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배의 이슈 인사이트
오늘도 온라인에서는 수십, 수백개의 이슈들이 뜨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흘리듯 넘겨버리는 무수한 이슈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이슈를 뽑아 그 한꺼풀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짚어본다.
오늘도 온라인에서는 수십, 수백개의 이슈들이 뜨고 사라지길 반복한다. 흘리듯 넘겨버리는 무수한 이슈들 가운데 가장 주목해야 할 이슈를 뽑아 그 한꺼풀 뒤에 숨어 있는 의미를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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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나라는 그들이 오면 어루만져주고 돈을 넉넉히 주며 두텁게 예의로 대했지만, 저들은 관습적으로 예사롭게 여기며 참과 거짓으로 속이기도 한다. (중략) 변덕을 부리는 데 온갖 방법을 다 쓰며 욕심이 한정이 없고, 조금이라도 뜻에 거슬리면 험한 말을 한다." 조선 초기 문신 신숙주가 저서 '해동제국기' 서문에 쓴 일본인들의 기질이다. 1443년 세종의 명령으로 일본을 다녀온 신숙주는 이후 일본에 대한 자료를 추가로 모아 1471년 성종 때에야 이 책을 펴냈다. 일본 본토와 대마도, 류큐(현 오키나와) 지역의 역사와 풍속, 정치 제도 등을 2권으로 정리한 이 책은 현재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돼 있다. 일본인들 사이에선 평가가 갈리지만, 당시 조선에서 이 정도로 잘 정리된 일본 관련 자료를 찾기란 불가능했다. 이 책을 쓴 신숙주가 당대 조선 최고의 '일본통'으로 불렸음은 당연한 일이다. 신숙주가 세상을 떠나자 영의정을 지낸 홍윤성이 "이제 신숙주가 죽었으니 만일 일본인들에게 무슨
#1. "카자크(코사크)족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경기병들 가운데 최고다. 만약 내가 그들을 우리 군대에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나는 세계를 정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아라사(러시아)에 가살극(카자크족)이 있는데, 그들은 사납고 악독해 구라파(유럽) 사람들이 두려워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나라에 와전돼 '가살극 사람들은 퇴화되지 않은 꼬리가 있으며 사람 고기를 식량으로 삼는다'는 소문도 났다." (황현, 매천야록) 과거 우크라이나 지역에 살던 카자크족에 대해 각각 나폴레옹과 황현 선생이 남긴 말이다. 거의 모든 남성이 어릴 때부터 말을 타며 총을 쏘도록 훈련받는 카자크는 몽골족과 함께 유라시아 역사상 최강의 '전투민족'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 숨을 곳이 없는 우크라이나 대평원에서 수시로 타타르족의 습격을 받다보니 농사를 짓다가도 총을 집어들고 싸우는 것이 이들에겐 생활의 일부가 됐다. '전쟁론'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도 카자크족의 용맹함과 잔혹성이 타
#1. 소설 '삼국지연의'를 쓴 나관중이 만약 명예훼손 소송을 당한다면 원고는 아마 손권이 아닐까. 작품에서 오나라가 상대적으로 억울한 대우를 받았다는 점에서다. 문학적 재미를 위해 유비와 조조의 대결 구도에 힘을 실은 결과다. 조조의 위나라야 중원을 차지하고 한나라 천자까지 끼고 있던 초강대국이었으니 이야기의 중심이 된 건 당연한 노릇. 촉나라의 유비가 소설의 주인공으로 선택된 건 삼국지연의가 쓰여진 당시의 시대적 상황과 무관치 않다. 14세기 중반은 중국에서 몽골의 원나라가 몰락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부상하던 때다. 100년 가량 몽골족의 지배를 받던 한족의 자존감 회복을 위한 '국뽕' 아니 '민족뽕' 콘텐츠가 당대 중국 문학계의 트렌드였다. 희대의 베스트셀러 작가 나관중이 '한족 국가' 한나라 황실의 후손을 자처한 유비를 소설의 주인공으로 낙점한 건 이런 시류에 편승하기 위해서였다. 이 때문에 오나라는 소설 속에서 수많은 무공을 유비 쪽에 빼앗기고 말았다. 삼국지연의에서 유비
#1. 1347년 이탈리아 항구도시 제노바에 흑사병(페스트)이 상륙했다. 역병은 순식간에 유럽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후 50년 동안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흑사병으로 목숨을 잃었다. 몹쓸 역병은 300년 가까이 유럽을 괴롭혔다. 15세기엔 약 10년 주기로 흑사병이 유럽 거의 모든 지역을 휩쓸었다. 대도시 피렌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흑사병 때문에 피렌체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물론 흑사병을 피해 시골로 피난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흑사병이 사람의 목숨만 앗아간 건 아니었다. 팬데믹(대유행)은 유럽의 중세 질서를 무너뜨렸다. 교회는 권위를 잃었고, 봉건제는 서서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인구 급감으로 일할 사람이 부족해지자 농민은 귀하신 몸이 됐다. 지주에게 주는 소작료가 뚝 떨어졌다. 반대로 소작료 수입이 줄어든 지주들은 땅값 폭락까지 이중고를 겪었다. 친척들이 흑사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갑자기 재산을 물려받은 농민들은 싼 값에 땅을 사들여 자영농이 됐다. #2. 17세기엔
