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헐리즘 뒷이야기
사람과 동물, 가족과 사회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연대,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동과 공감, 때로는 사회적 이슈까지 진솔하게 다루는 휴먼스토리 코너입니다.
사람과 동물, 가족과 사회의 다양한 사연을 통해 삶의 의미와 연대, 그리고 따뜻한 위로를 전합니다. 감동과 공감, 때로는 사회적 이슈까지 진솔하게 다루는 휴먼스토리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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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추웠던 겨울에 1m 짧은 목줄에 묶인 개들의 삶을 취재했었습니다. 그때 처음 단풍이를 만났습니다. 서울 송파구였습니다. 산책을 시켜주러 갔는데, 어찌나 좋아하던지요. 새벽부터 일찌감치 일어나 기다렸다지요. 모처럼 소풍 가는 아이들 마음이었달까요.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다시 줄에 묶으며 마음이 쓰렸습니다. 녀석은 또 일주일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더워도, 추워도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1m의 삶. 그건 차마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풍이가 계속 새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1년에 두 번 낳으면 팔아먹고 잡아먹어, "가족이 되어주세요"━매년 5월과 11월이면 단풍이는 새끼를 낳는다고 했습니다. 제가 갔을 때에도 이미 새끼 두 마리가 있었지요. 지난해 11월에 낳은 녀석들이었습니다. 올해 5월에도 새끼 11마리가 태어났습니다. 그중 한 마리는 무지개 다리를 건넜습니다. 나머지 10마리 중 7마리는 주인이 어디론가 보냈습니다. 5만원씩 팔았다는 얘기도 전해졌습니다. 이곳엔 어미 단풍이
태어나 보니 뜬장이었다. 바닥에서 떠 있는, 철창으로 된 사육장이 집이었다. 평평한 바닥도 사치였다. 차라리 서는 게 편했다. 발바닥이 갈라지고 관절이 나갔다. 추우면 추워야 했고, 더우면 더워야 했고, 비가 오면 맞아야 했다. 음식물 쓰레기를 먹으며 고단한 생을 버텼다. 바깥세상에 나왔다 싶은 첫날, 그들은 도살장으로 갔다. 그곳은 개농장이었다. 무려 280마리나 됐다. 이 곳은 1992년부터 계양산에 있었다. 고(故)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 땅이었다. 그런데 '개발제한구역'이라, 개농장주는 이미 수십 년간 불법을 저지르고 있었다. 인천 계양구청은 2017년이 된 뒤에야 철거 압박을 했다. 25년 동안 방치한 셈이었다 . 올해 4월쯤, 우연히 계양산을 지나가던 시민이 개농장의 존재를 알았다. 개들을 본 뒤 매일 맘이 쓰였단다. 도저히 모른척할 수 없었다. 언론사에 제보하고 동물보호단체들에 구해달라 요청했다. 유일하게 도와준 곳이 동물권단체 케어였다. 그리고 150여명의 시민들이
