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터리 체크 포커스
배터리 산업은 한 때 '제2의 반도체'로 여겨졌다. 기업들은 수십조원을 투자해 전세계에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하지만 전기차 수요 부진과 중국의 굴기로 K배터리 밸류체인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터리 산업의 현주소와 미래 가능성을 진단해본다.
배터리 산업은 한 때 '제2의 반도체'로 여겨졌다. 기업들은 수십조원을 투자해 전세계에 생산거점을 확보했다. 하지만 전기차 수요 부진과 중국의 굴기로 K배터리 밸류체인은 위기에 직면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배터리 산업의 현주소와 미래 가능성을 진단해본다.
총 12 건
"우리는 방파제다. " 지난 4일 포스코퓨처엠 세종음극재공장에서 만난 구경모 세종음극재생산부장은 K배터리 생태계에서 포스코퓨처엠의 역할을 이렇게 정의했다. 중국 업체들이 글로벌 음극재 시장의 약 95% 를 차지하는 상황 속에서 국내에서 유일하게 천연흑연과 인조흑연 음극재를 모두 양산하는 기업의 결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그는 인터뷰를 하면서도 "배터리 핵심 소재인 음극재 국산화를 책임진다는 사명감"이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이날 찾은 2공장에서는 형광색 작업복을 입은 직원들이 제조동 사이를 분주히 오갔고, 설비 돌아가는 소리가 현장을 채웠다. 연산(연간생산량) 4만8000톤 규모 설비를 갖춘 이 공장에서는 매일 검은 가루 형태의 천연흑연이 첨단 소재로 재탄생된다. 실제로 구형화된 흑연 입자 표면에 얇은 탄소층을 입히는 코팅 공정과 열처리를 통한 소성 공정을 거친 뒤 음극재가 완성된다. 음극재는 양극재에서 나온 리튬이온을 저장했다가 방출하면서 전류를 흐르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차전지의 충전 속도와 수명을 결정하는 소재다.
지난달 4일 세종시 소정면 고등리에 들어서자 겉으로 보기에 평범해 보이는 공장 단지가 눈에 들어왔다. 푸른색과 회색, 갈색이 어우러진 저층 건물들이 들어선 이곳은 포스코퓨처엠의 음극재 공장으로, 국내에서 유일한 대규모 천연흑연 음극재 생산 거점이다. 최근엔 K배터리 공급망 자립의 '심장'으로 평가받고 있다. 음극재는 양극재와 함께 이차전지를 구성하는 핵심 소재다. 문제는 중국의 글로벌 시장 점유율이 약 95%에 달한다는 점이다. 포스코퓨처엠이 무너진다면 K배터리에 들어가는 음극재의 경우 중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현장에서 만난 구경모 포스코퓨처엠 세종음극재생산부장은 "직원들 모두 포스코그룹의 '제철보국' 정신을 잇는 '소재보국'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일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K배터리 밸류체인을 지키고 있는 기업이 포스코퓨처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음극박(동박)은 SK넥실리스와 롯데에너지머티리얼즈, 솔루스첨단소재가 중국 기업들과 시장 쟁탈전을 펼치고 있다. 양극재 중간 소재인 전구체 사업에는 LS그룹·고려아연·에코프로 등이 도전장을 냈다.
