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속오늘
과거의 오늘, 뉴스가 전한 다양한 사건과 감동의 순간들을 되짚어봅니다. 사회, 문화, 정치 등 여러 분야에서 주목받았던 이슈와 인물들을 통해 오늘의 의미를 새롭게 발견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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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1,206 건
2020년 1월26일. 미국프로농구(NBA) 레전드 코비 브라이언트가 41세의 이른 나이에 둘째 딸 지아나(당시 13세)와 헬기 추락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20년을 LA 레이커스(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 한 팀에서만 뛰며 팀을 5차례 정상에 올린 실력파 스타였다. 그는 파이널 우승 5회, 파이널 MVP 2회, 시즌 MVP 1회, 올스타 18회, 올스타전 MVP 4회, ALL-NBA 팀 15회 등 화려한 전적을 남기고 2016년 은퇴했다. 농구로만 11억1000만달러(한화 약 1조6270억원)를 벌어들였던 코비는 자신의 농구 후계자로 여긴 둘째 딸 지아나와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농구 경기를 보러 가다가 비극적 사고를 당했다. ━딸 넷 둔 진정한 딸 바보…둘째 딸 농구 실력에 "프로선수 될 것" 자랑도━ 코비 브라이언트는 아들 없이 슬하에 딸만 넷을 둔 아빠였다. 그는 딸들과 보내는 시간을 먼저 생각하는 '딸바보'였다. 특히 둘째 딸 지아나는 아빠 코비의 DNA를 물려받아 농구 실력을 뽐냈다.
2013년 1월 25일. 울산 중구의 한 다세대 주택에서 잔인하게 자매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홍일(당시 26세)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김홍일은 이에 불복해 곧바로 항소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원심 판결을 깨고 무기징역으로 형량을 줄였다. 2심 판결은 대법원에서 확정됐다. 그는 옥살이 중에도 "20년쯤 살면 가석방된다", "20년 뒤면 나간다", "출소하면 여자도 사귈 거야"라는 등 발언을 하며 반성은커녕 후일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충격을 안기기도 했다. ━ "헤어지자"는 말에 분노…집으로 찾아가 흉기로 자매 살해━김씨는 2008년 4월 병역 의무를 마친 후 같은 해 7월 울산 중구에 있는 한 주점에서 5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때 주점에서 일을 돕던 사장의 딸 A씨와 그의 동생 B씨를 알게 됐다. 김씨는 동갑인 A씨와 2009년 7월부터 교제하게 됐다. 두 사람은 2009년 7월부터 2012년 7월까지 사귀었다. 연애 4년 차에 접어든 2012년 7월 김씨는 A씨로부터 "그만 헤어지자"는 결별 통보 문자를 받았다.
9년 전인 2017년 1월 24일 서울고법은 '수락산 묻지마 살인 사건' 범인 김학봉(당시 62세)에게 원심판결과 같은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검찰은 김학봉을 살인 및 절도미수 혐의로 재판에 넘긴 뒤 사형을 구형했다. 하지만 1심과 2심 재판부는 "우리나라는 실질적 사형 폐지 국가"라며 "사형을 선고하든 무기징역을 선고하든 사실상 큰 차이는 없다"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김학봉 측은 법정에서 "편집 조현병에 의한 심신미약 상태였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재판부는 "정신 감정 결과, 사물을 변별하는 능력이 비교적 건재하다"며 "감형 여지는 전혀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항소심 판결에 불복한 검찰은 양형부당을 이유로 상고장을 냈다. 2017년 4월 대법원이 검사의 상고를 기각하면서 김학봉 형량은 무기징역으로 확정됐다. ━범행 전날 미리 산에 올라 준비…"처음 만난 사람 죽였다"━ 김학봉은 2016년 5월 29일 새벽 서울 노원구 수락산 등산로 초입에서 홀로 등산하던 60대 여성의 목과 배를 흉기로 여러 차례 찔러 살해했다.