13일 오후, 인천 계양산 개농장에 남겨진 192마리 개들을 만났다. 그리고 그날 저녁엔 반려견 똘이(6살, 몰티즈)를 만났다. 둘은 똑같았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 뒤로 젖힌 귀, 세차게 흔드는 꼬리, 점프해 앞발로 매달리는 것까지. 생김새가 달랐지만 '본질'은 같았다. '반갑고 당신이 좋다'는 것. 그래서 반려동물이라며 사람 가까이서 산다. 이미 반려 인구가 1000만명이 넘었다. 산책도 하고, 옷도 입히고, 미용도 하고, 사진도 찍고, 곁에서 잠도 잔다. 병원비는 사람보다 더 비싸다. 새까만 밤에도 다가와 반기며, 힘들 땐 옆에서 가만히 기댄다. 그런데 축산법상 개는 여전히 '가축'이다. 농장서 대량으로 기르는 동물(관습상)이란 거다. 개농장(전국 3000여개 추산)도 그런 맥락에 속한다. 대다수가 뜬장(땅에서 떠 있는 철창)서 살며 음식물 쓰레기를 먹는다. 그러다 때가 되면 도살장으로 가 개고기가 돼 먹힌다. 보신탕을 먹고 들어와 반려견과 놀아주고, 개랑 산책하다 옆집에선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잘 알 것이다. 녀석이 자신의 것을 나누는 게, 얼마나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인지. 심지어 형, 동생에게조차 잘 내어주지 않으니 말이다. 6살 선호에게 빨간 로봇도 그랬다. 오래 가지고 놀아서 애착이 참 컸다. 그런 선호가 기꺼이 로봇을 기부했다. 깨끗하게 소독까지 해서. 어쩌면 아이에겐, 세상의 절반쯤 사라지는 아픔이었으리라. 그렇지만 기분 좋게 내어놓았단다. 형편이 어려워 장난감 구경도 쉽지 않았을, 이름 모를 친구를 위해서. "난 그래도 놀았으니, 너도 놀았으면 좋겠어." 이런 맘이었을 것 같다. 그리고 선호 누나인 8살 수빈이도, 아이의 친구들인 다연, 민아, 채아, 다솜, 지민, 지연, 가연, 희문, 경은이도 각자 소중한 걸 내놨다. 왕소라 과자도, 꽃게맛 과자도, 초코맛 과자도, 컵라면도. 당장 먹고픈 걸 꾹꾹 참았으리라, 코로나19로 더 배고프고 힘들지 모르는, 어딘가의 친구들을 위해. 그러니 그 기특한 마음을, 펜을 꾹꾹 눌러 기록하려 한다. 나
"아이고, 죽을 맛입니다." 오랜만에 연락한 문백남 지부장(전국우정노동조합 서울구로우체국지부)은 "잘 지내시냐"는 물음에 그리 답했다. '여전하구나', 실마리 같은 기대가 실망으로 뒤바뀌었다. 그와는 지난해 여름, 집배원 체험을 함께 했었다. 최근 10년간 집배원 348명이 숨졌는데, 이유가 궁금해 시작한 취재였다. 그리고 체험이 끝난 뒤, 나간 기사 제목이 이랬다. '집배원이 왜 죽는지, 비로소 알게 됐다(2019년 7월6일자 참조)'.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뒤, 절로 떠오른 제목이었다. 그 무렵 61년만에 총파업을 하겠다던 집배원들은, 약속 하나만 받아낸 채 결국 접었다. 그게 지난해 7월8일이었다. 그 약속이 대단한 게 아녔다. 주 5일 근무를 위한 인력 충원(988명). 누군가에겐 이미 당연한 일이, 누군가에겐 사투를 벌여야 겨우 얻는 거였다. ━필요인력 2000명, 충원인력 988명 뿐━ 그리고 7달이 지났지만 집배원들 업무 환경은 여전히 열악하다. 하루 업무량을 수행하
새벽 6시, 칠흑 같은 동네는 고요히 숨죽였다. 바깥은 영하 6도라 나오자마자 귓불이 금세 빨개졌다. 난 동네 고양이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까이 갈수록 '사뿐사뿐', 녀석들 발걸음을 닮아갔다. 놀라게 할까 봐서. 추운 날엔 눈에 더 밟혀 출근하기 전 살펴볼 요량이었다. 누가 아프진 않나, 갑자기 안 보이진 않나. 고양이 집 앞에 놓인 물통부터 봤다. 역시 꽝꽝 얼어 있었다. 겨울 추위는 이리 매서웠다. 그냥 두면, 차가운 얼음만 부질없이 핥다 포기할 터였다. 이 넓은 세상에 목을 축일 곳 하나 없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그리 생각하니 몸에 걸친 따뜻한 패딩조차 미안해졌다. 상념에 잠겼을 때, 동네 고양이(하양이)가 빼꼼 고갤 내밀었다. 조용히 한다고 했는데, 인기척을 들은 모양이었다. 이어 옆집서 다른 고양이(얼룩이)가 반쯤 삐져나왔다. "잠 깨워서 정말 미안해”하고 혼잣말을 한 뒤 조심조심 뒷걸음질 쳤다. 속으론 안도했다. 이 겨울을 다행히 잘 보내고 있구나 싶어서. ━길고양이