AI(인공지능) 시대 맞춤형 고성능 배터리로 NCM(니켈·코발트·망간)·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등 삼원계가 각광받으면서 K배터리에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26일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배터리 3사의 중국 제외 글로벌 전기차용 배터리 시장 점유율은 36. 3%였다. 2023년만해도 48. 9%에 달했지만, 약 2년만에 30%대까지 밀린 것이다. 대신 CATL(30. 0%)·BYD(7. 9%) 등 중국 기업의 약진이 이뤄졌다. K배터리가 LFP(리튬·인산·철) 대비 고성능인 삼원계에 집중한 탓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 기업들은 전기차 수요 둔화로 '원가 절감'이 화두로 떠오르자 중저가 LFP를 앞세워 점유율을 키웠다. 하지만 최근 짧은 주행거리와 겨울철 성능 불안정, 배터리 재활용의 어려움 등 LFP의 단점이 부각되며 삼원계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박기수 SK온 미래기술원장(CTO)도 "현재 LFP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시 하이니켈(니켈이 약 90% 들어간 삼원계) 배터리 계열로 회귀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4일 찾은 충북 청주 오창읍 에코프로비엠 캠(CAM·양극재) 4공장 내에는 '쿵쾅쿵쾅' 굉음이 가득했다. 옆사람의 목소리 조차 듣기 어려울 정도였다. 리튬과 니켈, 코발트, 알루미늄, 망간 등의 원료가 삼원계(NCA·NCM) 양극재로 가공되는 소리였다. 전기차 시장 캐즘(Chasm·일시적 수요 둔화) 여파로 주춤했던 K배터리가 다시 시동을 켠 것이다. 현장에서 만난 김희영 에코프로 H2개발팀장은 "고급차를 타던 사람이 중저가 차로 쉽게 내려가지 않는 것처럼, 배터리 시장도 비슷한 구조로 형성되고 있다"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중국 기업들이 중저가 LFP(리튬·인산·철)를 앞세워 최근 시장을 석권한 것을 두고 "삼원계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게 아니다"고 단언했다. 삼원계와 LFP가 별도의 시장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취지였다. 눈을 돌려보니아파트 10층 높이에 달하는 외벽을 따라 수십 개의 굵은 배관이 위아래로 뻗으면서 얽혀있었다. 이 관 속에서 전구체와 리튬의 결합, 분쇄, 고온 소성(굽기) 과정 등 양극재 제작 핵심 공정이 진행됐다.
'삼원계(NCM·NCA)' 배터리 본진을 지키면서 중국이 장악한 중저가 시장 공략을 점유율을 늘리는게 K배터리의 지상과제로 떠올랐다. 이에 국내 배터리 및 소재 기업들은 AI(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해 삼원계 기술을 고도화하는 동시에 LFP(리튬·인산·철)와 LMR(리튬·망간·리치), 미드니켈 등 가성비를 갖춘 제품 라인업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LG에너지솔루션은 NCMA(니켈·코발트·망간·알루미늄)와 NCM(니켈·코발트·망간), 니켈 함량 94% 이상 원통형 46시리즈(지름 46㎜) 등의 라인업을 갖췄다. 하이니켈 NCA(니켈·코발트·알루미늄) 명가로 자리잡은 삼성SDI는 46파이 원통형 배터리도 주무기로 활용하고 있다. SK온은 파우치형 하이니켈 NCM으로 글로벌 시장에 승부수를 띄웠다. 중저가 포트폴리오 구축에도 속도를 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르노그룹과 2030년까지 39GWh(기가와트시) 규모의 LFP 배터리 공급계약을 체결했고, 북미에서는 ESS(에너지저장장치)용 LFP 생산을 이미 시작했다.
지난 11~13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된 '인터배터리 2026' 현장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난 배터리 3사의 ESS(에너지저장장치) 담당 임원들은 이구동성 '목표를 넘어선 성과'를 자신했다. 전기차 전방 수요 부진 속에서도 미국·유럽·아시아에서 진행되는 'ESS 골드러시'가 K배터리에 분명한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김현태 LG에너지솔루션 ESS 상품기획·전략담당 상무는 "올해 수주 목표는 90GWh(기가와트시)인데, 수요는 그보다 더 많다"면서 "목표 초과 달성도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전시회장에서 진행한 돌발 인터뷰 상황에서도 또박또박 거침없이 질문에 답했다. 총 140GWh(기가와트아워)가 넘는 ESS 수주 잔고를 보유한 선도 기업의 여유가 느껴졌다. 김 상무는 ESS 시장 확대의 이유로 미국 송전망 교체 사이클 도래와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 수요 폭증을 지목하면서 "미국에서 다수의 ESS 생산라인을 돌리고 있는데, 그만큼 니즈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LG에너지솔루션은 미국 미시간(랜싱·홀랜드)·오하이오·테네시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ESS를 생산하고 있다.
