척 전향적이다. 의료AI를 산업으로 키우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국민이 누려야 할 의료 인프라로 만들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칼럼에서 필자는 이 전략이 한국 의료와 의료AI 산업의 게임 체인저가 될 수 있으며, 남은 숙제는 예산이라고 썼다. 이제 그 예산안이 나왔다. 의료AI는 보건산업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다. 의사가 부족한 지역병원에서 응급환자를 선별하고, 영상판독을 돕고, 환자를 적절한 병원으로 의뢰·회송하는 데 쓸 수 있다. AI가 의사 부족 자체를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부족한 의료진의 역량을 넓히고 지역 의료의 효율을 높이는 데는 기여할 수 있다. 지역·필수·공공의료의 공백을 메울 현실적인 수단인 셈이다. 2027년도 보건복지부 예산안, 즉 정부안에는 취약지 일차의료 AX 패키지, 응급 AI 플랫폼, 개인건강기록 기반 AI, 의료영상 공유, 국가 보건의료데이터 허브 등이 담겼다. 방향은 옳다. 그런데 규모를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개인건강기록 기반 AI와 의료영상 공유에 387억원, 데이터 허브와 소버린 AI에 349억원이 편성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