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빙에세이] 읽고 쓰고 걷고 –3 / 나의 아지트

나는 '커피 보리'에 앉아 있다. '커피 보리'는 읍내의 작은 카페다. 읍내라지만 변두리 골목 안에 숨은 빈티지 커피숍. 그래도 커피 맛은 아주 좋다. 나는 이 가게의 단골이다. 때로는 며칠씩 '출근부'를 찍는다. 그러니까 여기는 내 아지트다. 나는 여기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카페에서 책을 읽으면 이상하게 잘 읽힌다. 그래서 어려운 책은 일부러 카페로 들고 간다.
사실 읍내에 내 아지트는 두 곳이 더 있다. 하나는 천사 다방(엔제리너스). 번화가에 자리한 가장 좋고 비싼 커피숍이다. 또 하나는 어디야 다방(이디야). 버스터미널 옆에 있는 가장 싸고 북적이는 커피숍이다.
나는 세 곳의 아지트를 내 나름의 기준에 따라 애용한다. 예컨대 한두 시간이 나면 '어디야', 두세 시간이 나면 '보리', 서너 시간이 나면 '천사'로 간다. 한 시간 쯤 짬이 나는 데 '어디야' 말고 다른 데로 가기엔 본전 생각이 난다. 서너 시간 죽칠 작정인데 '보리'로 가면 어쩐지 눈치 보인다. 이럴 땐 커피 값이 비싸지만 익명성이 보장되는 '천사'가 낫다.
책 들고 읍내 다방을 돌고 도는 나! 그것이 좁은 시골 바닥에서 뒷소문이 나 졸지에 나는 '홍 반장'이 됐다. 나처럼 읍내 다방을 애용하며 수다를 즐기는 젊은 아줌마들이 쑥덕거린 얘기가 한 바퀴 돌아서 나에게 왔다. "저 꽁지머리 아저씨는 완전 홍 반장이야. 가는 데마다 있어." 영화 주인공 <홍 반장>의 오지랖이 넓긴 넓은가 보다. 이 외진 동네에까지 분신을 두었으니.
카페에서 책 읽기. 이것이 나의 호사여서 다행이다. 더 비싼 호사라면 감당 못할 뻔 했다. 벌이를 내려놓았으니 하고 싶은 일이라고 마음대로 다할 순 없다. 하고픈 일마다 돈이 많이 든다면 얼마나 속상할까. 얼마나 골치 아플까.
내가 원하는 일이 읽고 쓰고 걷는 한 세트로 간추려져서 좋다. 이 일은 돈이 별로 들지 않는다. 경제적이다. 책은 주로 빌리거나 헌 책을 사서 읽는다. 커피 값은 나만의 호사로 친다. 이 일은 또한 시간과 장소에 자유롭다. 전천후다. 언제 어디서든 읽다가 쓰고 싶으면 쓰고, 쓰다가 걷고 싶으면 걷고, 걷다가 읽고 싶으면 읽는다. 셋은 한 통속이다. 하나처럼 사이가 좋다. 서로 어긋나거나 충돌하지 않는다.
여행을 가도 헷갈리지 않는다. 집에서는 읽고 쓰다가 걷는다. 여행할 때는 걷다가 읽고 쓴다. 쿵쿵작 쿵작작! 강약이 바뀌지만 박자는 똑 같다. 한 나절 낯선 길을 걷다가 마주친 작은 카페. 그곳 또한 나의 아지트다. 세상 구석구석에 숨겨둔 나의 안가다. 그곳에서 다리를 쉬고 한 잔의 커피를 마실 때, 창밖의 풍경을 바라볼 때, 책장을 넘길 때, 무언가 끄적일 때 그것은 또 얼마나 행복한가. 때로 돌아다니고 싶어 여행을 간 건지, 이름 모를 카페에 앉고 싶어 여행을 간 건지 헷갈리곤 한다. 읽고 쓰고 걷기는 이렇게 하나로 섞여 내 삶을 이룬다. 내 삶을 채운다. 그러면 충분한 것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