K배터리가 미국 ESS(에너지저장장치) 시장 공략의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췄다. 탈중국 공급망 재편을 마무리하면서 매년 '조 단위'로 지급되는 보조금을 차질없이 받을 수 있게 됐다. 19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LG에너지솔루션·삼성SDI·SK온 등 국내 배터리 3사는 올해 미국에서 AMPC(생산세액공제) 확보를 위해 준수해야 하는 배터리 PFE(금지외국기관) 소재 비중 40% 기준을 충족하고 있다. 지난 11~13일 열린 '인터배터리 2026' 현장에서 만난 배터리 3사 ESS 담당 임원들은 "연도별 비중 변화(올해 40% →2030년 이후 15%)에 따른 PFE 준수 작업을 모두 완료했다"고 밝혔다. AMPC는 미국에서 배터리를 생산할 때 2032년까지 1kWh(킬로와트아워) 당 최대 45달러의 세액공제를 제공하는 제도인데, 트럼프 2기 행정부는 여기에 'PFE 비중 준수'라는 조건을 걸었다. PFE는 사실상 중국 기업들을 겨냥한 블랙리스트인 셈이다. ESS용 배터리의 경우 중국 소재 비중이 큰 LFP(리튬·인산·철)를 주로 활용해 우려가 있었는데, 배터리 3사가 이 리스크를 완전히 해결했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배터리 산업의 흐름이 빠르게 바뀌고 있습니다. 담당 임원으로서 개인적인 목표는 1~2년 안에 ESS를 회사에서 가장 매출이 큰 사업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 김현욱 삼성SDI ESS 영업그룹 상무는 지난 12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된 '인터배터리 2026' 현장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이렇게 말했다. 전기차 성장세가 주춤한 사이 ESS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는 시장 상황을 반영한 포부다. 그는 "ESS가 전기차 수요 둔화를 상당 부분 만회할 수 있다"며 "올 상반기 정도면 향후 3~4년 간 공장을 가동할 수 있는 물량을 확보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실제로 지난해 4분기 삼성SDI ESS 사업은 최대 실적을 기록하며 자동차 수요 부진을 일정 부분 보완했다. 미국에서 지난해 말 2조원, 지난 16일 1조5000억원 규모의 ESS용 배터리 공급 계약을 연달아 체결하며 사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특히 AI(인공지능) 데이터센터와 맞물린 미국 수요가 주목된다. 최근 미국 출장을 다녀온 김 상무는 현지에서 ESS의 역할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분위기를 체감했다고 전했다.
"올해 ESS(에너지저장장치) 수주 목표를 90GWh(기가와트시)로 잡았는데, 수요는 그것보다 확실히 더 많은 것 같습니다. AMPC(생산세액공제)를 위한 PFE(금지외국기관) 기준도 타임라인에 관계없이 모두 충족한 상태입니다. " 김현태 LG에너지솔루션 ESS 상품기획·전략담당 상무는 지난 12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된 '인터배터리 2026' 현장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이같이 밝혔다. "목표 초과 달성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도 함께였다. 김 상무는 LG에너지솔루션 부스를 체크하던 중에 기자를 마주한 돌발 상황에서도 또박또박 거침없이 답변을 내놓았다. 올 연초 기준 140GWh의 ESS 수주 잔고를 보유한 업계 선도 기업의 여유가 느껴졌다. 특히 PFE의 경우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연도별 비중 변화(2026년 40%, 2027년 35%, 2028년 30%, 2029년 20%, 2030년 이후 15%)에 맞춰 솔루션을 모두 마련해놓은 상태라고 강조했다. PFE가 중국 기업을 겨냥한 블랙리스트 격임을 고려할 때 사실상 탈중국 공급망 구축이 완료됐다는 것이다.
