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임대의 역설
보증금이 14억원에 육박하는 장기전세주택이 등장하면서 무주택자의 주거 안정을 지원한다는 공공임대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높은 보증금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소득·자산 기준의 모순을 짚고 공공임대의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보증금이 14억원에 육박하는 장기전세주택이 등장하면서 무주택자의 주거 안정을 지원한다는 공공임대의 취지가 무색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높은 보증금과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는 소득·자산 기준의 모순을 짚고 공공임대의 개선 방향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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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강남권 장기전세주택 보증금이 14억원에 육박했다. 주변 전셋값에 연동해 공공임대 보증금도 5년 새 40% 가까이 뛰면서 최고액은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의 2배에 달했다. 입주자는 일정한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해야 하지만 보증금은 보유할 수 있는 자산의 2배를 웃도는 '공공임대의 역설'이 커지고 있다. 3일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 장기전세Ⅰ·Ⅱ 입주자 모집공고에 따르면 서초구 반포동 래미안퍼스티지 전용면적 84㎡의 보증금은 13억8840만원에 이른다. 2021년 모집 당시 10억100만원에서 5년간 3억8740만원(38. 7%)이 올랐다. KB부동산이 집계한 지난 8월 서울 아파트 평균 전셋값 7억1178만원보다도 6억7662만원(95. 1%) 비싼 수준이다. 보증금 10억원 초과 물량은 '장기전세Ⅰ' 82가구와 '장기전세Ⅱ'인 미리내집 89가구 등 총 171가구다. 일부 단지와 주택형이 겹치지만 SH는 각각 별도로 배정된 물량이라고 설명했다. 전체 171가구 가운데 168가구가 강남·서초구에 몰렸고 나머지 3가구는 양천구에 공급됐다.
서울 강남권 장기전세주택의 최고 보증금이 기본 총자산 기준의 2배를 웃돌면서 자격 요건과 실제 자금 조달 능력 사이의 괴리가 커지고 있다. 일정 수준 이하의 소득·자산 기준을 충족해야 신청할 수 있지만 정작 입주하려면 10억원이 넘는 목돈이 필요하다. 3일 서울주택도시개발공사(SH)가 지난달 낸 장기전세주택 입주자 모집공고에 따르면 래미안퍼스티지 전용면적 84㎡의 보증금은 13억8840만원으로 가장 높았다. 신청자는 총자산이 기본 6억6200만원 이하여야 하지만 요구되는 보증금은 이보다 7억2640만원 많다. 보증금이 총자산의 2. 1배에 달하는 셈이다. 총자산은 부동산과 금융자산, 자동차, 임차보증금 등을 합산한 뒤 금융기관 대출 등 인정되는 부채를 차감해 산정한다. 고액 보증금은 중대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전용 59㎡인 청담르엘과 래미안대치팰리스는 각각 11억7000만원, 래미안퍼스티지는 10억4520만원이다. 보증금 10억원 초과 물량도 빠르게 늘고 있다. 2021년 8월 모집 당시에는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84㎡ 1개 단지·5가구뿐이었지만 지난달 장기전세Ⅰ 공고에서는 6개 단지·82가구로 확대됐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A씨(30)에게 공공임대주택은 '그림의 떡'이다. 지방에서 올라와 대학 등록금 대출을 갚고 월세와 관리비, 생활비를 내느라 모아둔 자산은 많지 않다. 하지만 급여명세서상 소득은 공공임대 기준을 웃돈다. 소득만 보면 지원이 필요 없는 계층이지만 통장 사정은 여전히 사회초년생에 가까운 셈이다. A씨는 "서울에서 월세와 관리비를 내고 나면 지방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와 실질적인 가처분소득 차이가 크지 않다"며 "1인 가구 대상 임대주택은 물량도 적은 데다 소득이 높으면 후순위로 밀려 사실상 당첨되기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실제로 쥔 돈은 없는데 이용할 수 있는 주거복지 제도도 없다"고 토로했다. 현행 공공임대의 모순은 반대편에서도 나타난다. 쌍둥이 출산을 앞둔 B씨(38)는 소득과 자산 기준을 충족해 이달 청약 접수가 진행되는 장기전세주택Ⅱ(미리내집)에 지원할 수 있지만 보증금 때문에 신청을 포기했다. 디에이치 방배와 청담 르엘 등 강남권 신축 아파트의 보증금이 9억~12억원에 달해 현재 보유한 자금에 더해 약 4억원을 추가로 대출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
서울시와 서울주택도시공사(SH)는 고가 장기전세주택에 대한 우려를 인식하고 전문가들과 제도 개선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딜레마 또한 적지 않다. 강남권 임대보증금을 강북권 수준으로 낮출 경우 동일한 가격에 입지가 달라지는 '로또 전세'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그렇다고 비싼 보증금 논란을 피하기 위해 강남에 임대주택을 공급하지 않으면 다양한 계층이 어울려 거주하는 '소셜 믹스'(Social Mix) 취지가 약화할 수 있다. 전문가들은 현실적 대안으로 '전월세 전환'을 제안한다. 가처분소득은 높지만 목돈 마련이 어려운 고소득 신혼부부·청년층을 위해 전세 제도를 월세로 돌리자는 것이다. 실제 SH의 매입임대주택은 임대보증금의 최대 60%까지 월 임대료로 전환할 수 있다. 예컨대 보증금 100만원을 월세로 전환하고 월 임대료 2000원을 추가 납부하는 식이다. 전세 개념이 없는 영미권에서도 중산층 대상 공공임대주택은 소득에 연동된 월세 방식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가구소득의 약 30%를 주거비로 책정하는 미국 '근로자 주택'(Workforce Housing)이 대표적이다.
최근 강남권의 공공임대 주택의 보증금이 10억원대를 넘어서면서 '반쪽짜리 공공성' 논란이 커지고 있다. 공공임대 보증금을 시장가격에 연동해 책정하다 보니 시세보다 저렴하다는 장점보다 민간 임대시장의 시세가 오르면 입주자의 부담도 함께 커지는 약점이 더 부각되는 모습이다. 서울시가 미리내집을 중심으로 장기전세 공급을 확대할 계획인 만큼 공급량 못지않게 '시세 연동형 보증금'의 한계도 들여다봐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3일 서울시와 업계에 따르면 장기전세 보증금은 주변 전세 시세의 80% 이하 수준으로 책정된다. 공공이 임의로 가격을 정하는 것보다 객관적이고 시장가격과의 괴리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시장가격이 상승하거나 주변 전세가격이 높게 형성된 지역에서는 이 같은 방식이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 시세의 80%를 적용한다고 가정하면 인근 전셋값이 5억원일 때 보증금은 4억원이지만 전셋값이 10억원으로 뛰면 보증금도 8억원으로 높아진다. 할인율은 그대로지만 실제 부담액은 두 배가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