#1. '카타르 월드컵' 만큼 대진표가 얄궂은 대회가 있었을까. 이번엔 유독 역사적, 지리적으로 운명적 관계의 국가 간 대결이 많았다. 미국 대 잉글랜드 경기가 미국 독립전쟁, 1812년 미영 전쟁을 떠올리게 한다면 미국 대 이란 전은 현재진행 중인 핵분쟁과 오버랩된다. 모로코 대 프랑스, 모로코 대 스페인은 옛 식민지와 식민 지배국 간 승부였고, 독일 대 스페인은 옛 합스부르크 왕조 더비(대결)라 부를만 하다. 그 중에서도 백미를 꼽으라면 단연 '영원한 숙적'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경기가 아니었을까. 월드컵에서 승리는 프랑스의 몫이었지만, 과거 전쟁은 꼭 그렇진 않았다. 특히 해전에선 섬나라 영국의 전적이 압도적 우위였다. 대표적인 게 '세계 3대 해전'으로 꼽히는 1805년 트라팔가 해전이다. 넬슨 제독이 이끄는 대영제국 해군이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를 격파한 전투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과거 프랑스 해군이 영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경우는 딱 한 번 있었는데, 바로 1781년
#1. 트럼프 행정부 시절 미국이 눈독 들이던 그린란드. 사방이 얼음으로 뒤덮였는데 왜 이름이 '그린'란드일까? 처음 그린란드 정착을 주도한 건 아이슬란드 출신의 바이킹 '붉은 머리 에리크'였다. 살인을 저지르고 쫓겨난 에리크가 살 곳을 찾아 헤매다 그린란드를 찾아낸 게 서기 982년. 빈 땅을 혼자 개척할 자신이 없던 에리크는 "서쪽에 풀로 뒤덮인 땅이 있다"며 아이슬란드에서 약 500명을 꼬드겨 데려온다. 이렇게 붙여진 이름이 '그린란드'다. 그럼 당시 에리크는 거짓말을 한 걸까.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게 당시 유럽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중세 온난기'로 불리는 약 950년부터 1250년까지 유럽과 아메리카 일부 지역은 그 전후에 비해 평균 기온이 섭씨 2도 정도 높았다. 지금은 그린란드의 녹지가 전체 면적의 1%에 불과하지만 그 당시엔 이보다 더 많았을 수 있다. #2. 중세 온난기가 끝난 뒤 1400년대부터 지구는 '소빙기'에 접어든다. 이후 1800년대 중반까지 인류는
#1. 엘리자베스 2세의 뒤를 이어 찰스 3세가 살고 있는 영국 런던의 버킹엄궁전. 대부분의 관광객이 왕실 근위병들에 시선을 빼앗기지만, 사실 궁전 앞엔 또 하나의 구경거리가 있다. 바로 높이 25미터, 무게 2300톤의 거대한 '빅토리아 여왕 기념비'다. 꼭대기의 황금빛 천사 아래 19세기 대영제국을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이끈 빅토리아 여왕이 앉아 있다. 그 주위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호주, 캐나다, 남아프리카 등을 상징하는 석상들이 서있다. 이 탑이 세워지기 시작한 건 빅토리아 여왕이 서거한 1901년, 완공된 건 1924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초강대국 대영제국의 자부심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 탑이 완성됐을 때 세계의 패권은 이미 미국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였다.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인 빌헬름 2세 독일 황제가 일으킨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영국은 빚더미에 앉았다. 영국에 쌓여있던 금은 전쟁 무기를 내다판 미국으로 흘러갔다. 1860~1914년 전 세계 결제 수요의
#1. 1974년 10월 3일 싱가포르. 이른 아침부터 청키아우(Chung Khiaw) 은행 지점마다 사람이 몰리더니 긴 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 은행이 파산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 때문이었다. 은행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은 루머를 더욱 증폭시켰다. 예금을 떼일지 모른다는 공포가 삽시간에 퍼져나갔다. 고객들은 패닉에 빠져 은행으로 달려갔다. 앞다퉈 돈을 빼가려는 인파 때문에 은행 앞 거리는 북새통이 됐다. 질서유지를 위해 경찰까지 출동했다. 뱅크런(대규모 예금인출사태)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정부가 나서 "이 은행엔 아무 문제도 없다"고 안심시켰지만 소용 없었다. 사태는 나흘째 들어 대다수 고객이 예금을 빼가고 난 뒤에야 수그러들었다. 이 은행이 망할 것이란 얘긴 사실이 아니었다. 정부의 도움으로 은행은 가까스로 파산을 피했지만, 어떻게 거짓 루머 하나가 은행을 도산 직전까지 몰고 갈 수 있었는지는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2. 때론 사실과 다른 믿음이 사람들의 행동을 바꿔 결국
