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권의 웰빙에세이
일상 속 건강과 행복을 위한 다양한 정보와 실천법을 쉽고 친근하게 전달합니다. 몸과 마음의 균형, 웰빙 트렌드, 자기관리 팁 등 삶의 질을 높이는 유익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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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께서는 현재의 이 생활에 만족하시는지요?" "대궐 속에 있는 사람이 어디 가려 하겠소." 묻는 분은 법정이고 답하는 분은 성철이다. 성철 스님은 평생 누더기를 걸치고 산중에 거했다. 토굴에서 8년을 눕지 않고 참선하고, 외진 암자에 철망을 두르고 홀로 10년을 수행했다. 깨달음을 구하는데 얼마나 엄하고 독한지 별명이 '가야산 호랑이'였다. 불법 앞에 사정을 두지 않으니 물렁한 제자들은 오금을 펴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런 철저함과 꿋꿋함이 흔들리지 않는 선승의 좌표가 되어 제자들을 붙들었다. 성철 스님은 출가해서 수도를 시작할 때 세 가지를 결심한다. '잘 먹고 잘 입고 잘 자지 않으리라!' 그래서 평생 맨 것을 간 없이 먹는다. 사시사철 광목과 삼베 옷 두 벌로 지낸다. 큰 절을 피해 토굴이나 암자에서 산다. 의식주 세 가지에서 최저의 생활을 하면서 최고의 노력을 기울이기로 수행의 근본을 세운 것이다. 그런 분이 "지금 대궐에 사는 데 다른 어느 곳을 넘보겠냐"고 한다. 스
"누구든지 덤벼라. 절대로 당신과 싸우지 않겠다! 당신은 결코 나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골목 깡패들이 여학생을 놀리고 있다. 급한 상황이고 도와줄 사람이 없다. 경찰에 신고해도 늦을 것 같다. 어찌 하시겠나? 1. 못 본 채 지나간다. 2. 말린다. 시비가 붙으면 맞서 싸운다. 치고 박는다. 3. 말린다. 시비가 붙어도 맞서 싸우지 않는다. 맞으며 말린다. 첫 번째라면 비겁하다. 겁쟁이다. 더 말 할 자격이 없다. 두 번째라면 용기 있다. 멋지다. 불의에 맞서는 정의의 주먹이 빛난다. 폭력에 대한 반폭력, 1차 폭력에 대한 2차 폭력을 인정한다. 세 번째도 용기 있다. 멋지진 않다. 대신 어떤 감동이 있다. 폭력에 대한 반폭력, 1차 폭력에 대한 2차 폭력을 넘어서는 평화의 울림이 있다. ​ "누구든지 덤벼라. 절대로 당신과 싸우지 않겠다! " 이런 각오가 바로 세 번째의 비폭력주의다.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이현주 목사는 "첫 번째 폭력은 접어두고 두 번째 폭력의 주인
"행복해지기는 어렵지 않아요. 가진 걸 사랑하면 돼요." 아흔 살 아우구스티노 수녀가 서른 살 청년 존 쉴림에게 말한다. 아우구스티노 수녀는 세인트메리라는 작은 마을의 성당 수녀원에서 도자기 공방을 한다. 명문 하버드대학을 나온 존 쉴림은 고향으로 돌아와 교직을 얻고 책도 내려고 하는데 제대로 풀리는 게 없다. 갈피를 못 잡는 그에게 아우구스티노 수녀는 말한다. "지금 가진 걸 사랑하세요. 그러면 행복합니다." 나는 어떤가? 그만 벌기로 결심하고 산골로 왔으니 더 벌고 더 가지려는 욕심은 많이 내려놓은 셈이다. 더 뛰어오르고 더 떨치려는 욕망도 늦지 않게 접은 셈이다. 그리고 나는 편안하다. 가볍다. 예전보다 행복하다. 더 내려놓고 더 접으면 더 행복하리라. 그만 벌기로 결심했다는 것은 지금 가진 것 안에서 소박하게 살겠다는 뜻이다. 가진 것을 불리고 쟁이려고 아득바득 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실은 이런 말도 조심스럽다. 나는 이미 많은 것을 가졌기에. 이만큼 가진 것도 때로는 부
"행복을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니지 마라. 행복이 제 발로 찾아오게 하라. 그 비밀은 단순한 삶의 방식에 있다."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공감! 나도 행복과 '밀땅' 할 때 이런 방법을 쓰곤 한다. 예컨대 배고플 때까지 안 먹기. 속을 비우면 먹는 행복이 제 발로 찾아온다. 맛있는 거 찾아다니느라 너무 애쓸 거 없다. 배고프면 뭐든 맛있다. ​같은 이치로 목마를 때까지 안 마시기. 산책이든, 산행이든 한 나절 걷는 정도라면 굳이 마실 것을 챙기지 않는다. 슬슬 목이 말라오면 행복도 목이 마른 것이다. 막걸리 한 잔이 아른거리면 행복은 애가 타는 것이다. 그럼 됐다. 내가 이겼다. 이제 행복이 제 발로 찾아와 물도 달라 하고 술도 달라 할 것이다. 흠! 나도 자존심이 있지. 행복을 구질구질하게 쫓아다닐 순 없지. 행복의 꽁무니를 쫓으면 바쁘고 고단하다. 행복이 제 발로 달려와서 안기면 바쁠 것도 없고 고단할 것도 없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 단순한 삶에 행복의 비
