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 개소 20주년
중형급 사이클로트론, 저·중·고 전자선 시설 보유한 국내 유일 시설
국내 첫 코스닥 상장 연구소 기업도 배출
정병엽 소장 "뻔한 연구 안 해…국민 도움된다면 무엇이든 도전"

"어, 진짜 악취가 사라졌네요?"
오물로 가득 찬 원통에 공기 팩을 갖다 대고 냄새를 '뽑아'왔다. 가축 분뇨와 음식물 쓰레기가 섞인 듯한 강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한참 코를 막고 서 있는데, 연구자가 또 다른 공기 팩을 내밀었다. 악취 제거 시스템으로 냄새를 정화했으니 한 번 맡아보라고 했다. 미심쩍은 마음으로 다시 코를 갖다 댔다. 사실이었다. 독한 분뇨 냄새는 사라지고, 살짝 시큼한 물 향기만 은은히 남았다.
지난달 29일 빙문한 전북 정읍 한국원자력연구원 첨단방사선연구소의 전자선실증연구동이다. 전자선은 전자총(Electron Gun)으로 전자를 발생시킨 뒤, 고전압 환경에서 빠르게 가속해 물질에 쏘는 방사선이다. 물질에 들어간 방사선은 물질의 분자구조를 바꾸거나, 미생물을 완전 사멸시킨다.

분뇨 악취가 감쪽같이 사라진 것도 이 때문이다. 200keV(킬로전자볼트) 저에너지 구간에 해당하는 전자가속기에서 전자를 가속한 뒤 악취를 일으키는 물질에 쏜다. 방사선에 의해 악취 원인 물질의 분자 결합이 파괴되고, 자연스럽게 냄새도 사라진다. 이 과정에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김병남 방사선융합연구부 책임연구원은 "악취의 농도에 구애받지 않고, 기타 화학약품이 들어가지 않아 2차 오염도 발생하지 않는다"고 했다.
산업·축산 현장에서 발생한 악취를 제거하는 첨단방사선연구소의 이 기술은 삼성전자(267,250원 ▼1,250 -0.47%), 삼성디스플레이 현장에 적용됐다. CJ제일제당 부산공장에서도 실증실험을 준비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개소 20주년을 맞이한 첨단방사선연구소는 이처럼 산업계와 가장 밀접한 실용 기술을 선보여 온 대표 연구 시설이다. 기술 이전 및 산업 현장 실증 뿐 아니라 연구소 기업도 여러 개 배출했다. 원자력연 연구소 기업 12개 중 8개가 이곳 정읍에서 나왔다. 2015년 연구소 기업 최초로 코스닥에 상장한 콜마비앤에이치(7,860원 ▲10 +0.13%)가 첨단방사선연구소에서 출발했다. 프로폴리스 제품으로 잘 알려진 '서울프로폴리스', 보톡스 필러를 제조하는 '라비'도 이곳 출신이다.
지금도 연구소 내 'ARI 실용화 연구동'에는 16개 기업이 입주해 100% 자리를 채운 상태다. 정병엽 소장은 "정읍에 처음 오신 분들은 이렇게 인프라도 없는 시골에 왜 스타트업들이 가득 차 있냐고 물어본다. 이유는 하나다. 대한민국에서 방사선 관련한 일을 하려면 이곳에 있는 게 가장 유리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방사성동위원소 국산화에 이어 해외 수출도 달성했다. 연구소에는 국내 기술로 개발한 첫 중형급 사이클로트론이 있는데, 1.5V(볼트) 건전지 2000만개에 해당하는 30MeV(3000만 전자볼트)까지 수소 입자를 가속하는 시설이다. 이를 통해 전량 수입에 의존하던 항체면역 연구용 '지르코늄-89'(Zr-89)를 국산화하는 데 성공했다. 현재 서울대병원, 서울아산병원 등 의료기관에 정기 공급하고 있다. 뒤이어 신경교종암 진단용 '저마늄-68'(Ge-68)과 치료용 동위원소 '구리-67'(Cu-67)도 나왔다. Zr-89와 Ge-89는 2022년부터 미국, 중국, 남아공, 태국 등에 공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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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엽 소장은 "뻔한 연구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불가능해 보이는 기술이라도 국민의 삶과 국가 성장에 도움이 된다면 아주 낮은 가능성까지 도전하는 연구소가 될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