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 오늘]안보우선주의 계기된 '1·21 사태-김신조 사건'


1968년 1월21일 밤 10시10분, 북한군 31명이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세검정고개에서 불심검문에 적발됐다. 청와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이들은 갑자기 검문경찰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단총을 무차별 난사했다. 그곳을 지나던 시내버스에도 수류탄을 던져 일반시민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다.
청와대를 기습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하려다 미수로 그친 이 일은 김신조 사건 혹은 1·21사태로 불린다. 김신조는 당시 유일하게 생포됐던 인물이다. 그는 생포 후 기자회견에서 "우리 31명의 임무는 박정희 XXX(모가지라는 뜻)를 따러 온 임무고…"라고 답하면서 대한민국을 놀라게 했다.
이 사건은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124부대 소속 31명이 당시 조선인민군 정찰국장인 김정태로부터 청와대 습격과 요인 암살 지령을 내리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대한민국 국군복을 입고 수류탄과 기관단총으로 무장한 뒤 1월17일 자정 휴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야간을 이용해 수도권에 잠입했다.
하지만 4일 뒤 세검정고개 창의문을 통과하려다 비상근무 중이던 경찰의 불심검문으로 정체가 드러나자 가지고 있던 무기를 이용해 저항하면서 발각됐다. 당시 현장에서 비상근무를 지휘하던 종로경찰서장 최규식 총경과 정종수 경사는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대한민국 군·경은 비상경계태세를 확립하고 현장으로 출동해 소탕 작전을 벌여 124부대 소속 31명 가운데 29명을 사살했다. 생존자 2명 가운데 김신조는 투항했고 나머지 한 명은 도주해 북으로 넘어갔다.
시도는 미수에 그쳤지만 이 사건 이후에 남·북간 군사적 긴장관계를 이유로 '국가 안보우선주의'가 시작됐다. 안보우선주의로 인해 대한민국 예비군과 육군3사관학교가 창설되고 일반학교에서 교련 교육이 실시되는 계기가 됐지만 노동조합과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데 악용되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간첩식별과 국민통제를 위한 수단으로 몇 년 뒤 주민등록제도도 도입됐다.
당시 사건으로 사망한 최규식 총경은 사후 경무관으로 특진되고 태극무공훈장이 추서됐다. 청운동 창의문 인근에 동상도 건립됐다. 투항한 김신조는 한국으로 귀순했고 이후 침례교 신학을 전공한 뒤 종교인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