"적은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많은 것으로 이루는 것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14세기 영국의 신학자이자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컴(William of Ockham)은 말한다. "필요 없이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같은 값이면 간단한 쪽을 택하라. 불필요한 가정은 면도날로 잘라내라." '오컴의 면도날'이란 말이 여기서 나온다. 오늘날 '오컴의 면도날'은 논리학이나 과학이론에서 앞세우는 '단순성의 원칙'을 상징한다. 어떤 사실이나 현상에 대한 설명들 가운데 논리적으로 가장 단순한 것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 단순함이 복잡함을 이긴다. 적은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면 적은 것으로 하라. 적은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많은 것으로 이루는 것처럼 허망한 것은 없다. 나는 어떤가? 적은 것으로 누릴 수 있는 행복을 많은 것으로 이루려고 기를 쓰고 있지 않은가? 평생을 그리 살며 삶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삶에서도 가장 단순한 것이 정답이다. 쓸데없이 삶을 복잡하게 만들지 마라. 같은
나도 아름다운 道의 자리에 서고 싶다. 어떻게 서나? 몇 가지 이미지로 가늠해보자. 하나, 스윗 스팟(sweet spot). 테니스 라켓에서 공을 가장 잘 받아칠 수 있는 곳을 말한다. 가운데 부근의 단 한 곳이다. 너무 팽팽하지도 않고 너무 느슨하지도 않은 곳, 너무 많지도 않고 너무 적지도 않은 곳이다. 말보다는 감으로 찾아야 한다. 머리보다는 몸으로 익혀야 한다.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바로 그곳! 거기가 테니스 라켓에서 道의 자리다. 달콤한 중심이다. 그곳은 당연히 라켓 안에 있다.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깊은 안에 있다. 누구든 그것을 밖에서 찾지 않으리라. 나의 道의 자리라고 다를 리 없다. 그것은 분명 내 안에 있다.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깊은 안에 있다. 나는 안을 살펴야 한다. 안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 내 안의 중심에서 아주 미묘하고 민감한 그곳을 찾아야 한다. 말이 아니라 감으로 느껴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익혀야 한다. 온몸으로 저리게 깨달아야 한다
누구는 道라 하고, 누구는 중도라 하고, 누구는 중용이라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그 말이 다 그 말이다. 그걸 누구는 하느님이라 하고, 누구는 하나님, 누구는 하늘님, 누구는 한울님이라고 하는데 역시 그 말이 그 말이리라. 空이라 하든, 無라 하든, 무위라 하든 손가락만 다를 뿐 가리키는 곳이 다르겠나. 그러니 서로 손가락질 하면서 다투지 말고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볼 일이다. 그래야 신을 만나든, 진리를 깨우치든 하지 않겠나. 나도 말은 이렇게 했지만 도무지 뭐가 뭔지 헷갈릴 때가 있다. 뭐가 道고, 뭐가 중도고, 뭐가 중용인지 알듯 말듯 한 데 결국 모르겠고, 잡힐 듯 말듯 한 데 결국 놓치는 식이다. 이럴 때는 이 손가락 저 손가락 따지지 말고 몇 가지 이미지를 떠올려 보자. 하나, 태풍의 눈. 태풍이 몰아쳐도 태풍의 눈은 고요하다. 평화롭다. 바람 한 점 없는 무풍지대다. 태풍의 눈은 비어 있다. 하지만 텅 빈 것이 거대한 것을 품는다. 무풍이 강풍을 거느린다. 태풍의
나는 안과 밖이 다르다. 겉으로 포장한 나와 속으로 숨은 나가 같지 않다. 나는 두 얼굴의 사나이다. 겉으로 포장한 나를 칼 융은 '페르소나'라고 한다. 그 뒤에 숨은 나를 ‘그림자’라고 한다. 겉 얼굴인 페르소나와 속마음인 그림자의 관계는 시소게임과 비슷하다. 페르소나는 시소의 오른쪽에, 그림자는 왼쪽에 앉는다고 치자. 내가 한 개의 가면을 쓰면 시소가 오른쪽으로 기운다. 그와 함께 왼편에 한 개의 그림자가 생기고, 시소는 왼쪽으로 내려간다. 내 삶의 무게는 한 개의 가면과 한 개의 그림자다. 나는 둘 사이에서 균형을 맞춰야 한다. 이 정도면 가볍다. 나는 또 한 개의 가면을 쓴다. 그러면 또 한 개의 그림자가 생기고, 내 삶의 무게는 두 개의 가면과 두 개의 그림자가 된다. 나의 시소게임은 두 배로 무거워지고, 그만큼 균형을 맞추기 어려워진다. 그런데 나는 또 가면을 쓴다. 세 개, 네 개, 다섯 개…. 나의 가면은 몇 개인가? 내 삶은 몹시 무겁다. 수십 개의 가면과 수십 개의
나는 내가 쌓아온 것들을 이고 다닌다. 지고 다닌다. 업고 다닌다. 나는 내가 쌓아온 것들을 매달고 다닌다. 흔들고 다닌다. 광고하고 다닌다. 나를 보라. 나를 인정하라. 나를 환호하라. 나의 인격, 나의 철학, 나의 신념, 나의 원칙, 나의 소신……. 나는 이런 사람이다. 나는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다. 당신은 내가 쌓아온 것들에 주목한다. 나의 이력, 나의 지위, 나의 재산, 나의 집안, 나의 집, 나의 차……. 나의 옷, 나의 지갑, 나의 구두, 나의 향수, 나의 벨트, 나의 시계, 나의 목걸이, 나의 반지, 나의 핸드백……. 당신은 이것들을 인정한다. 이것들을 환호한다. 그러나 이것들이 나는 아니다. 내가 아무리 이것들에 매달려도, 이것들에 열광해도 이것들이 나는 아니다. 나는 그것을 안다. 마음 깊은 곳에서 안다. 이것들은 나를 채우지 못한다. 나를 깨우지 못한다. 나에게 답을 주지 못한다. 이것들은 내가 모은 껍데기이기에. 내가 꾸민 장식품이기에. 나를 감싼 포장지이기에.