2009년 1월23일(이하 현지시간). 벨기에 덴더몬드 지역의 한 어린이집에 괴한이 침입해 흉기 난동을 벌여 3명이 숨지고 12명이 중상을 입었다. "뭐 하나만 여쭤볼게요. 좀 도와주시겠어요?" 이날 오전 10시 15분쯤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에서 서쪽으로 30㎞ 떨어진 동플랑드르주 덴더몬드 지역의 한 어린이집에 새빨갛게 머리를 염색한 한 남성이 들어와 도움을 청했다. 이 남성을 가장 먼저 마주친 건 보육교사 리타 반 가이테였다. 그는 반 가이테에게 다가가 말을 건 뒤 등 뒤에 숨기고 있던 30㎝ 길이의 흉기로 마구 공격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반 가이테는 저항하며 몸싸움을 벌였다. 괴한의 습격을 목격한 또 다른 보육교사 마리타 블린드만(당시 54세)이 깜짝 놀라 경찰에 신고하려 했다. 그러자 괴한은 그에게 달려들어 목과 복부를 찔러 살해했다. 흉기에 찔린 반 가이테는 놀이방에 있던 창고로 도망쳤다. 이곳에는 다른 직원들이 숨어있었다. 괴한은 창고 문을 열려고 하다 실패하자 금방 돌아섰다. 그때 창고 안에 있던 직원은 먼지떨이로 그를 덮쳐 제압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오히려 흉기에 찔리고 말았다.
1998년 1월 22일 . IQ 167의 수학 천재에서 연쇄 폭탄 테러범으로 전락한 테드 카진스키가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이른바 '유나바머'(Unabomber)로 불리며 세상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인물이다. ━소포 열자 '펑'…17년 동안 16번 테러━1978년 5월 미국 노스 웨스턴대학 버클리 크리스트 교수는 발신인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 소포를 받았다. 수상함을 느낀 크리스트 교수는 경찰을 불렀다. 이후 소포를 조사해 달라고 요청한 순간 엄청난 굉음과 함께 소포가 폭발했다. 소포 속에 들어있던 건 다름 아닌 폭탄으로 유나바머의 시작이었다. 약 1년 뒤인 1979년 5월에는 노스 웨스턴 대학교 대학원생 존 해리스가 소포를 개봉하다 부상을 당했고, 같은해 11월에는 시카고를 출발해 워싱턴DC로 향하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보잉444기 우편물 보관실에서 다량의 연기가 발생해 항공기가 비상착륙했다. 그 이듬해에는 아메리칸 에어라인 사장에 4번째 소포 폭탄이 배달됐고 얼굴과 몸에 수많은 파편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1968년 1월 21일 오후 김신조 등 북한 124군부대 소속 무장 공비 31명이 서울에 침투했다. 이들의 목적은 청와대를 기습해 박정희 당시 대통령을 암살하는 것이었다. 북한 무장 공비들은 1968년 1월 18일 자정을 기해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왔고, 하룻밤 숙영한 뒤 19일 저녁부터 얼어붙은 임진강을 횡단했다. 이후 당시 경기도 파주군 삼봉산에서 숙영한 무장 공비들은 20일 앵무봉을 통과, 산악길을 따라 서울 안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서울 진입 전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코트 아래 총기 등 장비를 숨긴 채 이동했다. 그러나 남성 무리가 시내에서 2열 종대로 이동하는 것을 본 경찰은 이상함을 느껴 검문에 나섰다. 그러자 무장 공비들은 "우린 군 소속 방첩 요원들"이라며 "산악 훈련 후 복귀하는 길이니까 신분증 확인할 필요 없다"고 되레 경찰들을 위협했다. 당시 검문 장소는 청와대에서 불과 300m가량 떨어진 곳이었다. 경찰들은 의문의 남성들과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그들을 체포하고자 했다. 무장 공비들은 총기와 수류탄을 사용하며 저항했고, 그로 인해 현장을 지휘하던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이 사망하고 여러 경찰관이 중상을 입었다.
