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전 오늘…'민족사관 창시자' 차디찬 감옥서 숨지다

80년 전 오늘…'민족사관 창시자' 차디찬 감옥서 숨지다

이미영 기자
2016.02.21 05:45

[역사 속 오늘]'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기

"그는 항상 꼿꼿이 얼굴을 세우고 세수를 했다. 물을 손에 찍어 얼굴에 묻히니 소매며 바지 밑단을 물에 적시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소신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웃고 얘기할 땐 다정스러웠다."

소설가 이광수가 단원 신채호 선생을 묘사한 대목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화려한 이론이 아닌 자신의 사상을 몸소 실천한 당대 최고의 역사이론가이자 독립운동가였다.

오늘(2월21일)은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기다. 그는 1880년 충청남도 대덕군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신동소리를 줄곧 들었던 그는 1905년 25살의 나이에 성균관대 박사가 됐다. 그는 당시 을사조약을 맺는 등 조선의 정국이 혼란스럽게 흘러가자 관직을 포기했다.

/사진=위키피디아
/사진=위키피디아

이후 신채호 선생은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들어가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1년도 채 안돼 황성신문 사장인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을 발표한 것으로 계기로 신문 출간이 정지된다.

신채호 선생은 영국인 베델이 사주인 대한매일신보에서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인 1910년까지 애국 사상이 담긴 글로 계몽운동을 이어간다. 그는 당시 나라를 강하게 만들면 외세를 몰아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그가 집필한 '을지문덕' '이순신전'에도 그 사상이 녹아있다.

중국에서 신민회, 상해임시정부에서 항일 운동을 왕성하게 펼친다. 그의 항일운동은 후반에 들어서 변하게 된다. 내부를 강하게 하는 '자강'의 방법과 정반대의 길을 선택한다. 폭력으로 일본을 몰아내야 한다는 주장을 펴게 된 것이다. 신채호 선생이 무정부주의를 신봉하게 계기가 되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아나키스트'로 활동한 그는 의열단 요청을 받고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한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이는 당시 의열단 소속 청년들의 필수품이 됐다.

신채호 선생은 1928년 잡지 '탈환'을 발간하고 동지들과 합의해 외국환을 입수, 자금 조달차 타이완으로 가던 중 지룽항에서 체포됐다. 그는 10년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서 복역 중 1936년 생을 마감했다.

신채호 선생은 실천적 항일운동뿐 아니라 우리나라 역사연구에도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란 결론을 내리고 지치지 않고 일본을 대항해 투쟁했다.

'역사라는 것은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란 명제를 내걸어 민족사관을 수립했다. 이는 한국 근대사학의 기틀이 됐다. 21일 신채호 선생을 기리는 '단재 신채호 선생 순국 80주기 추모제'가 청주의 단재영당에서 개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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