일과 나의 관계는 크게 네 가지다. 1. 나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 2. 나에게 좋은데 남에게는 안 좋은 일 3. 나에게 안 좋지만 남에게는 좋은 일 4. 나에게 안 좋고 남에게도 안 좋은 일 나에게 좋고 남에게도 좋은 일이라면 최고다. 더 말할 나위 없다. 지금처럼 계속하면 된다. 그는 자기 삶에 만족할 것이다. 다른 삶을 원치 않을 것이다. 삶에 어떤 문제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진짜로 행복한 사람이다. 반대로 나에게 안 좋고 남에게도 안 좋은 일이라면 최악이다. 주저할 것 없다. 얼른 일을 멈춰야 한다. ASAP(As Soon As Possible)! 그래야 나도 살고 남도 산다. 나머지 두 경우는 한 쪽만 좋다. 나에게 좋은데 남에게는 안 좋거나 나에게 안 좋지만 남에게는 좋은 일. 당신은 어떤가? 남이야 어찌되든 나 좋으면 그만인가? 죽도록 남 좋은 일만 하고 있나? 이런 경우도 헷갈릴 것 없다. 어느 쪽이든 일과 나의 관계가 잘못되었다. 나는 반쪽짜리 일에서
목사 시인 정원은 말한다. "삶을 살아갈수록/종이 속의 글씨보다/빈 여백의 자리가 좋다/붙어 있는 글들이 답답하다/써 있는 글들 속에서 지혜를 느끼지만/비워진 여백 속에서/안식을, 은총을 경험한다." 그렇다. 나는 글에 매달려 글을 드러내는 여백을 놓치곤 한다. 여백에 숨은 안식과 은총을 잊곤 한다. 삶은 얼마나 모순인가.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도 여백을 두지 않으면 갑갑해진다. 그것은 빈 틈 없는 그림과 같다. 쉼표 없는 노래와 같다. 고요함 없는 음악과 같다. 일본의 평화·환경운동가이자 화가인 가주카이 다나하시. 그는 "선 하나를 그을 때조차 우리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고 한다. "어떤 선을 그리든지 그리는 자신이 다 담겨 있다"고 한다. 나는 선에 있다. 동시에 그 선을 드러낸 여백에도 있다. 선이 그어지면 그 뒤의 여백 또한 드러나기에 나는 숨을 곳이 없다. 다나하시는 말한다. "우리는 여백을 창조할 수 없다. 다만 여백이 살아나도록 해줄 뿐이다. 여백이란 우리들 자신의
나는 '커피 보리'에 앉아 있다. '커피 보리'는 읍내의 작은 카페다. 읍내라지만 변두리 골목 안에 숨은 빈티지 커피숍. 그래도 커피 맛은 아주 좋다. 나는 이 가게의 단골이다. 때로는 며칠씩 '출근부'를 찍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내 아지트다. 나는 여기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 이상하게 잘 읽힌다. 그래서 어려운 책은 일부러 카페로 들고 간다. 사실 읍내에 내 아지트는 두 곳이 더 있다. 하나는 천사 다방(엔제리너스). 번화가에 자리한 가장 좋고 비싼 커피숍이다. 또 하나는 어디야 다방(이디야). 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가장 싸고 북적이는 커피숍이다. 나는 세 곳의 아지트를 내 나름의 기준에 따라 애용한다. 예컨대 한두 시간이 나면 '어디야', 두세 시간이 나면 '보리', 서너 시간이 나면 '천사'로 간다. 한 시간 쯤 짬이 나는 데 '어디야' 말고 다른 데로 가기엔 본전 생각이 난다. 서너 시간 죽칠 작정인데 '보리'로 가면 어쩐지 눈치 보인다. 이럴 땐 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