지난해 12월 말, 겨울 추위가 무르익을 무렵이었다. 동네서 우연히 폐지 손수레를 봤다. 뒤뚱뒤뚱 올라가는 걸 돕고, 땀을 소매로 훔치고 나니 누군가 생각났다. '폐지 아저씨' 최진철씨였다. 고단하고 길었을 그의 삶은 이랬다. 잘 나가던 중식 주방장이었고, 갑자기 뇌경색이 찾아왔고, 몸 왼쪽에 장애가 남았고, 걷고 말하는 게 힘들어졌다. 일자릴 잃었고, 이혼했고, 기초생활수급자가 됐다. 하루아침에 벼랑 끝으로 내몰렸다. 그때 폐지 손수레를 잡았단다. 그와 처음 만난 건 2018년 12월이었다. 영하 20도의 추운 날씨였다. 하루 내내 함께 폐지를 주웠고, 165kg을 모았고, 겨우 1만원을 손에 쥐었다. 기사가 나갔고, 돕겠단 이들의 메일이 200통이나 쏟아졌다. 최씨 계좌를 알려주니 며칠 뒤 전화가 왔다. 그는 꺽꺽 울고 있었다. 고맙다고. 그리 훈훈한 마무리이길 바랐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지난해 여름, 최씨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간암(초기)에 걸렸다고 했다. 설상가상으로
지난 16일 저녁, 독자 한 분에게 메일이 왔다. 그날 오전에 나간 '공원 벤치서 쓸쓸한 죽음…마지막 길을 함께했다(11월16일자, 남기자의 체헐리즘)' 기사를 봤다고 했다. '무연고 사망자' 장례를 다녀온 뒤 쓴 거였다. 입관을 도왔고, 추모했고, 화장해서 마지막 길을 떠나보냈다. 그 기사를 잘 봤다며 연락이 온 거였다. 그는 "48세 중년 남성이자, 평범한 직장인"이라며 자신을 소개했다. 여느 주말처럼, 아침에 조깅을 하고 돌아와 우연히 기사를 봤단다. 그리고, 그의 표현을 빌리면 "다 읽고 숨이 턱 막혔다"고 했다. 누군가 얘기가 아니라, 자기 얘기가 될 것 같아서. 노원구 공원 벤치서 숨진 남성을 보고, 자기 모습이 겹쳤다고 했다. 30대에 아내와 이혼했단 그는, 지금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아직은 가족도 있고, 친구도 있지만, 최악의 상황이 떠오른다 했다. 집에서 홀로 떠나도, 아무도 모르는 그런 장면 말이다. "장례는 누가 치러줄까 두렵다"며 토로했다. ━"죽는 건 괜
검은색 내복은 허리 고무줄이 헐거워져 있었다. 벌써 2년쯤 견디느라 늘어난 탓이다. 오랜만에 꺼냈다. 지난 겨울철에 입고 한 9개월 만인가. 허리춤에 달린 흰색 라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유니클로 히트텍(UNIQLO HEATTECH)'. 일본 회사가 만든, 논란의 그 내복이 맞다. Made in 베트남이라 돼 있지만, 만든 장소만 그랬다. 분명 일본 제품이다. 그걸 한 손에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문을 여니 겨울 냉기가 쏟아졌다. 한편에 놓인 초록빛 봉투는 입을 헤 벌리고 있었다. 10리터짜리 쓰레기 종량제 봉투였다. 그걸 보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는 새 허벅지는 차가워졌다. 내복이 절로 생각나는 계절이었다. 하체 추위를 많이 타는지라 더 그랬다. 그 안에 검은색 내복을 욱여넣었다. 제법 깨끗해 의류 수거함에 넣을 법도 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누군가 또 입길 바라지 않았다. 그리고 비닐 손잡이 양 끝을 잡아당겨 단단히 묶었다. 쓰레기봉투는 현관에 하루쯤 뒀고, 다음 날 아
