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300]'산업스파이는 간첩'

# 2012년 10월, 대기업 시스템에어컨 사업부의 연구원 A씨와 B씨는 정부과제 사업의 연구비 8억원을 빼돌려온 것이 자체감사에서 들통났다. 징계가 불보듯 뻔해지자 두 사람은 해서는 안 될 선택을 하고 만다. 자신들의 PC에 있던 연구 결과를 외장형 하드드라이브로 옮기고, 주말 새벽을 틈타 노트북과 박스 8개 분량의 자료까지 빼냈다.
이어 중국으로 가 경쟁사에 연구 결과 제공을 대가로 취업시켜줄 것을 제안하고 조건에 대한 협의까지 마쳤다. 이후 일시 귀국한 이들은 급기야 정부과제 수주와 관련된 비리를 폭로하겠다고 협박하며 회사에 29억원을 요구하기도 했다. 결국 이들은 중국으로 기술을 빼돌리려던 중 국가정보원에 덜미가 잡혔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약 10년간 적발된 해외 기술유출 등 경제안보 침해사건은 총 375건. 이 기간 동안 산업기술의 해외유출 등으로 우리나라가 입은 경제적 손실만 600조원에 달하는 것으로 한국산업보안연구학회는 보고 있다.
그럼에도 기술유출 사건에 대한 검찰의 기소율은 12.8%(2012년)에 불과하다. 유죄가 입증되더라도 대부분 집행유예가 선고된다. 기술유출에 대한 처벌 기준이 까다로운데다 처벌 수위도 터무니없이 낮아서다.
이에 산업기술을 해외로 빼돌리는 '산업스파이'를 '간첩죄'로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된다.
21일 국회 사무처에 따르면 이만우 새누리당 의원이 최근 발의한 이 같은 내용의 '형법' 개정안이 지난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위에 회부됐다.
개정안은 간첩죄 적용 대상을 '적국을 위해 간첩한 자' 등에서 '외국 또는 외국인 단체(기업)을 위해 간첩한 자' 등으로 확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즉, 외국기업에 기술을 빼돌린 '산업스파이'에도 간첩죄를 적용한다는 것이다. 현행 법상 간첩죄가 인정되면 최고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해진다.
이 의원은 "냉전체제 종식 등 다원화된 국제 환경에서 비록 적국이 아니지만 외국이나 외국인의 단체를 위해 중요 국가기밀을 누설하는 경우에도 적국을 위한 간첩죄와 유사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며 "산업스파이 등이 이 같은 경우에 해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산업스파이에 대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상 '영업비밀 침해죄' 또는 '산업기술의 유출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상 '산업기술 유출죄' 등이 적용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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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법령들은 실제 기술유출을 억제하고 산업스파이를 처벌하기에는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관계자는 "영업비밀 침해죄는 범죄 성립 요건이 까다로워 기소율과 무죄율이 현저히 낮다"며 "산업기술 유출죄는 실제 선고되는 형량이 낮아 범죄 억제효과가 미미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보기술(IT) 환경의 변화로 해외 기술유출의 건당 피해규모가 커지고 있다는 데 우려하고 있다. 국정원 산업기밀보호센터 관계자는 "인터넷 해킹, 대용량 저장장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 IT의 발달로 기술유출이 갈수록 대량화·신속화되고 있다"고 밝혔다.
기술유출 방지책과 관련,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관계자는 "기술유출의 약 80%가 전·현직 직원 등 내부자에 의해 이뤄진다"며 "각 기업별로 산업보안관리사 등을 적극 활용하는 등 기술유출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산업스파이 간첩죄 적용, 재계 반응은…

재계는 산업스파이를 '간첩죄'로 처벌한다는 내용의 '형법' 개정안에 대해 일단 환영한다는 입장이다. 중국의 산업기술이 우리나라 턱밑까지 쫓아오는 등 경쟁국의 위협이 점점 심해지는 상황에서 기술유출에 대한 처벌을 '국가기밀 유출'에 준하는 수준으로 강화해 범죄 억지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환익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업본부장은 1일 "중국이나 개발도상국에서 우리 기술을 빼가려고 하는데 형량 강화에 반대할 이유가 있겠느냐"며 "(개정안 취지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한국산업기술보호협회 관계자도 "해외로의 기술유출이 날로 조직화·대형화되고 있다. 기술발전 속도가 빨라지고 제품의 '수명주기'도 짧아지면서 각 기술유출에 따른 피해액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처벌 및 형량 강화에 공감했다.
중소기업은 이번 개정안이 정부의 안이한 기술유출 대응에 경종을 울리는 사례가 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산업보안 시스템이 미비하고, 기술유출의 심각성에 대한 인식도 낮은 편이라 '법적 보호망'이 절실하다.
실제로 산업기밀보호센터(NISC) 기술유출 통계에 따르면 2009~2013년간 국내에서 해외로 유출된 기술유출사건은 총 209건으로 대부분은 중소기업(73%)에서 발생한 것으로 파악된다.
추문갑 중소기업중앙회 홍보실장은 "대기업은 정보를 외부에 내보내는 절차 자체가 매우 엄격하다"면서 "반면 중소기업은 정작 기술개발을 해도 체계적으로 이를 보호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또 대기업과 달리, 해외보다는 국내유출로 인한 피해가 더 심각하다는 게 중소기업계의 설명이다. 새로운 기술을 개발해도 이를 보호하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대기업이 먼저 사업화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
추 실장은 "중소기업은 해외 기술유출 보다는 국내 대기업 유출을 더 걱정한다"면서 "어렵사리 기술 개발에 성공해도 돈이 없어 사업화를 못 시키는게 중소기업의 현실"이라고 토로했다.
美, 산업스파이 '경제간첩법'으로 엄단…우리보다 18년 앞서