#1. 2007년 5월, 티모시 키팅 당시 미국 태평양사령관이 베이징을 방문했다. 중국 인민해방군 총참모부의 초청이었다. 키팅 사령관을 국빈으로 환대하던 중국은 공식 만찬 때 본색을 드러냈다. "태평양을 중국과 미국이 양분하자. 하와이 서쪽을 모두 중국에 넘겨라." 키팅 사령관은 처음엔 "농담이 지나치다"며 웃어 넘겼다. 하지만 중국 쪽은 장난이 아니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고 느낀 키팅 사령관은 자리를 박차고 나와 즉시 국방부에 보고했다. 단순한 에피소드가 아니다. '태평양 양분'은 중국 패권전략의 핵심 과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은 집권 직후인 2013년 4월 존 케리 당시 미 국무장관을 만나 "태평양은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을 수용하기에 충분히 넓다"고 했다. 하지만 미국이 이를 받아들일 리 없다. 중국이 제1열도선 밖으로 나가는 걸 막는 게 미 태평양함대의 핵심 임무다. 일본 오키나와, 대만, 필리핀 등을 잇는 제1열도선은 중국 입장에선 '뒤집힌 만리장성'이다.
#1. "만약 내가 고래였다면 엄마도 날 안 버렸을까."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서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린 대사 가운데 하나다. 극중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우영우 변호사가 사랑하는 고래는 모성애가 지극하기로 유명하다. 제주 앞바다에선 죽은 새끼를 머리에 이고 물 위로 들어올리려 애쓰는 돌고래가 포착돼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포유류인 고래는 하마, 돼지, 양, 낙타, 기린 등과 유전학적으로 유사하다. 특히 하마와 유전적으로 가장 가깝다고 한다. 과거 이들의 공통조상인 육상동물 가운데 일부가 바다로 들어가 오늘날 고래가 됐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먼 옛날 육지에서 넘어온 고래지만, 또 다른 대형 육상동물이 바다로 들어와 경쟁자가 된다면 고래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2. "고래는 코끼리가 양서류가 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했던 '크림전쟁'의 배경을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문구다. 당시 해양 패권을 쥔 영국이 대륙
#1. "넌 내 백성들을 노예로 삼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했어." (중략) (상대가 칼을 겨누자) "이건 미친 짓이야." "미친 짓이라고? 이게 스파르타야!(This is Sparta!) 2007년 개봉한 잭 스나이더 감독의 영화 '300'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 중 하나다. 이 장면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 1세(제라드 버틀러 분)는 "디스 이즈 스파르타!"라는 포효와 함께 페르시아의 전령을 발로 걷어차 우물에 빠뜨린다. 사실 원래 대본에 따르면 "디스 이즈 스파르타"란 대사는 무덤덤하게 속삭이게 돼 있었다. 하지만 대본대로 촬영을 마친 제라드 버틀러는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는지 재촬영을 요청했다. 그리곤 애드리브로 폭발적 분노를 담아 대사를 소화하면서 이 강렬한 장면이 탄생하게 됐다. 스파르타가 페르시아의 전령을 우물에 빠뜨린 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다. 페르시아 황제의 전령이 항복의 의미로 영토를 상징하는 '흙과 물'을 요구한 데 대한 분노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과 다른
#1. 영화 '대부' 시리즈로 유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신작 '지옥의 묵시록'을 내놓은 1979년, 미국의 경제 사정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경제성장률은 3%에 그치는데 물가상승률은 13%에 달했다. 실업률은 6%를 넘나들었다. 팔레비 왕조를 무너뜨린 이란 혁명을 계기로 터진 제2차 오일쇼크가 결정적이었다. 이 와중에 소련은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다.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격화됐다. 코로나19(COVID-19) 사태 이후 물가가 뛰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쳐들어간 지금 상황과 오버랩된다. 당시 살인적 물가를 잡기 위해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공격적으로 금리를 끌어올렸다. 폴 볼커 연준 의장은 1978년 10월 11.5%였던 기준금리를 단 번에 4%포인트 인상했다. 이후에도 그런 기세로 1980년 20%까지 올렸다. 결국 볼커는 1982년 물가상승률을 4%로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동안 미국인들은 뼈를 깎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금리인상 등의 결과로 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