1999년 1월 19일. 강원 삼척시로 신혼여행을 떠난 부부가 한 비포장도로에서 엽총으로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범인은 고급 승용차를 탄 부부가 자신의 소형차를 추월했다는 이유로 이들에게 총기를 난사한 것으로 드러나 공분을 샀다. 사건 당일 오후 4시10분쯤 전주에서 올라온 신혼부부 김모씨(당시 28세)와 장 모 씨(당시 27세)가 탄 검은색 그랜저가 강원도 삼척시의 한 비포장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사실혼 관계였던 부부는 슬하에 7살, 2살 두 딸을 두고 있었다. 어려운 형편 탓에 결혼식을 미루다 사건 이틀 전 뒤늦은 결혼식을 올리고, 삼척시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었다. ━사실혼 7년 만에 떠난 신혼여행…엽총 맞고 숨진 부부━부부가 탄 차량 앞에는 아주 느린 속도로 달리는 엑센트 차량이 있었다. 이 차 뒤에서 달리던 부부의 차량은 비포장도로의 흙먼지를 뒤집어쓸 수밖에 없었고, 시야가 제대로 확보되지 않아 주행이 힘든 상태였다. 결국 운전하던 남편 김씨는 속도를 높여 이 차를 추월했다. 그러자 엑센트는 곧장 따라붙었고, 창문을 내린 뒤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2002년 1월18일, 당시 최고 인기를 누리던 가수 유승준이 미국 시민권 선서식에 참여했다. 이때 그는 '4급 공익근무요원' 판정받고 입대를 석 달 앞둔 상황이었다. 병역 의무를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 시민 스티브 승준 유가 된 그는 "2년 반 동안의 공익근무를 하고 나면 내 나이가 거의 서른이다. 처음부터 다시 영주권 준비를 해야 하고, 영주권이 나오고 시민권이 나올 때까지 사실상 가족과 생이별이다. 또 댄스가수 생명이 짧은 걸 저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선택으로 그는 '병역 기피 대명사'로 자리 잡았고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땅을 밟지 못하고 있다. ━1997년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병역법 개정안 시행 후 2002년 활동 막 내려━유승준은 1997년 데뷔와 동시에 스타덤에 올랐다. 1집 활동 곡이었던 '가위', '사랑해 누나'가 히트를 하면서 등장과 동시에 톱스타로 자리 잡았다. 이어 '나나나', '열정', '찾길 바래', 'Wow' 등 발표하는 곡마다 큰 사랑을 받았다.
일본의 '안전 신화'가 무너졌다. 1995년 1월 17일 화요일 오전 5시 46분. 일본 효고현 아와지섬 북부를 진원으로 하는 규모 7. 3의 강진이 발생했다. '한신·아와지 대지진(고베 대지진 또는 한신 대지진)'으로 부르는 이 자연재해는 일본 기상청 관측 사상 최초로 진도 7이 기록된 대재앙이었다. 특히 고베 지역은 과거 400년 동안 큰 지진이 없어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되고 있어 충격이 더 컸다. 일본의 안전 신화에도 심각한 균열을 냈다. 지진 발생 이전까지 일본 사회는 고도 경제 성장기를 거치고 있었고, 인프라와 기술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갖고 있었다. 불과 20초의 지진으로 도시 기능이 마비됐고, 일본 사회가 믿어왔던 안전 신화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구조적 전환점이 됐다. 사망자는 6400명, 부상자는 4만3000명이 넘었다. 당시 재산 피해 규모는 10조엔(당시 환율 기준 한화 약 80조원) 정도로 추산됐다. ━20초 만에 무너진 고속도로… '안전 신화'의 붕괴━지진 발생 당시 효고현 남부 지역은 주요 경제권인 '간사이 지방'의 핵심 물류 거점이자 주거 밀집 지역이었다.