"올해 목표로 제시한 ESS(에너지저장장치) 20GWh(기가와트시) 수주는 충분히 달성 가능합니다. " 김태의 SK온 ESS 세일즈실장은 지난 13일 서울 코엑스에서 진행된 '인터배터리 2026' 현장에서 머니투데이와 만나 "사실 목표라는 게 좀 도전적이어야 하는데 올해 목표는 굉장히 현실적"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그만큼 SK온의 올해 ESS 수주전에 자신감이 있다는 의미다. 김 실장은 "미국에서 유틸리티 부문에 이어 인공지능 데이터센터(AIDC)용 ESS 고객사 풀도 많이 확보했다"며 "일부 프로젝트는 빠르면 2분기 내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언급했다. 또 일본 ESS 시장 진출 가능성을 거론하면서 "일본의 경우 지금까지 ESS용 배터리를 대부분 중국산을 써왔는데, 탈중국 수요가 감지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유럽 역시 공공 조달과 입찰 중심으로 연내 ESS 수주를 노린다는 계획이다. 국내 배터리 3사 중 후발주자로 꼽히는 SK온은 최근 ESS 경쟁력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달 발표된 제2차 ESS 중앙계약시장 입찰에서 전체 물량의 50.
배터리 산업의 가치는 전기차와 ESS(에너지저장장치)에 국한되지 않는다. 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UAM(도심항공교통) 등 미래 전략 산업 육성을 위해서도 배터리 밸류체인이 반드시 필요하다. 19일 시장조사기관 SNE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로봇용 배터리 시장은 2030년 이후 본격 개화할 것으로 보인다. 그 이전에는 수요가 미미한 수준에 머물다가 2030년 1. 37GWh(기가와트아워), 2035년 17. 67GWh, 2040년 138. 29GWh로 급성장할 것으로 관측된다. UAM용 배터리에 대한 시장 전망 역시 비슷하다. 2030년 3. 7GWh를 거쳐 2035년에는 68GWh까지 그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AI(인공지능) 기술의 발전에 따라 로봇과 UAM의 가치가 치솟을수록 배터리 산업에 대한 주목도도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특히 가볍고 출력이 높은 배터리가 쓰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기업 입장에서도 고부가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회다. 실제로 휴머노이드나 UAM에는 전고체·리튬메탈 등 차세대 배터리가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평가다.
'밸류시프트(김동명 LG에너지솔루션 대표)·슈퍼사이클(최주선 삼성SDI 대표)·데스밸리(이용욱 SK온 대표)' 최근 국내 배터리 3사 CEO(최고경영자)가 진단한 업계의 분위기다.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는 일관된다. 현재의 위기 국면(데스밸리)에서 배터리 대응 능력을 강화해(밸류시프트) 향후 다가올 업황 반전에 대비해야 한다(슈퍼사이클)는 메시지다. 2020년대 초반만 해도 K배터리에 대한 기대감은 남달랐다. '제2의 반도체'라는 수식어까지 붙으며 대표적인 미래 먹거리로 꼽혔다. 이에 국내 배터리 3사 모두 공격적으로 설비투자(CAPEX)를 확대하며 국내는 물론 북미와 유럽, 중국 등에 생산시설을 구축했다. 실제로 최근 5년(2021~2025년)간 3사의 설비투자는 LG에너지솔루션 44조410억원, 삼성SDI 19조486억원, SK온 26조8122억원 등 90조원에 육박한다. 지금쯤이면 수조원대 이익을 낼 수 있다는 판단으로 쏟아부은 돈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미국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이후 배터리 3사의 주요 공략 지역인 북미 전기차 시장이 급격히 위축됐고, 중국 기업들이 저가 경쟁력을 앞세우면서 국내 배터리 업계는 흔들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