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함에 그려진 '구렁이' 가까이서 보니…'한글'로 생태계 지키는 작가

명함에 그려진 '구렁이' 가까이서 보니…'한글'로 생태계 지키는 작가

최문혁 기자
2026.10.09 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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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생물그림작가' 진관우 숨탄것들 대표 작가 인터뷰
제인 구달 박사와의 3차례 만남…'한글생물그림작가'로 이어져

진관우 작가(27)가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 호사비오리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본인 제공.
진관우 작가(27)가 멸종위기 야생동물 1급 호사비오리 그림을 설명하고 있다./사진=본인 제공.

"이름을 기록해야 기억할 수 있습니다. 기억에서 잊히면 멸종했다는 사실 자체도 알 수 없으니까요."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만난 진관우 숨탄것들 대표 작가(27)는 이렇게 말했다. 이날 세종대왕 동상 앞에는 한글날 제정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지난해 한글날에는 진 작가도 이곳에 '세종대왕'이라는 4글자로 그린 세종대왕 어진을 전시했다.

진 작가는 멸종위기 동물의 이름을 한글로 써서 해당 동물의 형상을 그리는 '한글생물그림작가'다. 그는 2023년 국립생태원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다. 이날 그가 건넨 명함에는 멸종위기 야생생물 2급인 구렁이가 그려져 있었다. '구렁이'라는 세 글자를 가득 채워 그린 그림이다.

진 작가가 지금까지 그린 한글생물그림은 500여점에 달한다. 반달가슴곰과 시베리아호랑이, 혹등고래 등 다양한 동물의 이름이 작품에 담겼다. 그는 한글의 구조적 특징이 다른 언어보다 동물의 생김새를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설명했다.

진 작가는 "한글 모음에는 직선이 많아 동물의 털을 표현하기 좋다"며 "특히 영어와 달리 받침이 있어 좌우상하 모든 방향으로 늘리고 변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진 작가가 한글생물그림작가가 되기까지는 세계적인 영장류학자 고(故) 제인 구달 박사의 영향이 컸다. 진 작가는 2017년과 2019년, 2023년 구달 박사와 세 차례 만났다. 특히 2019년에는 생명다양성재단 한국 대표로 영국 윈저성에 초청돼 구달 박사와의 면담 시간도 가졌다.

당시 입대를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던 진 작가에게 구달 박사는 "한국 남성들은 1년6개월 동안 군대에 간다고 들었다"며 "한정된 환경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귀국 후 입대를 한 달여 앞둔 어느 날 진 작가는 반달가슴곰을 그리다 우연히 한글과 동물의 접점을 발견했다. 반달가슴곰의 귀가 한글 자음 'ㅂ(비읍)'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면서다. 진 작가는 "그 우연한 계기로 한글로 동물들을 그리자는 생각을 했다"며 "군 생활 동안 틈틈이 약 200점의 한글생물그림을 그렸다"고 말했다.

2022년 전역한 그는 '숨탄것들'을 설립하고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숨탄것'은 숨을 쉬며 살아 움직이는 생물을 뜻하는 순우리말이다.

진 작가가 멕시코 한 숙박업체 벽면에 그린 한글생물그림 벽화./사진=본인 제공.
진 작가가 멕시코 한 숙박업체 벽면에 그린 한글생물그림 벽화./사진=본인 제공.

한글과 말라가시어로 그린 카멜레온…"한글과 동물을 함께 알리고 싶어요"

진 작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글생물그림 수업./사진=본인 제공.
진 작가가 마다가스카르에서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글생물그림 수업./사진=본인 제공.

진 작가는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8월까지 전세계 42개국을 여행했다. 각국을 돌며 한글과 멸종위기 동물을 알리는 활동을 이어갔다.

멕시코에서는 숙소 주인의 부탁을 받고 숙소 벽면에 한글생물그림을 그렸다. 현지인들도 그림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동물의 이름을 한글과 스페인어로 함께 표현했다. 진 작가는 "벽화를 그려준 대가로 숙소에 나흘 더 머무를 수 있었다"며 웃었다.

마다가스카르에서는 현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글생물그림 수업을 진행했다. 참가자들은 한글 '카멜레온'과 현지 언어인 말라가시어 'Tanala'를 활용해 카멜레온을 그렸다.

진 작가는 "멸종위기 동물을 보호하려면 해당 동물이 서식하는 지역사회의 역할이 중요하다"며 "한글과 멸종위기 동물을 함께 알릴 좋은 기회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한글을 배우고 싶어 하는 외국인도 많아져 한글은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앞으로는 장애인 비하 표현이 포함된 동물 이름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탤 계획이다. 과거에는 동물의 특징을 묘사한다는 이유로 차별적 표현을 이름에 사용하는 일이 적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앉은뱅이', '곰보병신옆새우', '벙어리뻐꾸기'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학술적으로 정식 기재된 이름을 바꾸는 일은 간단치 않았다. 연구자가 새로운 연구를 거쳐 논문으로 발표하는 등 학술적 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진 작가는 "당시엔 괜찮았을지 몰라도 시대의 인식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며 "여러 방법으로 접근해 볼 계획"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돌아가신 제인 구달 박사님처럼 생태계 보전을 위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세계적인 스피커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수업에 참가한 학생이 직접 한글과 말라가시어로 그린 카멜레온 그림./사진=본인 제공.
수업에 참가한 학생이 직접 한글과 말라가시어로 그린 카멜레온 그림./사진=본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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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혁 기자

머니투데이 사회부 사건팀 최문혁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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