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교육 오늘의 역사] 1914년 오늘 사라예보 사건

[MT교육 오늘의 역사] 1914년 오늘 사라예보 사건

MT교육 정도원 기자
2013.06.28 08:30

사라예보에서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부부를 저격하는 총성이 울려퍼지다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대공 부부를 저격한 직후 체포당하고 있는 세르비아인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
사라예보의 라틴 다리에서 대공 부부를 저격한 직후 체포당하고 있는 세르비아인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

1914년 오늘(6월 28일)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 부인 호헨베르크 여공작 소피아 호테크가 세르비아인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에 의해 암살당했다.

◆세르비아, 19세기 들어 오스만의 세력이 쇠퇴하자 독립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신음하던 세르비아인들은 19세기 들어 오스만의 세력이 쇠퇴하자 연달아 봉기했다. 1817년 오스만은 세르비아 공국의 성립을 인정했다. 세르비아가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세르비아 공이 오스만 술탄에게 매해 공납을 바친다는 조건에서였다.

세르비아 공과 보수파는 이 상태에 만족해 한동안 발칸 반도의 상황은 안정됐다. 그러나 점차 오스만과의 적극적인 개전과 발칸 반도 전역의 해방을 부르짖는 자유파의 목소리가 커졌다. 1876년 정권을 잡은 자유파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전력은 오스만의 우세였지만 러시아 제국이 참전하면서 전황이 뒤집혔다. 산스테파노 조약을 통해 승전국이 된 세르비아는 오스만으로부터의 완전히 독립하고 영토도 확장했다.

그런데 산스테파노 조약은 세르비아·몬테네그로·루마니아를 오스만으로부터 독립시키고 불가리아 공국도 오스만으로부터 러시아의 제후국으로 이전하며, 다르다넬스 해협을 러시아가 통제하게 되는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었다. 오스만의 멸망과 러시아의 팽창을 좌시할 수 없었던 영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하 오·헝 제국)과 손을 잡고 이를 취소하도록 압력을 넣었다. 결국 산스테파노 조약은 폐기되고 베를린 조약이 체결되었다.

◆쿠데타로 오·헝 제국과 세르비아 왕국간의 관계 급격히 악화

베를린 회의를 통해 영국과 오·헝 제국이 외교적 승리를 거두자 세르비아는 오·헝 제국이야말로 진정한 강대국이라 생각하고 접근했다. 1881년 오·헝과 세르비아는 밀약을 맺었다. 이듬해 세르비아는 공국이 아닌 왕국을 선포하며 오스만이 아닌 오·헝의 보호국이 되기로 선언해 오스만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났다.

그런데 1903년 세르비아 왕국에서 쿠데타가 발발하면서 친오·헝의 국왕 알렉산다르 1세가 피살되고 친러시아의 페타르 1세가 새로운 국왕이 되었다. 페타르 1세가 세르비아군의 무기 조달처를 오·헝 제국에서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로 전환하자, 오·헝 제국은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인 축산품에 고율의 관세를 부과해 보복했다.

세르비아의 주요 수출품이 돼지였기 때문에 이 무역 분쟁을 '돼지 전쟁'이라 하며, 양국간의 감정은 급격히 악화됐다. 이는 1908년 오스만의 청년 투르크당 혁명을 틈타 오·헝 제국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병합하자 절정에 달했다. 세르비아인이 많이 살고 있는 보스니아를 세르비아 왕국도 호시탐탐 노려왔기 때문이었다.

◆대공의 귀천상혼, 결혼기념일을 위해 사라예보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귀천상혼한
소피아 호테크 호헨베르크 여공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위계승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귀천상혼한 소피아 호테크 호헨베르크 여공작.

한편 오·헝 제국의 제위를 계승할 예정이던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0년 6월 28일 테센 공작의 궁녀 소피아 호테크와 결혼했다. 황제와 형제인 대공들이 결혼에 대한 반대의 의사로 모두 불참한 가운데 귀천상혼의 결혼식이 치러졌다. 결혼한 뒤에도 소피아는 황실 일가로서의 특권을 인정받지 못했으며, 소피아의 소생에게는 제위 계승권이 인정되지 않았다. 심지어 공개 석상에서 소피아가 대공의 옆자리에 앉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소피아가 대공비라 불리는 것도 불가능했으며, 단지 황제가 수여한 작위인 호헨베르크 여공작으로 불리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다.

1914년 결혼기념일이 다가오자 대공은 군사 검열을 자처해 수도인 빈을 벗어나 보스니아로 향했다. 황족과 귀족들만 가득한 수도에서는 여공작이 인정받지 못하는 지위지만, 수도를 벗어나 국경으로 향하면 여공작도 예우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의식한 행보였다.

그러나 세르비아인들의 비밀결사는 이 소식을 접하고 오·헝 제국의 제위계승자를 암살함으로써 의분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비밀결사의 일원이었던 보리요베 예프티치는 "(대공의 방문 소식을 접하고) 우리의 결정은 거의 즉각적으로 떨어졌다. 폭군에게 죽음을!"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대공의 사형 판결을 집행할 인원으로 22명의 단원을 선출했다"며 "대공이 사라예보역에 도착하기 두 시간 전에 스물 두 명의 동지 모두는 각자 정해진 위치에서 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시청에 이르기까지 대공이 지나갈 길을 따라 500야드 간격으로 배치돼 있었다"고 회고했다.

◆두 발의 총성, 제1차 세계대전을 불러오다

1914년 6월 28일 오전 10시 15분, 대공 일행은 사라예보역에서 4대의 차량에 나눠타고 시청으로 향했다. 두 명의 자객은 각자 고층 건물의 창문에서 저격하려고 했지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는 사이에 실패했다. 세 번째 자객인 가브리노비치는 길가의 환영 인파 속에 섞여 있다가 폭탄을 차량 행렬에 던졌다. 폭탄은 대공의 차량을 지나쳐 후속 차량 앞에서 폭발했다. 이로 인해 수행원 12명이 부상했다. 시가지를 울리는 폭음을 들은 나머지 자객들은 성공했든 실패했든 이것으로 끝이라 여겨 뿔뿔이 흩어졌다.

시청에 도착한 대공은 사라예보 시장에게 "폭탄이 이곳의 환영 인사인가"라고 쏘아붙였다. 대공은 폭발로 다친 수행원들을 위문하기 위해 이후 일정을 취소하고 병원으로 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제국군 주둔 사령관인 포티오레크 장군은 "반란자들이 들끓고 있어 위험하다"며 반대했지만 시 관계자들은 "사라예보 전체가 자객으로 가득찬 것은 아니다"라며 재반박했다. 대공은 여공작에게 "안전하게 시청에 남아 기다리고 있으라"고 했지만 오랜만에 대공과 동석하게 된 여공작은 "오늘은 어디든 따라가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대공의 차량은 병원으로 향했지만 당초 예정에 없던 동선이라 운전수는 길을 잘못 들어섰다. '라틴 다리'에 들어서서야 이를 알아챈 운전수는 차를 멈추고 천천히 후진하기 시작했다. 이 때 인근 식당에서 요기를 마치고 나오던 자객 가브릴로 프린치프는 우연히 대공의 차량을 발견하고 권총을 꺼내 차를 향해 쏘았다. 총격당한 대공 부부는 보스니아 총독부로 급히 후송됐지만,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둘 다 절명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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