입사하고 첫 '땡땡이'를 친 다음 날, 난 여느 날처럼 광화문으로 돌아왔다. 출근했다는 뜻이다. 전날 아프다고 거짓말해서, 아직은 다들 그리 알고 있었다. 잠시 뒤, 부장이 출근했다. 내가 '부장'이라 부르는 건, 대뇌를 비웠거나 퇴사를 앞두고 있어서가 아니다(댓글에 그런 질문이 많아 설명한다). 언론사에선 통상 '님'자를 생략하고 부른다. 대표님 대신 대표라 하고, 팀장님 대신 팀장이라 한다. 단언컨대, 난 아직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한다. 매달 25일엔 애사심이 가장 충만하다. 다시 돌아오자면, '땡땡이'친 다음 날 어땠는지 궁금하단 독자가 많았다. 잘 알고 있다. 내심 기대하고 있단 걸. 부장에게 (액정 정면이 아스팔트에 떨어진 사과폰처럼) 깨지고, 멘탈은 잘 마른 쿠키처럼 바사삭 부서지고, 땡땡이로 채운 충만한 감성은 인수분해되어, 다신 땡땡이의 땡 자도 꺼내지 못하고, 시계가 '땡' 치는 소리만 들어도 가슴이 철렁해지는. 예를 들면 그런 장면 말이다. ━부장이 건넨 한마디━
닉네임을 '남형도'로 바꿨다. 내 이름이다. 그리고 기사 댓글 창으로 갔다. 최근 개봉한, 영화 '82년생 김지영' 기사였다. 이미 댓글창은 싸움터가 돼 있었다. 일부 남성들은 여성들을 싸잡아 비하하고, 비난하고, 출연한 배우들을 욕하고 있었다. 거기에 여성들이 반박하는 댓글을 달았다. 서로 간의 인격 모독과 공격이 끊이지 않았다. 커서는 깜빡거렸고, 이름 석 자가 그 위에 있었다. 난 머뭇거렸다. 평소 같으면 생각과 동시에, 아니 생각도 별로 안 하고 써재꼈을 터였다. 그런데 주저하고, 고민하게 됐다. 300자는커녕, 한 글자도 나아가기 힘들었다. 생각한 끝에 이렇게 남겼다. 그냥 "힘들었겠구나" 얘기하면 안 되겠느냐고. 그렇게 충분히 알아준 다음에, 또 충분히 얘기하면 어떻냐고. 이런 식으론 갈등이 나아지는 게 없다고. 좋든 싫든 함께 살아가야 하니, 서로 힘든 부분을 보듬었으면 좋겠다고 말이다. 그렇게 '실명 댓글' 50개를 한 주(21일~25일) 동안 달았다. 포털 사이트
빨래 건조대에 걸린 옷들이 잘 말라 있었다. 출근하느라 바삐 하나를 집어 입었다. 몸에 들어갈 때의 감촉만 느껴도 알았다. 뽀송뽀송했고 좋은 향이 났다. 칠칠치 못한 내가 흘린 얼룩들도 말끔히 지워져 있었다. 잘 알고 있었다. 아내가 빨래를 잘해준 덕분이란 걸. 일일이 냄새를 맡고, 그리 밝지 않은 세탁실서 옷들을 살피고, 세탁기를 돌리고, 꺼내어 또 말리고. 때론 늦은 밤까지 그리해준, 그 노고 때문이란 걸 너무 잘 알았다. 그날 저녁, 퇴근해서 돌아와 아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옷이 얼마나 뽀송뽀송한지 아침에 기분이 다 좋아졌어. 빨래하느라 늘 힘든 것 잘 알아. 깨끗하게 입고 다니게 해줘서 고마워." 매번 반복해 해내는 이 일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충분히 얘기하고 싶었다. 아내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쑥스러운 듯 "빨래는 세탁기가 다 하는데 뭐"라고 말을 돌렸고, 난 다시 "그게 다 일일이 손이 가는 거잖아. 힘든 거야"라고 했다. 조명받지 못한 삶에 대한 ‘피드백 프로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