미국은 산업스파이를 '무관용 원칙'에 따라 엄단하고 있다. 일찌감치 경제간첩 행위를 '형사범죄'로 규정, 연방정부의 수사·정보기관이 해당사건을 직접 수사할 수 있도록 법적 기반을 마련했다.
1996년 10월 13일, 클린턴 행정부때 제정한 '경제간첩법(산업스파이방지법·Economic Espionage Act)'이 대표적인 사례다. 외국정부와 기업·개인이 자국 기업의 영업기밀을 도용해 피해를 주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산업스파이에 간첩죄(형법)를 적용하지 않는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하면 20년 가까이 앞서있는 셈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선제적으로 자국의 기술유출 방지에 나선 것은 자국의 앞선 인터넷 및 컴퓨터 기술이 유출되면서 피해액이 눈덩이처럼 커졌기 때문이다.
당시 미 연방수사국(FBI) 조사 결과에 따르면 1992년부터 1996년까지 5년간 미국 내 경제스파이 관련 범죄는 323% 늘었다.
경제간첩법 제정 준비에 열을 올렸던 1996년 초반, 실제로 FBI가 조사중인 산업스파이 관련 사건은 800여건에 달했다. 해당 사건으로 인한 연간피해액은 최대 100조원 이상에 달했고, 최대 600만명 정도가 실직을 한 것으로 추정됐다.
국가정보원 산업기밀보호센터에 따르면 경제간첩법의 처벌 유형은 크게 2가지로 나뉜다. 외국정부 또는 외국 기관을 위해 영업 비밀을 유출하면 '산업스파이죄'로 가중처벌(15년 징역·벌금 50만달러)하고, 자국내 경쟁업체를 대상으로 했을 경우 '영업비밀 절취죄(10년 징역·벌금 25만달러)'를 적용한다.
또 스파이행위를 통해 만들어진 제품이 자국내로 수입될 경우, 국제무역위원회(ITC) 특허소송 등을 통해 제지하고 있다.
미국 내 산업스파이 행위에 대한 제재는 지속적으로 강화되는 추세다.
오바마 행정부는 2011년 3월, 산업스파이 처벌강화·위조제품 근절·스트리밍 중범죄화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는 '지적재산권 법집행 강화에 대한 행정부의 입법권고사항'을 발표했다.
허브 콜(Herb Kohl) 상원의원도 경제간첩의 처벌 규정을 15년형에서 20년형으로 늘리는 내용의 '경제간첩 형량 강화법'을 제안한 바 있다.
'산업스파이도 간첩'···"신중해야" vs "냉전시대 法 개정"

이만우 새누리당 의원이 3월 대표발의한 '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지난 8일 국회 법제사업위원회 전체회의를 거쳐 소위에 회부되면서 '간첩죄' 확대 적용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개정안은 '간첩죄'의 처벌 대상을 적국을 위한 행위로 한정한 현행 형법을 적국이 아닌 외국이나 외국인의 단체에 대한 행위로 확대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이에 대해 최진녕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은 "기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등을 개선하면 충분히 산업스파이와 관련한 처벌강화가 가능하다"며 간첩 대상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신중한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우리 헌법 상 북한은 국가가 아니지만 '적국을 위한 행위를 한 자'에 대한 처벌 조항을 갖고 있는 형법을 기반으로 북한을 위한 행위를 한 자에 대한 처벌을 내리고 있다"며 "적국에 대한 명확한 규명이 우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부장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 역시 "냉전체제가 무너지면서 적국의 개념도 모호해진 만큼 중요 국기기밀 및 군사기밀을 외국에 누설하는 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자 하는 취지는 동감한다"면서도 "형법 외에도 국가보안법, 군사기밀보호법 등의 다른 법률을 통해 이를 처벌하고 규제하는 방안을 고민하는 것이 우선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임중호 국회 법사위 수석전문위원은 "현행법은 교전상태나 적대관계가 없는 외국 또는 외국인의 단체를 위한 간첩행위는 처벌할 수 없는 문제가 있다"며 법안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적대관계 여부와 상관없이 산업기밀 등 국가기밀의 해외유출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개정안과 같이 간첩죄의 상대방을 '외국 또는 외국인의 단체' 로 확대해 국가의 안전보장을 실질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 3월 이 의원에 앞서 비슷한 취지의 형법 개정안을 발의한 홍익표 의원실 관계자는 "2006년 국내 정치 상황과 북한 정보 등이 미국에 전달돼 국가정보 유출 의혹이 폭로됐지만 사건 당사자에게는 간첩죄가 아닌 위증 혐의만 적용돼 징역 1년, 집행유예 2년의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며 법률 개정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홍 의원 측은 "우리 형법은 6.25 전쟁 기간에 만들어져 적과 우방이 뚜렷이 구분되던 냉전시대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며 "이는 특히 정보 전쟁이 치열한 국제 환경에 맞지 않는 조항"이라고 지적했다.
[인포그래픽] "산업스파이, 80%가 전·현직 직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