조국 광복을 불과 1년 남짓 앞둔 1944년 1월 16일 차가운 베이징 감옥에서 불꽃 같은 시인이자 독립투사였던 이육사가 마흔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육사는 1904년 경북 안동군 도산면 원천동에서 퇴계 이황의 14대손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원록으로 6명의 형제 중 차남이다. 1920년 안일양과 결혼한 후에는 백학학원에서 학문을 닦고 교편을 잡았다. 1923년에는 4월 학기에 맞춰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서 활약한 노동운동자 김태엽에 따르면 이육사는 당시 흑우회라고 불리는 무정부주의자 단체 회원이었다. 이육사는 조선인 유학생을 규합해 일제에 대한 투쟁을 모색했다고 한다. 이때 일본을 휩쓴 관동대지진의 혼란 속에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터무니없는 유언비어가 유포됐고, 이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조선인이 광기 어린 폭력에 희생됐다. 이육사는 힘없는 식민지 조국의 참담한 현실을 목격했다. 귀국 후인 1927년 10월 18일 이육사는 대구 조선은행 폭탄 사건에 연루된다. 이 사건은 독립운동가 장진홍이 꿀단지에 폭탄을 숨겨 조선은행 대구 지점을 폭파하려한 항일 의거로, 폭탄이 담긴 꿀단지의 필적이 동생 이원일의 글씨체와 똑같다는 억지 구실로 네 형제가 모두 연행됐다.
2007년 1월 15일. 김명호 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교수가 당시 서울고법 민사2부 박홍우 부장판사에게 이른바 '석궁 테러'를 가하는 일이 벌어졌다. 김 전 교수는 복직 소송에서 패소하자 "개판 같은 재판"이라며 앙심을 품고 재판장이었던 박 부장판사의 집을 찾아가 석궁을 쐈다. 박 부장판사가 도움을 요청하자 아파트 경비원과 운전기사가 달려와서 김 전 교수를 제압했다. 박 부장판사는 옷을 갈아입은 후 구급차를 타고 서울의료원 응급실로 이송됐다. ━성균관대 조교수 재임용에서 탈락하자…학교 상대 소송 ━김 전 교수는 서울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오하이오 주립 대학교를 거쳐 미시간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1991년 성균관대학교 수학과 조교수로 임용됐다. 1993년 수학과 조교수로 재임용됐지만 1995년 10월 부교수 승진에서 탈락했다. 이어 1996년 2월에는 조교수 재임용에서 제외됐다. 김 전 교수는 재임용에서 탈락하자 성균관대학교를 상대로 소송을 냈고 1, 2심에서 연달아 패소했다. 그는 1998년 이민을 떠났고 뉴질랜드와 미국 등에서 무보수 연구교수로 지내다 2005년 3월 귀국했다.
39년 전 오늘, 1987년 1월14일.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대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 열사가 경찰 고문을 받다가 22세 나이로 사망했다. 공안당국은 조직적으로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지만 진실이 드러나면서 1987년 6월 항쟁을 촉발했다. ━1987년 1월14일,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에서 벌어진 일━1980년대 중후반 들어 전두환 정권 탄압과 그에 맞서는 저항은 점점 더 격해졌다. 경찰은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으로 수배를 내린 박종운 서울대 학생을 찾기 위해 후배인 박종철 열사를 1987년 1월14일 불법 체포했다. 박 열사를 데리고 간 곳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 509호 조사실이었다. 경찰 대공수사관들은 박종운 소재를 추궁하며 폭행, 전기 고문, 물고문 등을 가했다. 극한 고문 도중 박 열사는 결국 의식을 잃고 체포 당일 사망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 ━경찰은 고문 사실을 은폐하려 시신을 화장하려 했지만 검찰이 거부했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듯한 행동을 수상히 여겨 시신 부검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